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과학자는 왜 이해하기 어려운가?
나는 물리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인문학이나 철학자들에 대한 글들을 읽을 때면 종종 곤란함을 느낀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그들의 말들이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시처럼 들린다. 예를 들어 나는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이라는 책을 가지고 있는데 가끔 책을 들어 읽어봐도 내게 별 의미가 있게 읽히지 않아서 그만두고는 한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의 철학자라는 사람들의 인터뷰나 말들도 그렇게 들릴 때가 많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은 지나치게 언어를 남용한다는 느낌이다. 이런 언어적 혼란 속에서 어떤 직관과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것에 도달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은 한 것이며 그것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이는 내 공부와 관심과 경험이 그런 단어 단어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어렵게 편향되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같은 철학자의 말을 이해하려면 그 철학자의 주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뉴튼 역학을 공부하려고 한다고 해도 뉴튼 시대를 알 필요가 없는 물리학의 사정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이것이 나만 겪는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1996년에 있었던 앨런 소칼이라는 물리학자가 벌인 일이 그걸 보여준다. 그는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 철학자들도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확신한 나머지 철학 잡지사를 상대로 사기를 쳤다. 즉 일부러 엉터리 철학 논문을 써서 투고를 해서는 그것이 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지를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것이 시와 같은 거라면 다른 식으로 해석될 법한 것이다. 문학은 특히 시는 논리학도 아니고 수학도 아니다. 그래서 그 안에 나오는 단어와 문장이 명확한 뜻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도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시인이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마음가짐으로 쓴 어떤 시가 다른 시대에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을 만나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감동을 준다고 해도 이걸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로 비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철학 논문은 과학 논문이 아니지만 시가 되어서도 안된다. 그래서 인지 어떤 사람은 철학 논문을 과학 논문처럼 읽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언어들이 그냥 시처럼 들리고, 시처럼 해석되는 경우도 있는 것같다. 앨런 소칼의 실험은 철학 논문이나 철학 에세이가 실제로는 시처럼 받아들여지고 해석되고 유통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해도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물론 시라고 해도 이해가 쉽다는 뜻은 아니다. 시를 읽고 뭔가를 느끼는 것도 당연히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
철학의 문제는 알고 보면 적어도 대부분 언어의 문제라는 지적은 이미 오래된 것이다. 즉 언어적 혼란이 존재할 뿐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없거나 드물며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는 사실 그냥 언어적 개념적 혼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그냥 서로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시인과 철학자와 과학자는 각자의 언어를 가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의 언어를 잘 모른다. 세상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복잡하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른 훈련을 받고 다른 생각을 하며 살다보니까 사람들과 사람들의 언어들 간의 간격은 오히려 점점 더 커진다.
모두가 한국어를 하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대표적인 경우가 과학자와 시인일 것이다. 그들이 모두 일상생활에서는 한국어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의 말들은 같은 의미를 가지지 않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시인은 과학자를 볼 때 그들은 눈이 멀어있어서 가치있는 것을 파괴하는 사람으로 느낄 수 있지만 사실 과학자도 시인에게 그런 걸 느낄 때가 있다. 좀 무례하게 말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과학적 논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제트기 조종석에 앉은 원숭이와 같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일이 많은 과학자지만 만약 대통령을 과학자와 시인중 한명이 해야 한다면 과학자 출신인 나로서는 시인을 뽑기 두렵다. 감상적인 정책판단 하나가 얼마나 대참사를 불러올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들은 과학자를 뽑기 두려워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들이 왜 그러는지도 일정부분 나는 공감한다. 한국의 이공계 인물들은 종종 그냥 문제푸는 기계이고 철학적으로는 어린애같아 보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어느 나라나 존재하지만 한국은 한국만의 독특한 측면을 가진다. 과학문명은 기본적으로 서양의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조선패망이후 일제를 거치고 해방되어 근대화된 나라이다. 이렇게 서양과 일본 그리고 한국은 그 역사적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나라가 쓰는 언어가 똑같이 발달되지 않았다. 현대적 학문 용어는 사실상 한문 투성이이고 그나마도 상당부분이 일본이 서양학문을 들여오면서 번역을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게다가 학문의 역사에서 세계적 중심이 된 학자가 그 사회 안에 존재했던 사회와 그런 학문을 수입하면서 살아온 사회가 같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적 발전의 역사에서 어떤 개념이 나타나면 그것이 더빠르고 명확하게 사회로 흡수될 수 있었던 서양 사회에 비하면 한국은 복잡한 새로운 학문의 개념이 대중적으로 흡수되어 대중의 언어의 일부로 제대로 정착하는 것이 훨씬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20세기까지는 한국은 그저 한때는 유교국가였던 가난한 후진국이었으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경제같은 말도 일본이 만든 말이고 오늘날 젊은 세대는 순한글세대인데 여전히 보수적인 학계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한자로 만들어진 전문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을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100% 알고 있지는 못하다. 