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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시대 3 : 대안적 패러다임의 출현

격암(강국진) 2024. 1. 20. 17:49

3. 대안적 패러다임의 출현

지난 글에서 나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분야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쏠림에 따라 우리의 인식세계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질거라고 말했다. 이 변화는 과학 패러다임에서 인공지능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미래에는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많이 써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공지능 패러다임이라는 형식에 따라 세상을 보고 생각하고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던 시대에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기계로 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뇌를 컴퓨터로 보거나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보는 시각이 이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시대의 중심에 설 수록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인공지능으로 보는 경향이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관점들 간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 끝자락에 있는 과학 패러다임의 시대에서는 사람들은 보편적이고 이해가능한 지식을 추구한다. 먼저 보편성에 대해 말해보자. 과학패러다임에서는 보편적 지식을 추구하기에 이 지식이 유효한 환경이나 문맥을 언급할 때가 거의 없다. 일찌기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쓴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철학자들은 자신의 문제들이 영속적인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는데 과학은 더더욱 그렇다. 과학에서는 법칙에 대한 제약을 말해야 할 경우 보통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여긴다. 과학자가 찾는 법칙이란 보편적 법칙이다. 그래서 우리가 중력법칙같은 물리법칙을 말하면서 이것은 이 지구위에서 통하는 거라던가, 이것은 20세기에 통하는 거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는 경제학같은 분야에서 조차 마찬가지다. 경제학의 기본 가정은 이 세상에는 경제라는 보편적 현상내지 시스템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경제적 법칙이 있다고 주장될 때 그것은 대개 보편적으로 통하는 법칙으로 이야기되지, 20세기 프랑스의 남부 지방에서는 있었던 법칙이라고는 말해지지 않는다. 즉 그 법칙이 통하는 시간과 공간을 제약하면서 경제적 법칙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의 경제적 시각이 옳다면 그것은 마치 물리법칙처럼 언제 어디서나 옳다는 의미다. 

 

그리고 물론 과학 패러다임은 이해가능한 지식을 추구한다. 이것은 과학 패러다임이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연역적이고 귀납적인 설명들을, 특히 연역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을 가진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을 말한다. 논리적이지 않고, 충분한 근거가 없고, 검증되지 않은 지식은 가치가 없거나 다루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 과학 패러다임에서의 입장이다. 

 

