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인생의 낭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루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던가 매순간 순간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고 있는가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해파리나 고양이처럼 그저 순간 순간을 본능에 따라 살아가면 모르지만 우리의 삶에 의미와 가치가 있기를 바랄 때 우리는 짐승이 느낄 법한 것보다 더 큰 생각에 빠져 들게 된다. 그러니까 그냥 순간 순간을 사는게 아니라 하루를 한주를 한해를 한평생을 살게 되는 것이고, 내 몸만 보는게 아니라 우리 동네를 우리 나라를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더 큰 문맥과 배경속에서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시간을 바라보게 된다. 그렇지 않을 때 모든 행동과 선택은 일관성을 잃어버리고 오늘은 사과를 만원주고 사고 내일은 천원을 주고 그걸 파는 식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이러저러한 것이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이유라고 증명할 수는 없으며, 자신이 어떤 신념이 있다고 해도 그 신념을 정확히 말로 표현하지 못할 때도 있다. 일제시대때 집안이 망가지는 것을 각오하고라도 독립운동에 희생하신 분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그 가족들에게 이해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그 분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어리석기 때문은 아니며 그분들이 언젠가 조선이 독립하면 나를 알아주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을 거라는 것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많은 경우는 아마도 살다 보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에 그렇게 된 것일 것이며 내가 왜 그런 집착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다 말로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유한한 존재일 뿐이라 살다보면 일관성을 가지고 산다는 것도 한계가 있다. 어떤 때는 에라모르겠다라고 사는 때도 있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영웅이 되려고 영웅이 되었다기 보다는 고개를 수그리고 있자니 쪽팔림이 견딜 수 없어서 행동했다는 식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고려해도 인생이 작아지고 뒤죽박죽이 되는 예들은 끝이 없다. 우선 조삼모사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이걸 말해 준다. 이 이야기는 열자의 황제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도토리를 주는 사람이 아침에 세개 저녁에 네개의 도토리를 주겠다고 하자 화를 내던 원숭이들이 그럼 아침에 네개 저녁에 세개를 주겠다고 하자 기뻐했다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이 이야기는 잔꾀로 남을 속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해석되지만 뒤집어 말하면 하루 라는 규모에서 이익을 보지 못하고 그저 코앞의 이익만을 보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시야가 좁은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람이 먹는 것이 건강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매끼니를 잘 먹는 것에만 신경을 쓰면서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백년을 살아도 그저 매끼니 잘먹는 것밖에 신경쓰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 잘살았다고는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먹는 것에 신경쓰는 것도 정도 이상이 되면 인생 낭비다. 10원 100원을 아끼면서 정말 열심히 돈을 저축한 사람이 자식의 과외에 백만원 이백만원을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어떤 사람은 그것이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다. 교육이 단순히 비싼 과외를 시켜주는 것으로 성공하는 것이라면 재벌들의 교육은 전부 대성공이어야 할 것이 아닌가.
친구들을 만날 일정을 조절하느라고 분주히 연락을 반복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던가, 커피 쿠폰을 받아서 공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저녘내내 노력한다던가, 세일을 한다는 소식에 뭔가를 좀 싸게 사보겠다고 준비에 준비를 거듭하는 일들은, 오늘 저녘을 더 잘 먹기위해 메뉴를 고민해 보는 일은 그저 일상이고 때로는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에 빠져 있다가 가끔 고개를 들어 생각에 잠기면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건가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데도 먹고 사는 일에 바쁘고, 벌여놓은 일이 많아 일상에 바쁜 우리는 끝없는 잡무에 빠져들면서 점점 작아진다. 그러다보면 문득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는 일이나 누가 설거지를 하는가 하는 것이 혹은 자매나 친구앞에서 약간의 잘난척을 하는 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일이 생기게 된다.
그것이 나의 일이건 혹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의 일이건 우리는 때로 이런 인생의 낭비가 참을 수 없게 느껴진다. 그건 마치 내일이 시험인데 오늘 집안 대청소를 시작하고, 옆집 사람의 심부름을 대신해 주고 있는 학생을 볼 때와 같은 느낌이다. 내일이 시험이니 오늘 제일 중요한 것은 시험공부일텐데 왜 덜 중요한 일에 하루를 다 써버리는가하는 느낌인 것이다. 시험준비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인생에서 시험날로 여겨질만한 때는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죽을 때일 것이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우리는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인가? 꼭 죽을 날만 그런 건 아니다. 10대가 다끝나가는데, 대학생활도 다끝나가는데, 20대, 30대, 40대가 다 끝나가는데 우리는 지금껏 뭘 하고 있었고 지금은 뭘 하고 있는가. 뭔가가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해 보였는데 숨 한번 더쉬고 하늘 한번 더보고 나면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가, 이런 인생낭비는 참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끔씩은 멈춰서야 하고, 일상에서 고개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이때문이다. 우리가 갑자기 일상을 초월한 사람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문제들이 숨한번 더 쉰다고 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문제들은 정말 진정하고 바라보면 애초에 문제자체가 없다. 우리는 이길 필요가 없는 경쟁을 이기려고 아둥바둥하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은 어떤 도발이나 평가에 크게 상심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문제를 풀려고 애써 노력하지만 훗날에는 그 노력들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인생의 낭비로 여겨지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없는 문제를 풀려고 애쓴 덕분에 스스로 새롭게 만들어낸 문제들로 우리의 인생이 온통 낭비된 것을 훗날 깨닫게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