분명 개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그랬을까? 교수가 옛날 세대 사람들인데 말이다.) 이걸 생각하면 요즘의 인문학계 학생들은 대학가서 교과서는 제대로 읽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어렸을 때 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칸트같은 철학자가 쓴 철학책을 열어보고는 했는데 일차적으로 내가 무능한 탓이지만 이차적으로는 번역이 매우 열악해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 내가 직접 책을 번역하는 일도 생기게 되면서 절감했지만 사실 번역이란 종종 매우 어려워서 사기에 가까울 때가 있다. 특정 외국 단어를 특정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개념이 미묘하면 할 수록 그 특정한국어라는게 일상에서는 쓰지도 않고 사전이나 찾아야 나오는 말이 되기 쉽거나 아니면 아예 그냥 원어의 발음을 그냥 쓰고 그걸 번역이라고 할 때도 있다. 이러니 이걸 원서를 읽지 않고 이해하는 일이 너무나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철학책만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대학시절 물리학을 공부할 때도 영어원서와 번역서를 둘 다 볼 때가 있었는데 심지어 물리학 번역도 쉽지 않아서 번역된 물리학 책을 보느니 영어원서를 보는게 더 이해하기 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니 17세기 철학책따위야 오죽하겠는가. 이공계는 훨씬 국제화되어 있으므로 그냥 영어원서를 보면 되지만 상대적으로 국내로 고립되어 있는 학계의 교육은 분명 훨씬 큰 문제를 겪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학문 이전에 그걸 할 수 있는 언어적 토대가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계가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가는 상황에서는 대학같은 학문 기관안에서 언어를 표준화하고 발달시켜서 일반 대중에게 그것을 유통시키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에도 이같은 작업은 아주 중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말하면 현실적으로 대학의 힘은 날로 떨어져가고 있다. 무엇보다 큰 것은 전문화다. 끝없이 전문화로 갈라져 많은 전공학과가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학자의 수도 늘어서 대학교수가 되는 일이 쉽지 않다보니 사람들은 그저 전공분야에서 논문쓰기에 바쁘다. 그것이 그 학자에 대한 평가가 되고 그 평가가 대학교수 자리를 유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대중의 판단 이전에 그 좁은 분야의 동료 연구자들의 평가가 더 중요하다. 즉 교수를 포함하는 학자들의 언어는 점점 대중과 멀어지게 된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학문이 점점 안중요해진다는 뜻이다. 교수보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같은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뜻이 대중적으로 더 많이 정책에 반영된다. 대중과 동떨진 전문가는 바로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에 정치인이 들러리로 불러서 자신의 결론을 그 전문가가 확증해 주기를 원할 뿐이라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 설사 토목공학의 전문가라도 이런저런 경제적 역사적 정치적 이유로 사대강 댐개발에 대해서 목사보다도 아는 게 없는 사람으로 취급될 수 있다. 수질오염문제는 장난감 로봇 물고기가 해결할 수 있다고 하면 되고 말이다.
최근에는 미적분이 대학입시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은 현실에서 쓰지도 않는 미적분이 뭐가 중요하냐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소통과 언어에 대해서 말하자면 분명 미적분이 대중교육에서 사라지는 것은 적어도 이제까지의 이공계와 소통할 능력이 더욱 줄어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일 수는 있으나 이공계 전공자들에게는 이 사건이 마치 내가 한국어를 쓰는 사람인데 초중고에서 한국어수업이 없어지는 것같은 느낌이며 한국어를 배워서 어디에 쓰냐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픈 것과 비슷한 사건인 것이다. 게다가 한편에서는 이공계 연구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으면 더더욱 그렇다. 요즘 인기있는 AI? AI 학습알고리즘은 미적분과 벡터 개념없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초중고 12년간 밤낮으로 공부시킨다는 요즘의 교육현실을 생각하면 미적분을 배울 시간이 없다는 결론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도대체 그렇게 바쁘게 뭘 배웠다는건가?
이 문제는 확실한 대안이 없다. 대학이 언어발달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면 대안은 대중문화밖에 없다. 드라마나 예능이 그리고 유튜브가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을까? 대학이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그런 것에 의존할 방법밖에 없다. 이러니 그냥 이도 저도 아니고 확실한 대안이 없는 가운데 사회 전체적으로는 분열되고 집단적 지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전에는 잼보리를 엉터리로 유치해서 나라가 망신당하는 일이 있었다. 잼보리라고 해봐야 올림픽도 아닌데 한국이 그정도 행사도 제대로 치뤄내지 못한다는 것은 경제적 물질적 능력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냥 지능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누가 손이고 발이며 누가 머리인지도 확실치 않은 가운데 각자 맘대로 행동해서는 결과가 엉망이 된 것이다. 이는 그저 하나의 사건이지만 나름대로 언어가 파괴되고 파편화된 한국에서 늘상 일어나게 될 일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요즘의 한국은 시를 읽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학에 환호하지도 않는다. 대학에서는 의대만 인기가 높고 취업은 공무원이 인기가 높다. 1980년대의 대학생들은 이해를 못해도 철학책 한두권을 읽어보고 고민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요즘의 젊은이들은 취업걱정에 다른 걸 할 틈이 없어 보인다. 일상에 너무 코를 박고 고개를 들 틈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꿈은 비트코인이나 주식이다. 한국은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있는 것이다. 진짜 질문은 그럼 해결책이나 답은 있냐는 것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실 해결책이나 답이 없는게 아니다. 문제는 지능이다. 문제는 언어고 문화다. 그걸 알아보고 실행할 수가 없는게 더 큰 문제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 언어의 문제가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이런 문제가 지속되면 문화적으로 뒤쳐진 사람들 그래서 바보처럼 보이거나 교양과 상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