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와 철학자의 차이
23.8.14
최근 미국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책과 한국 철학자 김성환의 책을 연달아 참고할 일이 있었다. 두 책의 이름은 물리학 법칙의 성격과 17세기 자연철학이라는 책이었는데 두 책을 연달아 참고하다보니 물리학자와 철학자의 입장이 너무 극명하게 갈려서 그것에 대해 몇자 써보기로 한다.
이건 두 사람중의 누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현대과학의 핵심이 뭔가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물리학자와 철학자가 느끼는 것, 정확히 말하면 강조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이다. 물리학자가 강조하는 것은 정확성이다. 예를 들어 뉴튼의 중력법칙은 그냥 무거운게 다른 걸 더 세게 잡아당긴다라는 것이 아니다. 이 중력법칙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무게에 비례한다는 정확한 수식으로 써질 수 있고 과학자들은 이걸 일반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정확도로 검증해 왔다. 예를 들어 중력이 미치는 범위가 우주 전체를 말할 정도로 상상초월이라던가, 중력질량과 관성질량이 정말 같은지를 천문학적인 정확도로 열심히 확인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런 정확성에 근거해서 다른 법칙들도 찾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법칙이 매우 정확할뿐만 아니라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정확히 맞는 것이 자연법칙이다. 물리학이 단지 정확히 측정하고 그걸 수학적으로 정리해서 어떤 보편적인 법칙을 찾는 일만은 아니지만 이것이 빠지면 물리학으로 보통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물리학은 기본적으로 과학분야의 모범사례로 여겨진다. 즉 언제나 물리학자가 하는 식으로만 과학을 만들어 갈 수는 없지만 가능하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과학의 지향점인 것이다.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뉴턴은 물리학자에게 그 이전의 과학자들과는 크게 다르게 느껴진다. 어떤 의미로 뉴턴 이전의 물리학자들 나아가 과학자들은 과학자가 아니라고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애매한 데가 있고, 불공정한 부분도 있는 말이지만 중력법칙 즉 만유인력의 법칙은 수학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점은 잊지 말아야한다. 예를 들어 뉴튼 이전의 케플러도 케플러의 법칙이라는 행성의 움직임에 대한 수학적 법칙들을 발표했고 그 법칙들은 중력법칙을 암시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물체는 서로를 당긴다는 보편적 법칙이 아니라 행성의 움직임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보편성을 가진 과학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따라서 물리학자들같은 경우에는 현대 과학은 뉴턴의 손에서 창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느껴진다. 제 아무리 그 앞에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원리를 떠든 사람이 있어도 실제로 자동차를 만들어서 세상에 보여준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철학자가 쓴 글을 읽다보면 그는 17세기 과학혁명을 문화적이고 철학적인 변화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뉴턴의 업적은 희미해지고 16세기의 연금술사와 17세기의 과학자의 차이는 그저 어떤 정성적인 사고의 전환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그래도 입맛이 쓴데가 있다. 나는 뉴턴을 거론하고 있지만 뉴턴 개인의 찬양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런 정성적인 사고의 전환으로 과학혁명을 이해할 때 과거의 이해는 물론 앞으로의 세상을 위해서 그게 바람직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뉴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하이젠베르크가 혁명에 대해서 한 말에 공감한다. 그는 혁명이란 아무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기존의 시스템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바꿔야 하는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 힘을 집중할 때 가능한 것이라고 히틀러를 추종하는 어린 학생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이걸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혁명이란 무엇보다 그 시대가 가지는 모순이나 문제를 극명하게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함부로 주변에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해 모두 개혁을 추진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없는 시대는 없다. 언제나 문제의 해결은 힘들다. 그걸 모두 시스템 전체를 갈아엎어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문제가 전체 시스템을 완전히 무너뜨리려고 할 때 그 부분을 직시하고 그것의 개혁에 힘을 집중해야 진짜 개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걸 17세기 과학혁명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런 저런 배경도 다 좋지만 결국은 어떤 돌파구가 되는 결정적인 혁신이 진짜 변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뉴튼이 보여준 현대과학의 모범이 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과학 패러다임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파인만은 20세기 과학은 뉴턴의 과학보다 더 근대적인 게 아니라 그저 최신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안의 논리적 접근방법은 같기 때문이다. 법칙의 발견과 수학적 형식화를 통해 정확히 검증가능한 이론을 만드는 것만이 새로운 과학을 만드는 길이라고 뉴턴은 보여주었다. 이것없이는 과학은 그저 말장난에 불과할 뿐이다.
예를 들어 당대에는 뉴턴과 라이프니찌가 오늘날에 기억되는 것만큼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라이프니치는 만물박사였고 미적분을 만드는 데 있어서는 심지어 뉴턴보다 더 뛰어난 부분도 보여준다. 우리는 오늘날 그의 표기법을 따라하고 있다. 심지어 라이프니치의 말을 지금와 돌아보면 상대성이론을 떠올리게 하는 심오함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뉴턴은 우리가 따라할 수 있고 계속할 수 있는 접근법을 확실하게 제시해서 과학혁명을 일으켰고, 라이프니치의 말들은 그렇지 못했기에 차차 잊혀지고 애매하게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그가 생명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어떤 애매한 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현상이 만들어 내는 분자적 안정성이 생명현상의 바닥에 존재할것이라고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지적을 읽은 과학자들이 2중나선구조를 가진 유전자 분자를 발견하게 되어 생물학을 혁신한 것이다. 이런 구체성이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 낸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를 살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과거의 혁명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의 혁신을 위해서고, 오늘의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럴 때 혁명을 무슨 계절마다 바뀌는 패션유행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건 가고 오는 것이다. 그때문에 철학은 아직도 2천년전의 플라톤이나 공자의 말을 반복하는 일이 있지 않은가. 반면에 2천년전의 과학기술은 오늘과 비교할 수가 없다. 이 비가역성을 무시하면서 과학 혁명을 묘사하면 앞으로의 개혁도 어렵지 않을까 싶다.
중요한 것은 꼭 수식이 등장해야 한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다. 천년뒤에 읽어도 옳은 말을 쓰는 것도 나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코앞의 문제들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걸을 수 있는 다음 한 발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을 때 말들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