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암(강국진) 2024. 2. 13. 07:22

혼자서 노는 법은 중요하다. 첫째로 노는 법이 중요한데 왜냐면 놀지 못하는 사람은 시간을 채우지 못해서 일을 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놀지 못하기 때문에 일해야만 하는 것은 나쁘다. 그것은 일종의 일중독이고 게다가 놀지 못하기 때문에 억지로 만들어 낸 일거리는 대개 길게 보면 좋지 못하다. 건강에도 좋지 못하고, 백해 무익한 일을 자꾸 하려고 들다가 문제가 생기기 쉽다. 쉬기 때문에, 놀기 때문에 일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쉬는 시간, 노는 시간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하는 행동 중의 하나가 억지로 없는 일을 만들어 계속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의 품질이 좋을 리가 없다. 그저 매일 같이 어쩔 수 없이 일하고,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투덜대면서도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온갖 이유로 일거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한가지 문제를 가진다. 바로 놀 줄을 모르는 것, 쉴 줄을 모르는 것이다. 

둘째로 혼자서 노는 법이 중요하다. 논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노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항상 누군가를 만나려고 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혼자서 놀 줄을 모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있어서 논다는 것은 누군가를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만나서 뭔가를 함께 하는 일이 결코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혼자서 놀 줄을 몰라서 남을 찾는 일은 그렇게 좋지만도 않다. 대개 그런 모임에 온 사람들은 자기들도 혼자서 뭘 할 지 모르는 법이고, 그런 사람들이 자꾸 자꾸 모여서 하는 일은 소모적이기 쉽다. 그런 만남들은 에너지 소모적이고 경제적으로도 소모적이다. 다른 사람 만나서 예의를 차리고, 자잘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옷이라도 말쑥하고 입고 나가겠다는 생각 따위를 하기 시작하면 그건 에너지 소모적이고 경제적으로 소모적일 수 밖에 없다. 사람이 누군가와 만나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혼자서 놀줄 몰라서 그렇게 하게 되면 대개 지나치게 되기 쉽다. 끊임없이 그다지 이유가 없는 만남을 계속하는 것은 시간도 에너지도 금전도 소모만 시키는 일이며 자기를 잃어버리게 만들기 쉽다. 결국 그런 만남은 혼자인 것이 불안해서 남을 따라하려는 생각에서 자꾸 생기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이따금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혼자서 노는 법은 중요하다. 다르게 말하면 혼자만의 시간은 소중하다.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너무 많은 것같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불필요한 일거리를 만들거나 누군가를 만나서 쓸데 없는 이야기, 예를 들어 누군가의 험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혼자서 놀 수 있을까? 우리는 우선 한가지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건 혼자서 노는 것이 근사하고 가치있다는 생각, 적어도 이미 내가 말했듯이 이따금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뭔가를 하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걸 부끄럽거나 당황스러운 일로 생각해서 혼자서는 뭔가를 하지 못하는 것같은 모습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혼자 있으면 너무 외로워하고, 혼자서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는 것을 재미없는 것을 넘어서 부끄러운 것으로까지 여긴다. 그들은 아마도 사람들 여럿이 모여서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를 하는 모습이 정상이며 사람이 혼자 있다는 것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이러면 혼자서 놀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혼자서 노는 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혼자서 노는 법을 익히는 것에 있어서 가장 첫걸음이며 동시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어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일단 혼자서 노는 일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나면 두번째로 깨달아야 하는 것은 혼자가 사실은 대개는 혼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혼자 하게 되는 일 중의 하나는 독서인데 독서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자와의 대화다. 내 앞에 그 사람이 없다고 해도 나는 그 사람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말할 까를 생각하는 것이 독서다. 물론 독서가 정말로 대화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상대방에게 순간 순간 질문을 던질 수 없는 것이다 보니 나는 상대방의 의도를 어느 정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독서가 대화처럼 된다. 그렇지 못하면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듣는 것이 되니 결국 독서는 상대방의 독백을 드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독서가 언제나 대화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책이라면 같은 책을 열번을 읽고 이십번을 읽어서야 어느 날은 정말 이 독서가 대화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기는 해도 독서가 대화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내 앞에 다른 사람의 육체가 없다고 해서 혼자라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사실은 우리는 그 시간을 혼자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저자와 함께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것을 주목하면 우리는 모든 감상이 실은 그것을 만든 사람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를 혼자 본다는 것은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 그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오히려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할 때 컨텐츠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런 대화가 소홀해 질 때가 있다. 밥을 먹는 것은 그 식당 주인과 주방장과의 대화이며, 만화를 보건, 음악을 듣건, 미술관에 가건 박물관에 가건 그런 경험들은 모두 대화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모두 진짜 혼자만의 시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건 오히려 보다 집중해서 누군가와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이 대화라는 것은 사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어떤 컨텐츠 감상 같은 것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대개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것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흔적을 보게 되는 것 자체가 대화가 될 수 있다. 나는 중소도시를 좋아한다. 서울이나 부산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그보다 인구가 훨씬 작은 곳에 가면 슬슬 작은 것들 에서 사람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서울에 있는 버스 정류장의 벤치에 앉으면 나는 그런 곳에서 어떤 사람들을 느끼기 쉽지 않다. 그곳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거쳐갔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방의 어느 작은 도시에 있는 벤치에 앉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마치 그 곳에 사는 사람들과, 거기를 구경삼아서 거쳐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든다. 그 벤치의 모습이며, 그 벤치가 가진 자잘한 상처까지 다 누군가 특정한 사람이 배후에 있는 역사가 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그래서 중소도시를 산책하는 일은 나에게 대화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아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구나하고 말이다. 