이에 반해서 인공지능 패러다임에서는 환경이나 문맥을 제거하고는 즉 제약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인공지능은 문제를 해결하는 제 3의 지식이고 그것은 특정한 환경속에서 만들어진 데이터로부터 만들어 진다. 사실 인공지능은 컴퓨터의 최적화로 만들어지고 컴퓨터는 아무리 빨라도 유한한 속력을 가지므로 지나치게 보편적인 환경을 설정하고 데이터를 모으는 것은 그다지 쓸만한 결과를 만들 수 없다. 즉 인공지능 패러다임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우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만 보편성을 설정하고 어디까지나 제한된 상황을 설정해야 한다. 그래야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성공적이다. 모든 문제를 풀려고 시도하는 인공지능은 바둑에 특화된 인공지능을 바둑으로 이기기 힘들다. 그래서 인공지능 패러다임의 핵심적인 부분은 이 환경과 문맥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생산하는 제 3의 지식인 인공지능은 인간이 이해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실 과학 패러다임에서 말하는 지식과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추구하는 지식은 그 의미도 다르다. 과학 패러다임에서는 이상적인 지식은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다. 그것은 우리가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공리적 사실들과 우리가 옳다고 믿는 논리적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지식은 다시 그 공리적 사실들과 논리 규칙만큼이나 확실한 진리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 패러다임에서의 지식인 인공지능은 진리를 추구하는게 아니다. 예를 들어 과학이론이라면 서로 다른 두 개의 이론이 모두 다 옳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그렇게 배타적이지 않다. 인공지능이라는 지식은 진리라기 보다는 현재 주어진 환경과 데이터 속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확률 이론에서 말하는 베이지언 확률과 철학을 같이한다. 우리는 우리의 추정을 데이터를 통해서 개선할 뿐이다.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은 그런데 꼭 옳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최선을 다해 만든 선택이지만 여전히 추측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에서 즉 충분히 복잡한 문제에서는 그런 추측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또다른 불확실한 가정들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에서는 그 불확실성은 일단 같은 문제라도 데이터가 다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인공지능 학습과정 혹은 컴퓨터 최적화 과정에서 등장시켜야 하는 학습 모델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어 특정한 구조를 가진 모델을 써서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경우 우리는 그 모델이 진짜 최선인지는 더 좋은 모델이 나타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저 경험적으로 그런 모델이 좋은 결과를 주더라는 것을 믿을 뿐이다. 딥러닝이 좋은 결과를 주면 딥러닝을 쓰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뇌나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검토했을 때 보다 분명해 질 것이다. 우리가 뇌나 사회를 기계로 볼 때 우리는 그것을 확고한 논리와 설계에 바탕하며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무엇보다 그 작동이 이해가능하고 논리적일 것을 기대하게 된다. 예를 들어 뇌가 지능이나 의식이라는 특성을 가진다면 그것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가능하다고 가정한다. 그러기에 뇌를 분석하고 뇌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회내부의 현상이나 구조가 이해가능하고 논리적인 이유로 만들어진다고 믿고 가정하며 그에 대한 이론을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뇌나 사회를 인공지능으로 바라보는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다르다. 인공지능은 애초에 이해가능하지 않은 지식이다. 그러니까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가 세계 챔피언을 바둑으로 이겼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를 알파고의 변수값들을 분석해서 얻어내려는 노력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뇌나 사회를 인공지능으로 본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논리적 이해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수없이 많은 정보들과 변화들의 누적된 결과물로 인간이 이해가능하게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이해불가능한 지식이라고 해서 인공지능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단 하나의 인공지능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는 과정 즉 인공지능 패러다임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설정에서, 어떤 데이터가 그리고 어떤 모델과 어떤 컴퓨터가 뛰어난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인공지능 개발자들이 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누적된 변화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뇌나 사회를 나아가 이 세상을 인공지능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을 만들어 온 그리고 만들고 있는 과정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과학적 패러다임이라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에 주목하는 것이 인공지능 패러다임인 것이다. 

 

이같은 사고 방식의 변화는 인류가 처해온 생활환경을 생각하면 납득되는 부분이 있다. 인류는 아주 오랜동안 천천히 변해왔다. 그러니까 불과 몇백년전으로만 가도 한 인간의 수명내에서 세상이 어딘가로 변해간다는 것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세상은 그저 출렁이고 있을 뿐으로 오직 오랜 기록을 연구하는 역사가나 과학자들만이 세상의 변화에 어떤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세상의 진보를 느끼는 시대는 아주 최근에야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 변화의 속력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한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더 짧은 20년뒤를 이야기하기 어렵고 이 변화의 속력은 앞으로 오히려 더 급격히 빨라질 것같다. 이런 환경의 변화속에서 우리가 취하는 관점이 X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정적인 것에서 X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규칙은 무엇인가를 논하는 동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모든 것이 점점 더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멈춰서서 전체를 확실히 파악하고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은 금새 의미가 줄어든다. 우리가 자꾸 지금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면 우리는 계속 시대에 뒤질 뿐이다. 그것은 마치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고민한 끝에 그 답을 얻고 나서야 인생을 시작해 보겠다는 식의 태도다. 그보다는 우리는 변화의 방식을 이해하고 그 변화의 흐름을 타서 상황을 개선해 가야 한다. 과거에는 우리가 사회를 하나의 건축물로 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사회를 하나의 집단적인 춤으로 보아야 한다. 처음에는 주변 사람을 그냥 따라하고 차차 조금씩 시야를 넓혀서 리듬을 타면서 우리의 춤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뇌나 사회가 여기서 과학 패러다임과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비교하는 예들로 등장한 이유는 그런 것들은 사실 과학 패러다임이 잘 작동하지 않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인식되어서 과학 패러다임의 한계는 비판되었다. 독자들 중에는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말하는 것이 소위 세상을 살아있는 생명 즉 유기체로 바라보는 관점과 유사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말하는 것은 뒤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서구 18세기의 낭만주의 운동에서 나오는 메세지와도 유사하다. 이런 유사성들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환경과 변화의 과정에 주목하기 때문에 쉽게 생명진화현상을 같은 관점내에서 포함시킬 수 있다. 우리는 진화현상을 최적화 과정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뇌는 인공지능의 자연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화나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진화적 관점을 인공지능 패러다임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낭만주의 운동도 과학 패러다임의 분석적이고 환원주의적 특성에 반대하고 전일론적인 견해를 주장했다. 인공지능 패러다임도 문제를 분석하고 환원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전일론적으로 접근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이제까지 낭만주의적 사상가나 예술가가 말한 과학이나 기계의 한계를 기계가 넘어서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공지능은 우리 주변의 기계와는 다른 원리에 의해 만들어지기에 그걸 기계로 부르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인공지능을 기계로 부른다면 우리는 그것을 낭만주의적 기계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사실 시를 쓰고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지금의 인공지능들이 아닌가? 

