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가난하지만 가치있는 삶

격암(강국진) 2024. 3. 16. 21:46

가난한 생활가운데에서도 편안하게 도를 즐기며 사는 삶이 공자가 제자에게 강조한 안빈낙도의 삶이라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이 요즘은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요즘은 돈과 가치라는 말이 같은 말로 여겨지는 것같다. 그래서 값싸지만 가치있는 물건이라던가 가난하지만 가치있는 삶같은 말들은 있을 수 없는 모순적인 말로 들리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런 단순한 가치관은 내적인 풍요라는 말이 의미가 없다고 믿게 만들고 짐승처럼 단순하고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세상을 북적이게 만든다. 이런 식이라면 의사나 법관이나 과학자나 정치가들같은 각각의 직업의 의미도 사라질 것이다. 좋은 직업이란 그냥 돈 많이 버는 직업이니 돈돈돈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된다. 그럼 얼마나 재미없는 세상일까.

 

나는 사치하는 것을 꼭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세상의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내적인 빈곤이 나쁘다는 것이다. 내적으로 빈곤한 사람은 마치 맛을 못느끼면서 비싼 음식을 먹는 사람과 같다. 그런데도 왜 비싼 음식을 먹을까? 비싸면 좋은거니까 그렇다. 객관적인 시장가치가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왕이면 비싼 걸 먹고 싶을 뿐 이걸 먹던 저걸 먹던 어차피 관심은 없다. 맛은 못 느낀다. 이런 물질적이고 객관적이기만 한 세상에서 우리는 탈출할 필요가 있다.

 

체험은 모두 궁극적으로 주관적이다. 주관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형식과 의미는 서로 다른 것이다. 이는 이미 20세기에 여러번 알려 진 것인데 대표적인 예중의 하나가 기하학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인간은 아주 오랜동안 현실 그 자체로 알았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기하학은 인간이 만든 기호의 형식적 시스템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다만 그 기하학의 입장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우리는 세상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의미도 찾게 되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책과 의미가 있다. 우리 앞에 여기 해리포터가 한권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이 책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위치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이 책에 나오는 해리포터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원자들까지 가봐야 결국 우리는 그냥 해리포터에 나오는 글자들을 모두 안다는 것과 다른게 없다. 그런데 영어로 써져 있는 해리포터는 한국어만 아는 사람에게는 그냥 낙서와 같다. 결국 책의 의미는 기호를 해석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물질적인 상태가 이 세상의 의미 자체는 아니다. 예를 들어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단순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같은 재산을 가진 두 사람의 상황이 같다고 여기는 실수를 한다. 왜냐면 그들은 물질적으로 파악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도 매일 매일의 삶의 경험은 오직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에 의해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느낄 텐데도 물질주의에 혹은 객관성에 지나치게 물든 나머지 그들은 그런 의미들을 모두 유령같은 것으로 인정하질 않는다. 그러니까 같은 정도의 인터넷 평점을 받은 두 개의 레스토랑은 같은 가치를 가진 것이고, 같은 가격을 가진 두 개의 요리는 같은 가치를 가진 것이다. 그들은 물질주의와 객관성에 눈이 멀어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하지만 진실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한 컵의 물은 목마른 사람과 물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 다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각각의 개인이 가진 입장의 차이이고, 인생의 차이이며, 내적인 차이다. 즉 우리가 태어나서 이제까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는가가 우리가 만나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모든 것이 객관적이기만 하다면 유명한 여배우의 키스와 추한 노파의 키스가 물질적으로 다를 게 뭔가. 우리가 첫사랑의 키스에 감동한다면 그 이유는 뭔가?

 

내적인 풍요로움이라고 하면 왠지 신비적이기만 하다. 하지만 그것은 물질주의에 눈 멀지 않은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은 다른 체험을 해온 사람에게는 다르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풍요로운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세상은 풍요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기억이라고 하면 누구나 가지고 있고, 나이든 사람은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관성없는 삶이 우선 문제고, 보려고 하지 않은 것이 문제다. 사람이 일관성을 가지고 뭔가를 계속 고민하다보면 보는 세계가 늘어나고 커지게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기만 아는 짐승같은 존재에서 점점 더 큰 세상의 문맥에서 우리 주변을 파악하게 되는 문명인이 되는 것이다.

 

뜰앞에 핀 국화를 보면서 중국의 시인을 떠올릴 때 그 국화가 똑같이 느껴질 리가 없다. 글자를 보면서 수학을 생각하고 인공지능을 떠올리는 사람에게 같은 글자가 같게 보일리가 없다. 같은 강을 본다고 해도 그 강에서 민족의 역사를 떠올리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자기를 작게 만든다. 모든 인간은 똑같고, 모든 행동은 결국 돈을 위한 일이 되고 말며 스스로는 그저 세상에 수도 없이 존재하는 원자들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결국은 통장잔고를 말하는 숫자하나가 인생 전체를 의미하게 된다. 그렇게 되고 나서도 내가 놓친 것이 없으며 이 세상은 모두 물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불쌍한 사람이다.

 

가치와 의미가 있는 삶을 살기 위해 꼭 가난해 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단순해 지는 자신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쉬운 함정이 바로 모든 것을 물질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너무 바빠지면 특히 돈에 대한 집착때문에 너무 바빠지면 우리는 그 함정에 빠지게 만다.

 

또한 지나치게 풍요로우면 아쉬운게 없어진다. 언제나 요리를 사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요리하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뭔가를 잃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자기 몸을 움직여서 필요한 것을 구해왔는데 그걸 전부 시장에 의존하게 되면 우리는 점차로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모든지 돈으로 해결하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배우자가 사랑을 느낄까? 모든지 돈으로 해결하는 부모는 어떤가? 이러니 풍요가 종종 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자기를 자제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지나친 사탕이 독이 되듯이 말이다.

 

이런 과정의 끝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리석어진다. 안빈낙도는 반드시 어리석은 말이 아니다. 오히려 살면서 적어도 가끔은 실천해야 하는 말이다. 굶어봐야 음식의 소중함을 알고 소화도 더 잘되는 법이다. 차가 있어도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해야 하는 법이다. 가난하지만 의미있는 삶은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