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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것과 가치있음의 정도

격암(강국진) 2023. 7. 24. 12:27

23.7.24

세상에서는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중요한 일이지만 이런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망각되기도 한다. 이 점 을 보여주는 한가지 이야기는 이렇다.

 

여기 유리병이 하나 있다. 그 병에 골프공을 가득 집어넣는다. 이제 골프공이 가득 한 병에 우리는 다시 모래를 넣는다. 그러면 가득 차 보이는 유리병에는 다시 모래가 들어간다. 공프공과 모래로 찬 병에 우리는 물을 붓는다. 그러면 가득 차 보였던 병에 다시 물이 들어간다. 

 

이 이야기는 보통 중요한 것을 먼저하라는 교훈을 준다고 알려져 있지만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의 의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뭔가가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데 있어서 우리가 망각하는 첫번째 사실은 우리의 인생을 포함해서 세상의 것들은 유한하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은 유한한 공간을 가진 병에 의해서 나타내 진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그 병에 넣을 수 없다. 오직 병 하나 만큼의 작은 부분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뭐가 가치가 있는지를 골라야 하고, 더 나아가 뭐가 더 가치가 있는지를 골라야 한다. 게다가 설혹 매우 가치가 있는 거라고 할 지라도 그 병에 들어가지도 않을 만큼 큰 것도 존재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현실은 언제나 이런 유한함에 지배당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시위를 하다가 교통신호를 어겨야 하는 일이 있을 때 그럴 수 밖에 없는 때도 있다. 어떤 메뉴얼에 따라서 살다가 어느 순간에는 그 메뉴얼을 잊어야 하는 때도 있다. 어떤 추천이나 상식에 따라서 살다가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위험한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일들이 언제나 정당화되고 언제나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도 아니지만 유한함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아서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수명이 만년인 인간과 수명이 백년인 인간은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청춘도 중년도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10년전의 1년이 10년후에 같은 1년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보편성이라는 이름앞에서 이걸 잊어버린다.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인생이 무한히 펼쳐져서 이번 기회가 사라져도 다음 기회는 언제나 또 오는 것처럼 생각한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자기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옳고 그름만 열심히 따지지 않았는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는 무한히 많은 일들이 있는데 그런 일들을 부딪히는 대로 옳고 그른것을 따지는 사람이 바로 그렇게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게 천원짜리 일인지 1억짜리 일인지를 먼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서 천원짜리 일은 천원짜리만큼 관심을 두고 1억짜리 일은 1억짜리만큼 관심을 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콩나물 값을 아끼고 있는 동안 내 전세금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보다 중요할 수도 있는 것은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로 관점을 바꾸면 마치 17세기 뉴튼의 과학혁명때 있었던 것같은 거대한 변환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일찌기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는 과학혁명의 핵심은 분류에서 측정으로의 변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있는게 아니라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무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있는게 아니라 사람들의 재산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관점의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뚝뚝 떨어진 집단들 대신에 분리되지않는 연속체를 가지게 만든다. 

 

옳고 그른 것이라는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그 경계에만 주목하게 만든다. 즉 틀린 것, 그른 것은 모두 같은 것이고, 옳은 것은 다 같은 것이다. 문제는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그 경계가 어디에 서있는가만 중요하다. 그 경계는 언제나가 아니면 대부분 부자와 가난뱅이를 구분하고, 뚱뚱한 사람과 날씬한 사람을 구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관적인 것인데도 우리는 그저 경계만 본다. 마치 학창시절에 시험을 보면 답이 맞을 때가 있고 틀릴 때가 있는 것처럼 세상을 2분법으로 보는 것이다. 

 

이래서는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뉴튼의 새로운 물리학은 이전의 과학과 달랐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매우 중요한 것과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고, 얼마나 중요한가, 얼마나 가치있는가를 보기 시작할 때 세상은 크게 달라 보일 수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생각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뭐가 얼마나 가치있는가를 생각해 보는데 시간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흑백론적으로 맞는 것, 틀리는 것만 구분하는 사람은 그런 걸 모른다. 애초에 그런 걸 생각해 보지도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토록이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옳고 그름의 경계선이란 것도 실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정의란 대개 그저 남들이 그렇다고 하더라, 관행이 그렇다더라는 식의 선입견들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건 사과를 먹으면 몸에 좋다라는 문장이 옳은지 틀린지만 생각하는 사람과 내가 평상시에 뭘 먹는지에 대해, 음식물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의학적인 상식들에 대해 공부하고 생각하면서 사과를 보는 사람의 차이다. 

 

세상에는 그렇다면 뭐뭐뭐가 옳다는 말입니까하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일종의 논리적 사상적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질문은 흑백론이기 때문에 오해를 만들어 낸다. 사과가 몸에 좋은지, 골프는 치면 나쁜 것인지, 명품백이 있는지 없는지, FTA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같은 질문들은 뭐가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억압한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대답하려고 하면 그걸 말장난이라던가, 회피로 공격하면서 이쪽인지 저쪽인지 진영을 결정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뉴튼의 물리학이 나오기 전에도 과학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과학은 연금술같은 마술처럼 보이는 것들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뉴튼의 물리학은 무수히 많은 유령과 신화를 없애버린 퇴마술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옳고 그름만 열심히 따지는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너무 많은 선입견과 유령들이 산다. 그것들을 퇴치하고 싶다면 우리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바로 뭐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생각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