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내적 문화적 정치적 변화.
나는 AI가 만드는 변화중 진짜로 중요한 것은 내적인 변화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이걸 설명하는 일은 쉽지가 않아서 그다지 사람들을 설득하지는 못한 것같다. 사실 예측이란 어렵고, 구체적이기는 더 어려운데 이건 기술에 관한 것이든 정신에 관한 것이든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여전히 언론을 포함해서 사람들은 AI가 만드는 변화라고 하면 그저 자동 번역기가 나온다더라, 자율운전자동차가 나온다더라, AI가 작곡도 하고 로봇도 조종한다더라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다. 이런 예측들도 꼭 맞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는 물질적이고 외향적인 것만 신경쓰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자. 여러분에게 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선택지는 여러분이 자신의 기억과 성격을 모두 포기하면 100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선택지는 여러분은 지금 이대로 살 수 있지만 전 재산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만 생각하면 이 선택은 간단하다. 100억과 파산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 보고 선택한다면 100억을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기억과 성격을 모두 포기한다면 그게 나 일까? 그러니까 100억이 생긴다고 해도 그걸로 온갖 호사스런 사치를 누린다고 해도 그걸 내가 누리게 되는 거 맞냐는 것이다.
이 질문을 더 극단적으로 만들고 싶으면 아예 이렇게 물으면 된다. 여러분은 두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여러분의 뇌를 적출해 내고 다른 사람의 뇌를 여러분의 몸에 집어넣는 대신에 100억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분의 뇌를 구하고 파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여기서 100억을 받는 사람이란 여러분의 몸을 차지한 사람을 말한다.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뇌를 적출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자아는 그 뇌에게 속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타인의 뇌가 내 몸에 이식된다면 그건 내가 아니며 적출된 뇌가 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기억과 성격을 모두 포기하는 것과 뇌를 교체하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기억을 포기하고 100억을 받기로한 지금의 나를 기억하지도 못할 그 미래의 내가 사치를 누린들 그게 나일까?
나는 이 이야기를 내가 말하는 내적 변화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었다. AI 시대를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물질적 변화보다 사상적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변화의 핵심적 부분은 물질적인 것 이상으로 문화적이고 정치적이며 철학적이고 언어적인 것이 될 것이다. 거대한 기술적 문화적 변화가 일어난 역사적 사례는 많다. 문자의 발달 이전의 선사 시대에 살던 수렵채집인에서 문명인으로의 변화도 그러하고 17세기 과학 혁명 이전의 종교 시대에서 현대의 기계 과학 문명으로의 전환도 그러하다. 한국인으로 말하자면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의 변화도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변화들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모두 중요한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만약 역사를 되돌릴 수 있다면 우리는 위에서 한 개인에게 한 것과 비슷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인이 수렵채집인으로 돌아가고, 현대인이 과학혁명 이전에 살던 종교인으로 돌아가며, 대한국민의 시민이 조선의 백성으로 돌아간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 정신과 문화와 정치와 철학일까 아니면 물질일까?
