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시대 1 : 이해는 어렵다.
1. 이해는 어렵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그 이해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이해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복잡하면 할 수록 그렇다. 그래서 점점 더 복잡해 지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넘쳐나게 가지게 된다. 게다가 정보화시대를 살고 있다고 우리는 자부하지만 기껏 있는 지식들도 충분히 잘 퍼지지 않고 있어서 사이비종교나 평평한 땅따위의 것을 믿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고 언론들은 가짜 뉴스를 억누르는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시대에서 인공지능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정확한 지식이 보다 널리 퍼지게 하는 일에 도움을 주어 대중을 바꿀 수 있고, 그들이 세상을 보는 것에 도움을 주는 데이터 분석도 대신해 줄 수 있는데 이는 마치 문맹이었던 대중이 문맹에서 벗어나는 것같은 효과를 만들 것이다. 인공지능의 영향력은 인터넷의 보급이나 인터넷 검색의 보편화와도 차원이 다를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과의 의사소통이 훨씬 더 편리하고, 막대한 정보를 압축한 것이기 때문에 인터넷 게시판에 흘러다니는 소문이나, 어떤 정보가 더 주목해야 할 정보인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 인터넷 검색과는 다르다. 편리성에 대해서는 이미 사람들은 인공지능과 음성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인공지능의 보편화는 미래가 아니라 한두해 안에 이뤄질 현실이다. 이는 사람들이 모든 판단에 있어서 상담할 수 있는 정보통로를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법률, 의료, 교육, 복지등 모든 분야에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이미 프랑스같은 곳에서는 지난 50년간의 모든 판례를 다 학습한 인공지능 앱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우선 다시 이해라는 것이 왜 어려운가로 돌아와 보자.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법칙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도 기본적으로 그것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법칙으로 부르는 것이다. 만약 그 법칙을 무언가 더 단순하고 작은 사실들로 설명할 수 있다면 법칙은 더이상 법칙이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현상으로 불리게 될 것이고 그 법칙을 설명하게 위해 우리가 사용한 사실들이 법칙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해라고 부르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인 법칙이나 사실로부터 더 복잡한 현상들을 연역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설명이라는 것도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뉴튼의 물리법칙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F=ma같은 그의 수식이 뭘 의미하는지가 다 즉각적으로 풀려 나오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써서 훨씬 더 복잡해 보이는 달의 운동같은 것을 설명해 내는 과정을 전개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달의 운동을 이해했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설명을 만들어 내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가지를 잊어서는 안된다. 법칙은 설명을 제공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더이상의 설명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원자론은 많은 것을 설명하지만 원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더이상 묻지 않는다는 태도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이런 설명들을 듣고 외우는 것이 우리의 교육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이 세상이 설명과 이해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끼고 그 이유는 모르지만 우리가 당연히 사실로 여기는 것들이 조금 있을 뿐이라고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불편한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한 모든 것에 대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 착각이다. 다른 어느 무엇보다 우리는 그정도로 성실하지 않아서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만다. 게다가 우리의 정신적 게으름과는 다른 이유로도 이 세상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점차로 늘어왔다. 앞에서 말한대로 기초적 원리로부터 복잡한 현상을 연역적으로 설명해 내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아주 단순한 경우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보다 복잡한 경우 예를 들어 사회현상에 대한 사상이라거나 경제적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정확한 연역적 설명이라기 보다는 논리적 비약을 가진 주장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일부 설명하는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라고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한 것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어떤 이데올로기나 편견의 노예가 되고 만다. 