 

이렇게 귀를 기울이면 이 세상에는 몸뚱아리를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말고도 무수한 대화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대화에 온전히 집중하는 일을 세상에서는 흔히 혼자서 하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혼자서 노는 법이란 말에 대해 상당히 오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같은 오해가 존재하는 이유는 독서가 언제나 대화가 되지는 않는 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뭔가를 보고 즐기는 일이 대화가 되려면 몇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로 상대방을 잘 살펴야 한다. 대화를 한다는 것은 어떤 특징을 가진 인격을 만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걸 느끼려면 감수성이 좋아야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집중해서 잘 살펴야 한다. 상대방을 대충 대충 살펴서는 대화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책이든 만화든 영화든 자동차든 집이든 우리는 상대방을 잘 살피는 성의와 집중력이 필요하다. 

 

둘째로 상대방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경험이나 정보가 있어야 한다. 잘 살핀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려면 경험과 지식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단독주택들이 지어져 있는 거리를 산책하는 것은 종종 그 주택들을 지은 건축가나 건축주와의 대화처럼 느껴질 수 있다. 저 집은 남향인지 북향인지를 보는 것은 채광을 보는 것이고, ㄷ자 구조인지, 1자 구조인지를 보는 것은 공간의 배치를 보는 것이며, 와외장재가 이런지 저런지를 보는 것은 외관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건축비, 관리의 용이성 따위를 보는 일이 된다.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아는 것이 있으면 남들이 한 선택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래서 아무 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걸으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같은 거리가 생각을 가진 사람이 걸으면 한 걸음 한 걸음이 온갖 외침과 주장이 들려오는 시끄러운 대화의 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화할 것이 많으면 외롭고 심심하다는 생각은 어느 새 사라지게 된다. 

 

마지막도 중요하다. 내 생각과 취향이 존재해야한다. 요리에 대해 잘 아는 것과 요리에 대한 자기 주장과 취향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꼭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것에 대해 생각이 있고, 취향이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만나면 더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게 된다. 바로 이건 왜 이런거야라는 생각 말이다. 내가 자동차에 대한 확실한 주장이 있다면 나는 길가에 세워진 자동차들을 보면서 아 이 차는 가치가 없는데 이런 걸 샀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이런 차를 보니 반갑다. 이 차는 아주 좋은 차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차에 대한 생각이 고작해야 1억이나 3억하는 고급차라면 남들에게 자랑하기 좋다는 생각 뿐이라면 차에 대해서 떠오르는 생각이 별로 있을리가 없다.