우리는 먼저 이러한 변화는 문자 사용의 시작은 국가 혹은 거대 사회의 시작과 거의 겹치고, 과학혁명의 시기나 조선 패망의 시기는 봉건제가 지금의 공화정으로 바뀌는 시기와 겹친다는 것부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에 대해서 인과론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사실들이 우연일 수는 없다. 정보가 다뤄지는 방식이 달라지고 사회적 혁신이 일어나자 앞에서 말했듯 문화, 정치, 철학이 모두 바뀌고 그 결과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사람들이 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대에서 과학 혁명의 시기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단순히 철도나 자동차가 없고 냉장고와 티비가 없는 세상에 살게 되어 재미없고 힘들다는 이야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현대에도 표면적으로 옛날 사람들처럼 사는 사람은 많다. 제일 흔한 예는 집에서 농사짓는 도시농부들일 것이다. 그들은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는데도 이런 저런 것들을 텃밭을 구해서 키운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면서 자신들은 마치 백년이나 천년전의 농부들처럼 살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 결과 기계 문명의 가치를 폄하하고 자신은 그런 거 별로 필요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물론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착각이다. 물질적으로 그나 그녀는 수도를 써서 물을 주고, 비료나 종자도 심지어 흙까지도 다 현대 과학 기술이 깊숙히 들어간 것을 쓰고 있을 것이다. 비닐이나 쇠로된 농사 도구를 마음껏 쓰고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은 과거의 농부가 했던 고생을 그래서 모른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정신이고 문화고 철학이며 정치다. 그들은 과거의 농부처럼 세금을 내고 있지 않으며 그런 신분으로 살고 있지도 않다. 살 수도 없다. 여러분은 현대인이 누리는 물질적 편의성을 제외한다면 민주 시민이 된다던가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기꺼이 왕의 백성으로 살 수 있으며 타고난 것에 따라 신분과 직업이 결정되는 삶을 누리고 싶은가? 너무 쉽게 그렇다고 말하지 말라. 현대사회에서 자라난 현대인은 압도적인 다수가 그 지식을 세탁해서 없애지 않으면 그런 사회에서 살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사람들의 일처리가 불합리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치가들이 썩었고 무능해 보이는가? 봉건시대로 돌아가 일반백성으로 살면서 지배계층이 하는 일을 꽤뚫어보게 되면 현대 정치가들은 천사처럼 보일 것이다. 그때는 애초에 인간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현대 사회에서 차별당했다고 분해서 펄펄 뛰는 사람들이 애초에 그런 개념도 없었던 시대에 가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이건 군사독재같은 것보다 훨씬 전의 시대다. 현대인이 타임머쉰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당신의 모든 언행은 초급진적으로 진보적으로 여겨질 것이다. 다시 말해 미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쉽게 그 사회와 적응하고 살 수 있을까? 현대인이 과거로 돌아가면 그 시대의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는 말도 안되는 판타지다.
나 개인에게 있어서 참으로 놀랍다고 느꼈던 깨달음이 있다. 그것은 나는 그냥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운명적으로 어머니 뱃속에서 만들어진 후부터 쭉 나로 살은게 아니다. 나는 교육을 통해서 만들어진 사이보그이며 따라서 나의 정신은 어느 정도 인공적인 것이다. 그리고 내 눈에 이 세계가 보이는 모습, 나아가 세상사람들이 객관적인 세계라고 부르는 모습은 모두 이 인공적인 지식들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이 지식의 누적을 획기적으로 바꾼 사건은 문자 사용이었다. 물론 교육에 의해 얻어지는 관점에 따라 세계가 다르게 보여진다는 말은 진부하리만큼 흔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진리를 보는 능력이 있으며 그걸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라는 류의 가르침처럼 인간 자체의 지능을 신성하게 여기는 인본주의는 인간은 만들어진다는 말의 의미를 과소평가하게 만들고 있다. 고립되어 비문명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그리 대단치 않다. 현대인은 사이보그이며 도구와의 연결을 통해 지능적인 존재가 된다. 인간은 보다 겸손해 져야 한다.
그리고 이제 문자 사용의 시작에 비견될 수도 있을만큼 거대한 변화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빠르게 일어날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AI 혁명은 빠르면 5년 아무리 늦어도 50년이면 일어날 거라고 말하고 있다. 자세한 숫자는 다를 수도 있지만 이런 주장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다. 문제는 사람들은 대개 이 혁명을 봉건제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고, 노예가 해방되는 문화적 정치적 변화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집에도 쓸만한 노예 로봇이 생기나 보다, 그런데 나는 그런거 없어도 내일은 내가 할 수 있으니 별 큰 의미는 없겠거니 하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하는 것을 유학자들이 반대했듯이 혁신적 기술은 필연적으로 권력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런 변화에 저항과 계몽이 관련되지 않을 수가 없다. 누가 진보를 다 좋아하는가? 자신이 왕처럼 살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5백년전처럼 살아도 그게 더 좋은 세상이라고 주장할 사람들은 세상에 많다. 특히 이미 왕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말이다.
