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쩌다 환경을 잊어버렸을까?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을 쓴 휴버트 드레이퍼스에 따르면 서양은 플라톤이래 철학적 편향에 빠져왔다고 한다. 그것을 그는 존재론적 가정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지적인 행동은 확정적이고 독립적인 작은 부분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것을 환원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는데 드레이퍼스는 이러한 철학적 편향은 이미 현상론자들로 불리는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가 있다고 한다. 철학자들의 지적은 그렇다치고라도 물리학자인 내 입장에서 보면 물리학의 고립계 선호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일단 뭔가를 그 주변의 환경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주변의 환경과는 독립해 있다고 말하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일 것이다. 우리는 환경을 잊는데 익숙하다. 그러니까 여기 수소원자가 하나 있다고 하면 우리는 온 우주가 아무 것도 없는 진공인데 이 수소원자 하나만 홀로 존재하는 상황이 상상가능하며 현실적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면 여기 자동차나 망치같은 기계가 하나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하나의 기계를 그 기계 자체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망치를 설명하면서 이 망치가 홀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망치의 주변이 어떤지를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인간을 유전자와 동일시 하면서 우주 공간에 DNA라는 고분자가 홀로 있어도 그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계는 그 주변의 환경이 그 기계와 조화를 이뤄야 작동할 수 있고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위가 없으면 아래가 있을 수 없듯이 어떤 의미에서 망치를 망치로 작동할 수 있게하는 환경없이는 망치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면 망치라고 불릴만한 그 물체는 망치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망치를 망치로 쓰지 않으면 망치는 망치가 아니다. 이렇기 때문에 기계를 쓰는 사회인 근대 사회는 단지 기계를 쓰는 사회가 아니다. 그 사회는 그 기계와 조화를 이뤄야 하고 그래서 근대 사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될 때만이 기계들이 의미를 가지고 효율적으로 뭔가를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환경을 생각할 때 우리는 기계를 사용하는 법이 단순히 그 기계를 조작하는 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사용하는 법은 단순히 자동차를 조종하는 법이 아니다. 왜냐면 구체적인 문제, 예를 들어 직장까지 자동차로 출퇴근한다는 문제를 자동차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길이 있어야 하고, 주유소도 있어야 하며, 자동차 관리를 위해 수리점도 있어야 한다. 게다가 교통법이라는 것도 있어야 하고, 도로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교통법을 알고 지키는 사람들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자동차를 사용해서 직장으로 출퇴근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동차를 조작하는 법말고도 이런 환경적인 것을 준비한다는 점을 의미하고 이것이 진정한 자동차 사용법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환경을 망각한다. 왜냐면 환경은 이미 근대화 과정을 통해서 이미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동차 사용법은 그냥 자동차를 조종하는 법이라고 여겨지기 쉽다.
이러한 것은 기계에서도 사실이지만 인공지능에서는 더더욱 사실일 것이다. 무엇보다 인공지능은 이제 발달하고 있는 것으로 아직 인공지능을 위한 환경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 자동차로 말하면 자동차가 나왔을 뿐 주유소도 없고, 교통법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사람들도 인공지능 사회라는게 뭔지도 모른다. 게다가 인공지능은 기계처럼 환원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인공지능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전체를 부분으로 분할하지않는다. 인공지능은 처음부터 목적을 위한 최적화를 시작한다. 이 말은 인공지능은 우리가 익숙한 우리 주변의 기계보다 더 복잡한 목적을 위해, 더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 존재하고 만들어 졌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만큼 그 주변의 환경에 더 강하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해리포터가 써져 있는 책은 그걸 읽고 해리포터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해리포터라는 소설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것이 지능적인 행동이나 선택이라는 것은 그것을 지능적인 것으로 해석할 시스템을 마음에 가진 관찰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을 쓰는 사회를 그저 지금과 같은 기계적인 사회인데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쓰는 사회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인공지능에 대한 교육이 인공지능을 조작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공지능 사회란 인공지능을 쓰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그 인공지능과 가장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회이다. 인공지능의 잠재력을 최대한 살려서 인공지능이 인공지능답게 쓰일 수 있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가 인공지능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일까. 우리는 인공지능은 데이터로 만들어지고 다른 무엇보다 데이터를 분석하는 수단이고 결과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인공지능을 쓰게 되는 이유도 그래서 오늘날 데이터가 인간이 처리하기에 너무 많고, 너무 빨리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곳이 되어가면서 변화의 속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소문하나에 조단위의 돈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도 하는 세상이다. 복잡하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뉴스가 나와도 우리는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양자컴퓨터가 개발되었다는 소식에 주가가 출렁인다면 우리는 양자컴퓨터가 뭔지를 단기간에 공부해야 하는 판이다. 출렁이는 것은 단지 주가가 아니라 사회고 교육이고 미래 전망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이 가장 쓸모 있는 상황은 실시간으로 빠르게 새로운 데이터들이 많이 생산되는 상황이다. 마치 인간이 걸어다니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식적인 명령이전에 자율신경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 필요하듯이 실시간으로 큰 변화가 생기고 그것에 대처해 나가야 하는 국가나 도시같은 사회 공동체는 점점 더 인간의 분석 능력만으로 그것을 할 수 없고 자율신경에 준하는 빠르고 자동화된 정보처리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결국 인공지능이 가장 필요하고 쓸모있어지는 사회는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흔한말로 초연결사회라고나 할까. 연결과 인공지능은 이렇게 상호작용하면서 이어져 있다. 인공지능이 연결에 대한 해결방안이라면 해결방안이 있으니까 연결은 더 많아지고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초연결 사회가 있을 때 비로소 인공지능은 그것이 가진 잠재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지능은 연결에 의해 확장된다. 따라서 초연결사회란 초지능사회다.
