논리적 삶과 창조적 삶
23.6.25
오늘날 사람들은 학교에서 긴 교육을 받는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과거나 현재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지식을 계속 배웠다는 뜻이며 이럴 때 우리의 교육이 가지는 형태는 X는 이러저러하다의 형태를 띈다. 교통법은 이러저러하다, 대구의 특산물은 이러저러하다, 삼각형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다, 르네상스란 이러저러한 역사적 사건이다라는 식이다.
이런 걸 가르치는 학교는 기본적으로 아직은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글쓰기를 시켰다면 그 글쓰기는 연습을 위한 것이지 다음주에 신문사설을 발표해야 하니 준비하라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즉 프로그램이든 음악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당장 바깥에서 전시하고 판매하고 사람들에게 유통할 것을 목적으로 일을 하는 회사같은 곳과 학교와는 다르다. 선생님의 평가는 받겠지만 세상의 평가를 받아서 이득을 보거나 피해를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교육기간이 길어지면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식의 화법을 당연시 하게 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로보트가 되고 만다. 즉 앞에서 말한 교육을 위한 지식이나 화법을 유일한 화법으로 여기게 된다. 교육 현장에서의 문제는 정답은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데 내가 그걸 이해하냐 못하는가가 문제다. 선생님의 설명이 나쁠 수 있고 내가 이해력이 떨어질 수 있지만 상황이 제공하는 문제의 형식이 그렇다. 예를 들어 국가란 무엇인가의 답을 선생님이 가지고 계시므로 우리는 국가의 정의나 기능이 뭔지를 열심히 외우고 그 정의에 따라 올바른 국가를 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 바깥의 현실세계에서는 가장 중요한 판단은 그게 아니다. 일단 취직해서 말단사원이 되면 다시 학교에서 처럼 위에서 명령이 내려오겠지만 그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어느 회사에 취직해야 하는 것인지, 회사에 취직해야 하는 것인지, 창업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훌룡한 국가는 궁극적으로 말해서 그 국가의 정의가 어느 책에 나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게 아니라 주권을 가진 국민들이 이런 나라가 좋겠다라는 의견을 가져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런 부분들을 그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미묘하고 작은 차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5분만에 10년을 좌우할 문서에 사인을 하고 10년씩 혹은 평생을 고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진짜로 중요한 것을 원래 이렇게 한다면서 쉽게 판단하고 나면 그 이후에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그 판단을 되돌릴 수 없다. 집 한채를 사거나 팔고, 어느 곳에 취직하고, 누군가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러저러하게 키우고 하는 일에서 우리는 많은 중요한 판단을 한다. 그리고 나서 아둥바둥 뭘 해도 상황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잔짜 중요한 것을 은근 슬쩍 원래 이렇게 한다면서 처리하고 그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덜 중요한 것들에 매몰되는 것은 사기꾼에게 속는거나 다름없다. 실제로 사기꾼들은 일을 이렇게 하지 않던가?
넌 공화국이 뭔지 아니?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서 공화국의 정의를 죽 늘어놓은다음에 따라서 한국이 이러저러하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 올바른 결론을 도출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기나긴 학교 교육의 폐해로 국가에 대한 생각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객관적 답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그런 식의 논법은 마치 올바른 국가라는 것이 이미 어딘가에 존재하므로 그 본질을 우리가 보고나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식의 태도를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실종되어져 있다. 내 결혼은 나의 삶인데 넌 결혼이 뭔지 아니 같은 말로 시작해서는 온갖 쓸데없는 제약에 빠져드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언뜻 보면 학교의 선생님처럼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같지만 실은 대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유럽에 가본 적도 없이 유럽을 책으로만 배운 사람이랄까. 그런 사람은 유럽에 가도 진짜 유럽을 보지 못한다. 자기의 선입견만 확인하고 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중독된 우리는 선생님과 참고서를 찾는다. 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선생님과 참고서는 우리에게 이것은 저러한 것이다라는 지식을 주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 그렇게 써진 책을 찾는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서, 창업이란, 인공지능이란, 귀농이란, 정치란, 정의란, 투자란 이런 식으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다.
반면에 대화는 다르다. 대화란 반드시 정해진 주제에 고정된 것도 아닐 뿐더러 이게 이것이다라는 게 아니고 이런 면이 있지 않을까, 이런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이래야 하지 않을까라는 식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와 나를 주목하게 된다. 여행이란 본래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부산에서 출발했는데 어디로 갈까 라고 하면 어디로든 갈 수도 있지만 이런 길이 특히 괜찮아 보인다, 저 길은 이러저러해서 좋지 않아 보인다라고 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유들이란 논리적인 것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우리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통해 상대를 발견하고, 나를 발견하고,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나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이런 걸 해야겠구나 하거나 우리는 정말 이런 걸 신경써야 하는구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논리적 학교교육에 중독된 사람들은 그런 주관적 생각말고 객관적인 답을 말하라고 다그친다. 넌 뭐가 좋은데라고 하면 침묵한다. 중요한 건 객관적인 답이니까 말이다.