AI 혁명이 단지 몇십년안에 온다면 그 말은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사상을 아주 크게 바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옳고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을 포기하거나 그걸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우리는 문명의 시작에서 수렵채집인으로 남겠다고 했던 사람들이나 과학혁명의 시작에서 종교인으로 남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직 AI의 윤리에나 신경쓰고 있다. 마치 인간의 윤리문제는 없다는 듯이 말이다.
AI가 확실하게 만들 것은 미래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AI 분야의 발달은 점점 더 기술이 아니라 법의 개정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 즉 법이 뭔가를 허락하면 그와 관련된 직종에서 일하는 사업가나 노동자들이 단숨에 사업과 직업을 잃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인데 그렇다고 그걸 허락을 안하면 경쟁력이 크게 떨어져서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미 공유경제 사업중 하나인 택시사업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한국에서 목격한 바 있다. 사실 공유경제도 다 정보 기술의 발달결과 나오는 것으로 AI 혁명과 유사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지구를 인간과 가축으로 채웠다. 그리고 그 결과 기후 이변을 겪고 있고 자원 고갈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다른 것보다 그걸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사회시스템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조정불가능한 욕망을 생각했을 때 기술이 너무 좋았던 것이 문제다. 이것이 이제까지의 문제 해결법인 과학 패러다임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 해결법인 AI 패러다임이 혁신을 더 빠르게 한다고 하자. 로봇이 농사를 짓고, 꿈의 기술인 상온 핵융합이나 상혼 초전도체같은 기술들이 속속 완성된다고 하자. 이런 혁신은 지구의 인구가 2백억이 되는 것을 촉진 시킬 것이다. 인간의 앞으로의 선택이, 인간의 집단적 지능이 더욱 더 중요해 지는 이유다.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AI가 발달을 주도하면 국가와 국가, 사회와 사회간의 집단적 지능의 차이가 마치 수렵채집인을 만난 문명인이 느끼는 것처럼 될 수 있다. 지금도 그런 문제가 있는데 그걸 우리는 그냥 적당히 테러의 문제나 사이비종교의 문제라고 얼머부리고 있다. 전세계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힘을 모을 수 있는 단체가 인류 보편적 질서와는 공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자꾸 생겨날 것이다. 사람들은 소득 불평등이 점점 더 커지는 것만 생각하지만 일종의 지능 불평등이 점점 더 커져서 억압과 전쟁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 날 정도에 이를 수도 있다. 나는 하마스같은 테러단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러시아와 중국이 힘을 바탕으로 벌이는 행동들이 억압이 안되고 있으며 그걸 억제하려고 한다는 미국 사회의 집단적 지능도 그다지 좋아보이지 만은 않는다. 거의 모든 국가들이 미쳐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건 민주주의의 위기다. 민주 사회는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다. 그리고 그 선택은 잘못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격변기에 정말 5년 10년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시기일까? 국민의 절반은 수렵채집인이고 절반은 하이테크 근무자인 나라에서 1인 1표로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것이 정말 합리적인 것일까?
민주주의는 이미 20세기 들어서 전문지식이라는 문제때문에 어느 정도 무너져 왔다. 즉 아주 전문적인 분야에 대한 결정은 다수의 의견이 중요한게 아니라 전문가의 의견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댐이나 다리나 로켓이나 인공지능을 만들 때 전문가의 의견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의견과 같은 비중을 놓고 취합하면 그 집단적 지능은 형편없을 것이다. 그래서 전문 분야에 대한 판단은 민주주의가 약화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문 분야가 아닌 분야가 없다고 할 정도로 세상이 복잡해 졌다. 그래서 일반 시민은 물론 언론사의 기자도 전문가가 보면 엉뚱한 소리나 하는 시대가 되었다. 게다가 전문화가 너무 심해져서 전문가도 어떤 일에 대한 판단을 종합적으로 하기 어렵다.