사실 중간에 계산이 몇번 틀린 수학증명은 그 결론이 옳다고 해도 그냥 처음부터 이런 수식은 옳다고 단언하는 일방적 주장과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쉽게 편견에 물들지 말고 철학자 칼 포퍼가 한 것처럼 과학인 것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분하면서 혹은 버틀란트 러셀처럼 스스로를 회의론자로 부르면서 조심스럽게 살아야 할까?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현대사회의 삶이 유지 되지 않는다. 과학분야조차도 그렇다. 우리가 뇌를 연구한다고 해보자. 아주 정확한 의미에서는 뇌를 이해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받아들인 아주 원초적인 사실들에서 출발해서 뇌의 기능을 설명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뇌와 같이 복잡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그럴 수 있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뇌세포와 뇌세포를 잇는 시냅스에 대해서 우리가 섭취하는 알콜이나 마약성분이 어떤 화학적 영향을 주는가를 관찰하고 하나의 연역적인 설명을 부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좀 더 거시적인 것에 대해서는 연역적 설명이라기 보다는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데이터를 언급하면서 통계적 분석을 제출 할 뿐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마약 성분이 환각을 일으킨다는 주장을 증명하려고 할 때 어느 정도까지는 연역적인 설명을 하지만 어떤 부분에 이르면 '뇌의 이 부분이 이렇게 자극을 받으면 환각을 일으키더라'라는 데이터를 가지고 그것이 다시 일어날 거라는 귀납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한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그것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귀납적인 주장은 그 일반화가 완전히 정당화되지 않으므로 연역적인 설명과는 구분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그저 내가 본 경상도 사람들은 다 뚱뚱하더라 그러니까 경상도 사람들은 모두 뚱뚱한게 틀림없다는 식의 편견일 수 있다. 게다가 귀납적인 주장은 대개 거시적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면 데이터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 다수의 경상도 사람이 없다면 내가 경상도 사람들을 만나 볼 일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반복적인 데이터의 관측이 없다면 귀납이란 있을 수 없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볼 수록 이야기는 모호해 지는 경향이 있다.
정부에 세금을 낸 통계에 따르면 직장에서 여성의 수가 남성의 수보다 작다는 사실을 근거로 누군가가 여성이 남성보다 차별받고 있다고 주장한다고 해보자. 그게 무슨 뜻일까? 이 통계가 정확한 것이라고 해도 일단 여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거시적이다. 세상에는 여성인 사람들이 아주 다양하게 많다. 그리고 직장이라는 개념도 그렇다. 어떤 직장을 말하는 것인가? 군대에서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 여성차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아주 보수가 높은 직장만으로 통계의 대상을 제한하거나 도시 지역과 농촌 지역으로 통계의 대상을 제한하거나 하는 것에 따라서도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직장에 근무하는 남녀의 비율이라는 숫자는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따지면 따질 수록 그 의미가 흐려지기도 하는 모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모호성이 있다는 귀납적 설명조차 사실은 하기가 매우 어렵다. 직장의 남녀 성비는 굉장히 단순한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흡연이 폐암을 유발한다라던가, 수명을 줄인다같은 주장에 대해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것에 대해 귀납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은 어떻겠는가? 이런 일은 매우 힘들고 오랜 데이터 수집과 분석이 필요하다. 따라서 처음에 말했던 연역적인 설명은 둘째로 치고 귀납적인 설명인 데이터에 기반한 주장도 쉽게 하기 어렵다.
이렇기 때문에 이런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면 우리는 세상이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이 세상에는 사상적 정치적 차이가 존재해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진실을 두고 싸움을 벌이는 근본적인 이유다. 모든 것이 간단히 관찰되고 증명될 수 있다면 싸움이 줄어들고 상식이 지켜질 텐데 증명되기 어려운 것을 두고 증명에 대한 방해까지 있는 상황에서 진실을 찾아 헤매니 싸움은 많고, 세상은 불합리하게 흘러가는 일도 많다. 엄청나게 많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별 근거도 없는 관행이나 편견에 근거한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런 현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개선되기는 커녕 더 나빠지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데이터 수집과 통계분석에 나서지만 그 이상으로 세상이 더 복잡해져 왔기 때문이다. 연역적 설명이 가능한 것은 점점 작아 보이고 귀납적 설명도 신통치 않다. 언론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표적 기관이지만 언론도 한계를 보이고 있다. 기자도 결국 그냥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지금 정보 교통 체증 현상으로 고통받고 있다. 사회적 구심력이 줄어들고 언어가 망가지기 쉬운 시대이다.