인공지능의 출현은 결국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새로운 언어의 출현과 같다. 이미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는 인공지능이 나왔기 때문에 일상어가 컴퓨터 언어가 되었다. 말을 하면 인공지능이 코딩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대기업의 회장처럼 많은 인력들이 그를 돕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듯이 어떤 목표를 지정하면 그걸 위해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과 협상은 알아서 인공지능이 해주는 사회가 인공지능 사회이다.
빌게이츠같은 부자와 가출한 소녀의 가장 큰 차이는 지식과 조직이다. 법률에서 경제, 교육, 오락등 모든 면에서 부자인 빌게이츠는 돈 덕분에 조언을 들을 수 있고 대리인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미 운전사가 운전하는 차를 탈 수 있는 빌 게이츠에게 자율운전 자동차란 현실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지를 쉽게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가출한 소녀는 설사 그녀를 위해 국가가 준비한 쉼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게 있는지 조차 모를 수 있다. 그녀를 기꺼이 돕겠다는 사람이 존재해도 그런 사람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 모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인공지능 에이전트에 의해 연결되는 시대에 그녀는 인공지능 사용법을 배울 필요가 없다. 그냥 인공지능에게 나는 오늘 어디서 자야하냐고 물어보면 된다. 그러면 인공지능은 모든 지식을 검색해서 최선의 답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사용법이라는 것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기계를 조작하는 법이라는 뜻에서의 사용법은 없지만 진짜 사용법은 따로 있다. 본래 문자가 출현했을 때도 우리는 비슷한 일을 겪었다. 문자의 출현으로 지식을 누적시키고 소통시키는 방법이 달라지자 문명이 발달했고 국가가 나타났다. 다시 말해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는 방법이 달라지자 인간은 국가같은 거대한 사회조직을 발달시켰고 문명을 이룩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주변을 둘러 볼 필요가 있다. 국가기관에서 시장에 이르기까지 각종 회사들과 사람이 살아가는 관례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은 인간의 한계라는 바탕위에 세워졌다. 다시 말해 인간의 기억력, 인간이 소통하는 능력따위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런 조직들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어디선가는 관리업무를 해야 조직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소매상이 있는가 하면 도매상이 있고 돈도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 에이전트와 결합하여 사이보그2가 된 사람들의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달라진다. 토마토 소매상이 왜 시장을 통과해서 소비자와 만나야 할까? 소비자와 생산자가 인공지능간의 협상과 연결에 의해 직접 연결될 수 있으며 그에 필요한 모든 잡일을 스스로 알아서 해줄 수 있다면 말이다. 다른 좋은 예는 비트코인이다. 암호화폐는 국가같은 중앙조직이 발행한 화폐가 아닌데도 지금 세계를 뒤흔들 정도로 발달했고 모든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있다. 국가의 보장이 아니라 기술의 신용보장이 이 시대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중추가 되는 시스템이 신용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건 이제 느리고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모든 사람을 연결하는 시대에는 어떤 탈중앙적인 조직들이 등장할까? 나도 모른다. 다만 내가 하려고 하는 말은 누군가가 문자를 만들었을 때 그 문자를 쓰는 법이라는게 글자를 문법에 맞춰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착각한 거라는 것이다. 문자를 쓰는 법이란 문학을 하고, 발명을 하고, 철학을 만드는 것이다. 문명을 창조하는 것이 문자를 쓰는 법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문자를 통해 거대한 문제들을 해결해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을 쓰는 진정한 방법도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이며,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것이다. 인공지능 에이전트는 5년이면 늦어도 10년이면 대중화될 것이다. 그리고 나면 문명에 대한 모든 생각들은 이미 철지난 과거의 이야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류는 처음으로 언어 장벽이 없는 세상에 살게 된다. 지금도 실시간 번역이 되는데 5년 후에 인공지능 에이전트로 서로와 대화하는 사람들이 언어장벽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인공지능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쓰는 도구이고,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의 도구이며, 기사를 쓰는 사람의 도구일 수 있다. 인공지능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체하는 휴머노이드의 조종에 쓰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아주 작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건 시작일 뿐이다. 아니 시작도 되지않았다. 인공지능 에이전트의 관점에서 지금을 보면 지금은 1960년대에 메인프레임 컴퓨터만 있던 시대나 마찬가지다. 느리고 거대한 컴퓨터가 있을 뿐 개인용 컴퓨터인 PC가 보급되지않았고 그 PC들이 인터넷으로 서로 연결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인공지능 에이전트들이 네트웍으로 서로 연결되는 세상은 불과 2-3년 안에 올 것이다. 5년은 길게 본 것이다. 우리는 5년안에 1960년에서 21세기로 점프하게 된다. 그리고 그 변화의 폭은 PC의 보급과 인터넷의 보급보다 더 클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인공지능에 대해서 기계적인 시각, 환경을 무시하는 시각을 가진다. 그래서 자꾸 휴머노이드 로봇 정도에 놀라고, 컴퓨터 안에서 그림을 그려주는 정도에 놀란다. 그건 마치 실험속의 자동차와 같다. 자동차가 일단 대중화되면 그리고 그 자동차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세상이 바뀐다. 인공지능이 두렵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인공지능이 뭘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정말 깊이 고민해 본 사람은 드문 것같다.
20년쯤 뒤에 사는 사람들이 보면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수렵채집인같은 문맹의 야만인처럼 보일지 모른다. 앞에서 지금의 인간들이 지식과 조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 보라. 금속활자 인쇄술은 결국 프랑스혁명을 만들었다. 인공지능이 뭘 만들지는 야만인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