 

하지만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유기체적 관점이나 진화론적 관점 그리고 낭만주의적 관점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과학 패러다임이 그러했듯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며 따라서 보다 확실한 대안을 제시하는 패러다임이라는 점이다. 지금의 세상이 과학 패러다임으로 가득 찬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슨 종교적 이유나, 철학적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과학적 논리적 기술적 성과들이 세상을 채워왔기 때문이다. 세상의 문제들을 과학 패러다임으로 해결해 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성공적으로 산업혁명과 같은 사회적 변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더 그것을 많이 연구하고 많이 교육하고 사회를 그것에 맞게 수정해 온 것이다. 

 

진화론적 관점이나 유기체적 관점 그리고 낭만주의적 관점들은 모두 과학 패러다임을 비판하고 보완하고 견제하는 역할은 할 수 있었지만 진정한 대안은 될 수 없었다. 그것들이 우리가 생활에서 가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거나 적어도 대안이 충분히 성공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과학 패러다임을 비판해 봐야, 공장과 학교와 국가는 여전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기계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근대화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이 그런 근대화된 사회의 독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해도 대안없는 비판의 한계는 뚜렷한 것이다. 가장 진보적인 예술가라고 해도 그가 대안없이 문명을 파괴한다면 도달하는 곳은 원시 밀림일 뿐이다. 소박하고 인간의 감정에 주목하는 삶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게 적어도 모두에게 답이 될 수는 없고 계속 유지가능한가도 의문이다. 근대화 이전의 삶이란 자연의 변화에 따라 기근이나 홍수나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삶이기도 했다. 그런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을 대안으로 여기기는 어렵다. 사회를 단순한 개인의 합이 아니라 인간들의 공동체로 보고 공동체에 의존하며 살아갈 것을 강조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현대인들의 물질적인 요구를 해결하기가 어렵고 공동체의 유지가 보장될 확고한 원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에 비하면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과학 패러다임의 확실한 대안을 제시한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문제를 푸는 방식이다. 문제를 푸는 특정한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꼭 그것의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사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20세기에도 이미 있었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이라는 것도 만약 인공지능 붐이 거짓말처럼 꺼지고 인공지능이 별다른 성과를 영영 보이지 않는다면 별 힘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터 수집의 빨라지고 강력한 컴퓨터가 발달하자 인공지능은 지금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듯 그것이 앞으로 점점 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게 된다면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점점 더 뚜렷한 중요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운 인공지능들과 함께 사람들은 점차 인공지능 패러다임에 익숙해 질 것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대안적 삶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과학 패러다임에서 인공지능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과학 패러다임은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 인공지능 패러다임의 시대가 오면 이 점이 바뀔 것이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의 강력함은 그것이 유지가능하고 발전가능한 새로운 문명과 대안적 삶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과학 패러다임을 대체하고 대안적 삶에 대한 전에 없이 확실한 비전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