이런 현실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이란 데이터의 자동적인 분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공지능이라고 하면 노동자를 대체하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로봇을 떠올리면서 인공지능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다른 쪽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세상을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변화시킬 쪽은 이 데이터 분석을 하는 소프트웨어 쪽일 것이다. 인공지능은 사상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주장과 분쟁을 해결하는 해결사의 역할을 할수 있다. 뉴튼의 물리학이 점술사나 마법사를 어느 정도 침묵시켰다면 발달한 인공지능은 사이비 교주처럼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가짜 정치적 선지자들을 침묵시킬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것이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거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을 주목하지 말고 달을 봐야 한다. 인공지능은 데이터를 분석해서 그 결과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미 있는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은 망원경을 쓰면 저 멀리에 있는 항성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인공지능은 새로운 현미경이자 새로운 망원경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보기 힘들었던 세상을 보다 또렷하게 보여줄 것이다.
지금은 데이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 데이터가 있어도 그걸 분석하는 일을 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발달할 수록 우리는 손쉽게 통계적 분석 결과를 물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다가올 미래에는 이 세상에 이해하지 못할 일이 하나도 없으며 인공지능이 모든 일의 답을 주면서 모든 인간 전문가를 대체할 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설명을 만들어 내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빨라질것이며 특히 더 보편화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다. 다수의 상담역을 두고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들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훌룡한 상담자를 두게 되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분명 세상의 상식을 지키는 안내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는 한 연예인이 한 말이 인상에 남는다. 그는 챗GPT가 나온 후에 그 인공지능과 오랜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를 했다고 한다. 아무 질문에서 시작해서 답이 나오면 거기서 자신이 모르는 것을 묻고 다시 그 답에서 질문을 던지는 식으로 대화를 몇시간이나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화속에서 그는 인공지능의 지혜를 느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은 일반적으로 사실일 수 있다. 제한 된 사실을 알고 기억하는 지금의 사람들과는 달리 훨씬 더 많은 데이터를 가진 인공지능과의 반복적인 접촉은 우리의 정신을 보다 명료하게 만들 것이다. 왜냐면 그런 접촉들을 통해서 앞에서 말한 편견과 근거없는 주장들이 조금씩 깍여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답이라는 게 결국 많은 데이터에 근거한 결론들이다. 우리들 주변에 존재하는 몇몇 무식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의 말과는 달리 말이다.
결국 발달한 인공지능이 우리 주변에 많아질 수록 우리는 보다 분쟁이 작은 세상에 살게 되고 비로소 날로 더 복잡해 지기만 하는 이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 수도 있는 길을 찾게 될 수 있다. 여기 무식한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서 외롭고 고립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되도록 인공지능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살 필요가 있다. 어느 게시판에 올라온 이상한 글이나, 옆집 사람이 말하는 말도 안되는 음모론보다는, 심지어 인간이 작성한 것이기는 하지만 돈과 정치적 영향력에 휘둘리는 기존의 언론사들, 방송국들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기는 것보다는 인공지능의 메세지가 이 세상에 대해서 훨씬 더 올바른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인공지능은 지치지 않고 계속 인간들의 질문에 답해줄 것이고 이미 존재하는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지식에 대해서도 소개해 줄 것이다.
세상에는 힘들게 살지만 정보를 몰라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가출한 청소년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 청소년을 위한 보호시설이 있다고 해도 그 청소년은 그걸 모를 수 있다.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는지도 모를 수 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빚을 해결할 길이 없어서 곤란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전문가들과의 상담 서비스같은 것을 실시하고도 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무제한으로 모든 주제에 대해서 상담을 해줄 수 있으며 심지어 어떤 전문가들보다도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인공지능이 옆에 있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인공지능을 보급하는 것이야 말로 진짜 복지의 시작이 아닐까? 모두가 법률과 세무 전문가를 옆에 두고 산다고만 생각해도 세상은 달라질 것같지 않은가?
이제까지의 챗봇서비스를 써 본 사람들은 이런 예측은 인공지능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하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챗GPT같은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눠본 사람들은 이게 이미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1-2년안에 반드시 일어날 변화중의 하나는 인공지능과의 대화가 급증할 거라는 것이다. 이미 openAI에는 수많은 목적을 위한 챗봇들이 쌓여가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컴퓨터에서 네트웍 연결없이 돌아가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구현하기 위한 변화도 숨가쁘다. 인공지능을 더 빠르고 작은 용량으로 만들려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곳에 인터넷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한두 해 안에 모든 곳에 인공지능이 있는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