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암(강국진) 2023. 12. 16. 02:41

일찌기 양자역학의 아버지중의 하나인 어윈 쉬뢰딩거는 의식을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일때문에 존재하는 것으로 말하고, 자기와의 싸움이 의식의 본질적 기능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우리는 호흡같이 익숙한 것, 반복되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점차로 의식이 사라지고 결국 무의식적으로 그걸 하게 되는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하게 될 때 우리의 의식이 간섭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주제에 까지 이르는 이유는 여기서 말하는 자기라는 것이 결국은 습관적이고, 관행적인 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그다지 별다른 생각없이 우리 안에 솟아나는 욕구에 따라 사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뜨리는 행위이며 그와는 반대로 지금의 자신을 초월해서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 가는 행위야 말로 의식이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자기라는 것의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말하자면 그것은 읽고 쓰는 나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유전자로만 결정되는 아기때에는 읽고 쓰지 못한다. 말을 배우고, 읽고 쓰게 되는 것은 태어난 이후에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를 배우고 읽고 쓰기를 배운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지식을 가지게 되고 그 지식에 따라서 사는 문명화된 인간이 된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프다고 남의 것을 훔치지 않으며, 화가 난다고 누군가를 때리지도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명화된, 윤리적인 인간은 유전자로만 결정되는 인간과는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나와의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짐승의 입장에서 보면 기이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짐승이라면 인간이 배고픔을 참고, 고통을 참으며 공부하고 일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때로 인간은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뭔가를 하려고 하는데 동물이 그걸 이해할 수 있을리가 없다. 이렇게 문명화된 인간은 자연속의 짐승과는 다르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인간이 짐승과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에 그런게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간이 되려고 하기때문에, 그리고 그것에 어느 정도 성공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게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쉬뢰딩거의 말과 이런 예를 합쳐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읽고 쓰지 않는 인간은 잠을 자고 있는 인간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인간은 이 세상에 대해 지극히 작은 정보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배부르면 자고, 배고프면 그것을 문제삼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도 오늘날에는 문명화된 사회속에서 살게 된다. 오늘날 정말 짐승처럼 혹은 야만인처럼 살면서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환경에 사는 인간은 드물다. 결국 야만적인 인간은 단순히 잠자듯이 사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환경과 부딪혀서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마치 도로위를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다니는 것과 같아서 결국 죽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읽을 수 있고 사람말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기억하고, 실행하는가에 있다. 우리는 매일같이 뭔가 다른 일에 바쁘다. 그래서 특히 글을 쓸 시간은 커녕 산책같은 것을 하면서 차분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해서 알려고 하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일도 생각하지 않게 되고, 글로 써보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한 주가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면 우리는 어느 새 잠에 빠져있다는 것도 알기 어렵게 된다. 우리는 어느 새 자신과의 싸움을 그만두고 마치 먹이에만 신경쓰는 짐승같은 사람이 되어 스스로를 가다듬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1년에 책한권 읽지 않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쓰는 글을 한줄도 쓰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가 예전과 같은 인간이며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요즘은 동영상으로 공부하는 사람도 많다. 하루 종일 티비를 보면서 세상일을 배우는 사람도 많다. 반드시 읽고 쓰는 일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공부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흔한 세상에도 조깅으로 몸을 단련하는 일이 필요하듯이 읽고 쓰는 일 그래서 언어를 가다듬는 일은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동영상은 너무 정보의 밀도가 높다. 그래서 빠르게 정보를 취득할 수 있지만 그렇게 배운 것은 그만큼 빠르게 잊혀지는 느낌이다. 누구나 생각은 글쓰기나 말하기의 속력으로 한다. 동영상으로 공부한다지만 이미지만으로 생각을하고 그것을 정리한다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결국 생각을 정리하고 키우는 일에는 글쓰기나 말하기가 관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멀티미디어의 시대라고 해도 우리는 읽고 쓰고 말하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특히 글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잘쓰고 못쓰고를 떠나서 글을 쓰는 일은 자기 자신을 다시 되새기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은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독서를 한다고 해도 그 독서한 내용에 대해서 스스로 말해보거나 글을 써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걸 설명하고, 정리하는 과정없이 독서를 한 경우는 불과 하루 이틀만 지나도 그 내용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할 수가 없어진다. 그걸 요약하고 설명하려고 하면서 어떤 내용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왜 중요한지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읽고 쓰는 건 둘째치고 말을 짧고 단순하게 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줄임말을 자꾸 쓰고, 유행어를 자꾸 쓴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시간을 아끼고 편리하게 살게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건 편리하다고 날마나 자동차로만 움직이는 사람의 말과 같은 것이 아닐까. 때로는 그런 것도 나쁘지 않고 심지어 필요하겠지만 그렇게 편리한 것만 좋아하다가는 결국 바보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 거기 아직도 있냐고 말이다. 그렇게 종종 안부를 묻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의식이 완전히 끊어진 깊은 잠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