요즘은 인공지능이 뜨거운 주제다. 이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자꾸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를 찾으려고만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같은 잠재력을 가진 기술에 대해 그렇게 묻는 것은 인터넷이란 무엇인가, 텔레비전이란 무엇인가,. 컴퓨터란 무엇인가, 나아가 문자란 무엇인가를 그것들이 처음 나왔을 때 묻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런 발명들이 상당한 결실을 맺은 이후를 살고 있으므로 그런 질문에 대해 역사를 기반으로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 인터넷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몰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질문을 던지면 매우 기술적이고 제한적인 답변만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써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는 미래가 진짜로 오기전에는 확실히 알 방법이 없다. 또한 미래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지 그 미래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건 마치 내일의 점심식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객꽌적인 답을 찾으려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면 우리는 결국 내일 마음에 드는 점심식사를 못하게 된다.
지금 세상에서 SNS나 메신저 프로그램이나 검색기술은 엄청난 가치가 있다. 그런데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 인터넷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몰되면 미래에는 이런게 가능할 겁니다라는 답이 나올까? 텔레비전이 발명된 직후에 텔레비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전문가를 모아다가 하면 그 사람들이 티비 드라마나 광고시장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될까?
설사 기적적으로 그런 걸 말하는 사람이 있어도 논리적 화법에 매몰된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게 꼭 그렇게 되어야 하냐고. 학교교육에 중독된 사람은 과거와 현재만 본다. 즉 이미 일어난 객관적 사실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창조적 대화에서는 이런 기술은 예를 들어 이러저러한 것도 가능하게 할텐데 이건 참 멋지지 않아라고 말하는 식인데 상대방은 그걸 논리적으로 받아서 그런 건 그냥 상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나에게 이미 나온 응용예를 달라고 하기 쉽다. 그래서 인터넷가지고 지금 할 수 있는 것, 이미 사람들이 쓰고 있는 예는 뭐냐고 물을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런 응용예들은 주목할 가치가 하나도 없는 것들이었는데 그걸 열심히 보려고 하는 것이다.
정작 진짜 중요한 것은 미래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지금 뭘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당면과제다. 우리의 과거를 무시하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수없이 새로운 일들이 생겨나는 환경에서 미리 정해진 계획과 메뉴얼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주 아까운 일을 하는 것이다. 일상에 지쳐서 회복하자고 여행계획을 세운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이러저러한 길을 따라 여행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중간에서 그는 천국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너무나 괜찮은 여자를 만났다거나 너무나 괜찮은 일거리 제안을 받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좋기는 좋네. 하지만 나는 회복을 위한 여행을 하고 있는 거니까 계획대로 움직이자.' 그리고 그는 천국에 들어갈 기회를 버리고 회복을 위한 여행을 계속 하는 것이다.
이건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지만 긴 학교교육속에서 로보트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매일 같이 하고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바빠서 삶을 살 시간이 없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물어볼 시간이 없고, 심지어 돈을 벌 시간도, 즐거움을 누릴 시간도 없다. 우리는 할 일이 너무 많다. 이러저러한 일을 원래 하는 것이라고 다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노동과 오락은 상당부분 보기 나름이다. 보통 돈을 받으면 노동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오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런 건 엉터리다. 그렇다면 하루 종일 자기 아이를 보는 부모는 노동을 하나도 하지 않은 것이고, 회사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자동차 개발로 밤을 세우는 사람은 단순히 노동만 하고 있는 거란 말인가. 노동이 가지는 이런 주관적 성질을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논리적 화법에 중독되면 삶을 가혹한 노동으로 채우게 되기 때문이다. 뭐든지 그저 해야하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일로 가득 찬 삶이 된다. 내 선택이나 취향은 없고 그저 다 팔자가 그러니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자기 팔자를 욕하면서 스스로 그런 삶을 산다는 자각이 없다.
이 세상에는 대화를 나눠줄 동료들이 많이 있다. 책들도 대화를 나누자고 하면 좋은 책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대화를 나누는게 아니라 답을 주는 선생님이나 책을 찾는다. 학교를 벗어나면 여기 내가 선생님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다 사기꾼이거나 어리석은 인간들이다. 학교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닌 곳에서 선생님 운운하는 것은 남의 인생을 내가 결정하겠다는 것인데 그걸 어떻게 책임진다는 말인가.
계속 선생님을 찾는 동안에 삶은 지나간다. 지나고 보면 아 그때 이렇게 하는 사람들을 따라했으면 지금은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금도 누굴 따라해야 할까에 신경을 쓴다. 그건 마치 구글이나 테슬라같은 회사가 엄청 커지는 걸 보고 과거로 돌아가서 주식을 살껄이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투자는 자기 생각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선생님을 찾으면 인생은 낭비되고 노동으로 가득 차기 마련이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대화다. 우리를 발견하고,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무슨 댓가를 치루고 뭘 얻을까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느 길이든 다 괜찮겠지만 그 중에서 특히 우리 맘에 드는 미래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 답은 계속 선생님을 찾고, 뭐뭐란 무엇인가의 답을 찾으면 오히려 놓치게 된다. 진짜 선생님은 외면하고 사기꾼에게 끌려가게 된다. 우리는 논리적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