 

대화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비교다. 대화는 나와 타인을 비교하는 일이다. 그런 비교속에서 우리는 나와는 다른 타인을 이해하게 될 뿐만 아니라 남들과 다른 우리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니까 좋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잘 보고, 상대방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과 경험을 갖추는 일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내가 이러저러하니까 상대방이 이러저러한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다른 사람이 머리가 하나라는 사실에 대해 깜짝 놀라면서 너도 머리가 하나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두 머리가 하나니까 말이다. 그래서 좋은 대화를 위해서는 평상시에 나를 알고 그것에 기반해서 너는 나와 다른데 왜 다를까 하는 식의 질문을 던지는 태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는 혼자서 노는 일이 상당부분 사실은 혼자가 아니며 누군가의 대화이고, 혼자라는 일은 오히려 그런 대화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 된다는 이야기를 주로 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정말로 혼자서 노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그 혼자서 노는 일이란 자기와의 대화다. 우리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의 기억력이나 분석력은 대개 조잡하다. 그래서 자기가 어떻게 행동하는 사람인지,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정리하고 궁리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나는 10년 이상 블로그에 글을 써왔다. 그리고 가끔 누군가가 댓글을 달아 준 옛글에 감사의 댓글을 달면서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다.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이 글을 읽어서 좋았다고, 감사하다고. 내가 쓴 글이지만 글의 갯수가 3천 5백개가 넘으니 나도 내가 쓴 글을 종종 잊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내가 쓴 글 안에서 나를 발견한다. 독서가 대화라고 했는데 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글이든 적어도 몇일에 한번은 꼭 쓰려고 한다. 글을 쓸 때 나 자신이 더 또렷해 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습관처럼 이 일을 계속하지 않을 때 나는 나 자신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가장 중요하고 좋은 친구를 잃는 것과 비슷하다. 

 

혼자만의 산책이나 혼자만의 여행도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눌 좋은 기회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산책이나 여행도 어떤 외부와 대화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이따금은 그런 바깥의 것을 잊고 자기 자신과 대화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 그런 시간들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시간속에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뭘 궁금해 하는 사람인지, 세상일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가진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세상과 대화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세가지 요소중의 하나가 나이다. 나의 의견과 생각이 있어야 세상이 흥미로워 보이게 된다. 남들 생각만 줄줄이 외워서는 부족하다. 그리고 내 생각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와의 대화가 필수적이다. 그것은 타인과의 대화보다 더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독서를 하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대개 독서를 중단한다. 그리고 모처럼 떠오른 생각에 대한 메모를 해두거나 그 생각을 계속 하기 위해서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그 생각을 기반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했을 때 나의 생각이 이런 거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이 보다 분명해 지고 난 후에 돌아와 책을 다시 보면 그 책의 의미가 다르게 느껴질 때도 있다. 

 

요즘 세상은 복잡하고 빨리 변한다. 그래서 남들을 참고하는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을 흉내내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친구가 대학가니까 나도 대학가고, 친구가 시험을 보니까 나도 시험을 보는 일을 다 피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자꾸 다른 사람 흉내내서 사는 일에 몰입하면 효율이 떨어진다. 슈퍼스타가 될만큼 출중한 외모를 가진 친구가 연예인이 되려고 한다고 하는데 못생긴 내가 그걸 보고 나도 연예인이 되겠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과 나는 다르다. 그 사람이 성공해도 나는 실패할수 있고 그 사람이 실패해도 나는 성공할 수 있다. 인생이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면 바로 옆길을 걷는다고 해도 옆 사람이 페달을 밟는대로, 핸들을 트는대로만 흉내를 내서는 자전거를 탈 수 없다. 그래서는 자전거가 쓰러질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이 모든 일을 위해서 우리는 혼자서 노는 것이 필요하다. 혼자서 노는 것은 혼자서 서는 것이다. 삶이라는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아서 어느 정도는 스스로 서야 한다. 이것은 결코 혼자서만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혼자서 노는 것만 중요하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혼자서 놀 수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 무능력은 결국 무거운 댓가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혼자서 노는 법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