과학기술 개발연구에 돈을 얼마나 투자해야 할까? 예산을 나누는 문제인데 이걸 과학자에게 물으면 과학자는 과학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과학자가 아닌 화가에게 물으면 과학이 안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누군가가 과학과 예술과 산업등 모든 분야를 다 알아서 지금은 이게 시급하다고 말해 줄수 있는가? 그러니까 전문가 이면서도 모든 분야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댐을 만드는데 토목 건축 전문가가 말하는 의견은 경제전문가나 그 지역의 역사 전문가의 의견과 다를 수있다. 그러면 누가 옳은가? 이도 저도 아무 것도 모르는 일반인이 선택해야 하나? 이럴 때 나는 뭐든지 안다고 말하는 정치가가 나타나서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기 쉽다. 물론 그 결과는 재앙이다.
그래서 현실은 데이터다. 현실적으로는 누구도 모든 걸 모르기 때문에 데이터분석 즉 통계를 통해서 조금씩 작년의 예산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세상은 돌아가고 있고 그럴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통계학에서 말하는 베이지안 방식이고 동시에 바로 AI의 방식이기도 하다. 즉 AI의 시대가 완전히 오지 않은 지금도 우리는 어느 정도 AI 방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AI가 폭발적으로 발달하고 그만큼 세상이 더 복잡해지면 통계분석을 빼놓고는 모두가 장님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이 말은 AI 없이는 인간은 아무 판단도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이 무시무시하게 들린다면 그건 웃기는 일이다. 왜냐면 나는 앞에서 인간이 이미 사이보그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현대사회에서도 인간은 쓰고 읽는 능력없이는 아무 판단도 못한다. 그 정도의 정보도 다룰 수 없으면 정상적 인간으로 살 수가 없다. 그런 현실이 이미 존재하는데 우리가 AI에게 깊이 의존할거라고 말하면 갑자기 AI를 의인화해서 지배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우리는 문자나 책을 의인화해서 저항하지 않는가? 통계분석이라고 말하면 순종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AI라고 말하면 그들의 지배에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 선택에 따라서 인간의 노동시간이라는 것이 달라질 것이고 지금의 교육이나 취업 현실도 달라질 것이다. 언론은 계속 AI를 써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인간과 경쟁시키고 있다. AI가 못해내는 것을 인간이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미 학습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는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언제나 문자 문화를 앞에둔 수렵채집인을 상상하라. 그가 미친듯이 사냥을 해도 그 결과가 문명인들보다 많기는 어렵다. 수렵채집인이 문명이 못해내는 것을 해내는 사냥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의 운명은 별로 좋지 못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 우리는 AI를 이해하고 거기에 뛰어들어야 하며 집단적으로 문화적 철학적 변화를 이뤄내야 한다. AI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I를 써야 한다.
아직 분명하지는 않지만 결국 AI 시대는 기득권과의 싸움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즉 낡은 시대가 좋고 편하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 변화를 막으려고 하고 그런 시대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들과 싸우게 될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주로 엔지니어에만 주목하고 있지만 진짜 변화와 싸움의 장소는 그런 전장을 알아챈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이건 반드시 더 편해지고 풍요로워지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를 돌아보라. 언제나 문제는 인간답다는 것이 뭔가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아니라면 뭐가 문제인가? 우리는 인간이 뭐라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 뭐가 우리의 윤리를 결정하는가? 지금의 한국이 풍요롭다면 왜 자살률은 높고 아이는 태어나지 않으며 모두가 일에 지쳐 허덕이며 사는가? 우리의 미래비전이 잘못되었다면 그걸 고칠 방법은 무엇인가? 언제나 진짜 질문은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고 그걸 풀 수 있는가 하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지만 언제나 문명 시대를 앞에둔 수렵채집인들을 생각하라. 혹은 수렵채집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문명인들을 상상하라. 우리는 지금 AI 시대를 눈앞에 둔 야만인이다.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문제는 고기가 아니다. 언제나 문제는 행복과 만족감같은 내적 느낌이었다. 지금 우리가 인간답지 않게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인간을 재정의하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까지도 그렇게 했는데 그게 안됐다면 무슨 방법이 잘못되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AI는 새로운 문제해결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뤄내는 것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적 변화이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