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할 수 없는 시대적 문제
현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모든 문제들이 하나의 원인때문에 발생한다는 면이 오늘날에는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 문제는 단순하다. 그건 이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한다는 사실이다. 이걸 이 글에서는 짧게 복잡한 환경의 문제라고 하자. 우리는 이 복잡한 환경의 문제를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도록 교육받아왔다. 예를 들어 공부는 왜 하는가? 그건 바로 세상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우리는 공부를 더 하면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게 만들어져 온 셈이다. 그리고 비록 개인적으로는 너무 세상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저기 어딘가에 있을 매우 재능있고 좋은 교육을 받은 누군가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만들어져 온 셈이다. 그건 마치 비행기 뒤에 타고 있는 사람이 나는 비행기 운전을 못하지만 나보다 더 대단한 비행기조종사는 그래도 이 비행기를 운전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조종석의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 있는 것이 침팬지같은 짐승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놀라게 될 것이다. 그걸 너무 늦게 알게 되면 그게 더 문제다. 비행기는 추락해서 모두가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경제학자는 정말 경제를 알까? 정치인은 정말 이 국가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까? 그 사람을 뽑는 사람들은 좋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도지사나 시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뽑고 있을까? 거대한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인은 어떤가? 판검사들은 사회적 정의가 뭔지 알까? 언론인들은 어떤가? 그러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복잡한거 아닐까?
복잡한 환경의 문제는 빈부격차도 만들어 낸다. 부자들은 많은 정보와 조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잡한 환경속에서도 비교적 재빠른 대응을 할 수 있지만 세상이 복잡해 지면 질 수록 그런 정보와 조직으로부터 소외되어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살기가 힘들게 된다. 우리는 이 문제를 교육의 보편화로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니까 공부하면 복잡한 환경이 인간평등을 깨뜨리는 경향을 해소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21세기에도 공부해서 초중고 대학을 나오면 그 사람이 혼자의 힘으로 이 복잡한 환경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분명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얼마나되는 사람에게 그럴까? 비율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교육으로는 시대에 뒤떨어지게 될 것이다. 결국 사회적으로 빈부격차가 점점 커지게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론 머스크같은 자수성가형 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복잡한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더 살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사회적 현실을 부정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교육비도 점점 올라가고 있다. 정말 지금하는 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몰락을 막을 수 있을까? 아이를 낳지 않는 한국인들이 현명한 거 아닐까? 요즘의 선진국의 젊은이들이 무기력한 것도 이 복잡한 환경의 문제때문이 아닐까? 몇명의 복권당첨자가 경제적 불황을 감출 수는 없다.
문제가 어렵다는 사실이 그 문제를 풀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은 때로 자기의 진짜 문제를 보지못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계속 장님으로 만드는데도 쓰인다. 산을 나무 삽으로 뚫어서 터널을 만들려고 할 때 그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럼 포기하냐, 나는 계속 터널을 뚫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멋져 보이지만 그 사람은 나무 삽으로 돌산을 뚫어서 의미있는 시간내에 터널을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러니까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구를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머리속에는 도구란 곧 나무삽이라는 생각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의 인류의 머릿속을 거의 가득 채우고 있는 문제 풀이의 도구가 무엇일까? 그것의 이름은 여럿이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하나는 객관성이다. 우리는 객관적 사실들, 객관적 지식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문제를 풀려고 한다. 객관적 사실이란 이 세상에 대해 모두에게 옳으며 시간이 지나도 옳은 사실들을 말한다. 남한에서 북쪽으로 가면 북한이 나온다는 것같은 사실이 객관적 사실의 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교육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이 배우는 것이 바로 객관적 사실이다. 사회적으로 어떤 정책을 결정하려고 한다거나 법을 만들려고 할 때도 오늘날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그 과정은 객관적 사실에 기반하여 진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객관적 사실이란 점점 힘을 잃어간다. 어떤 말을 해도 그것에 대한 예외가 존재하게 된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말이란 점점 길어지게 된다. 예외적 상황들을 포함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법을 만들 때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수가 소수를 착취하고 억압하며 심지어는 학살하는 잔인한 사회가 될 것이다. 사회적 다수가 이성애자라고 해서 동성애자들을 살 수 없는 세상으로 이 세상을 만들면 소수의 동성애자들은 극한의 고통을 겪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말을 많이 들어왔다.
문제는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복잡해지면 기묘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소수자다. 다시 말해 복잡한 세상에서는 점점 더 예외적이고 특이한 경우가 많아져서 평균이 의미가 없어진다. 이 세상에 보통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고 전부 다 어떤 의미에서는 특이한 사람들이 된다. 그렇다면 기준이 뭐고 객관이 무엇이며 사회적 정의가 무엇일까? 우리가 이성적으로 객관적 사실에 기반해서 누구에게 얼마의 세금을 물리고 국가 예산을 어떻게 쓸지를 판단할 수 있을까? 교육정책이나 복지정책이나 의료정책이나 사법정책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객관성을 부정하거나 그에 대해 경고를 발해온 철학자들은 많이 있었다. 니체가 그렇고 실용주의 철학자들이 그러하며 쿤이나 푸코나 데리다같은 철학자도 그렇고 비트겐슈타인도 그렇다. 사실 객관성이라는 단어를 머리에 담고 20세기를 돌아보면 20세기는 온통 객관성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과학과 인문학의 분열이라는 인기좋았던 주제도 결국은 객관성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객관적 과학과 주관적 인문학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와 21세기의 차이가 있다면 지식은 더 많이 증가했고 기술은 더 발달해서 이 복잡한 환경의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20세기에는 오직 철학과 과학과 기술의 첨단에 있던 사람들만이 고민했을 뿐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심각하지 않을 수 있던 문제가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심각한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말하자면 양자효과같은 것은 물리학자에게만 중요했을 뿐 사람들은 양자역학이 나온 이후에도 고전역학적 세계를 그냥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양자효과를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세상에 살게 된 식이다.
앞에서 고전역학적 세계와 양자효과의 세계로 비유해서 말한 세계는 객관적인 세계와 객관성이 무너진 세계라고 다시 말할 수 있다. 학자들, 지식인들은 20세기에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객관성의 문제를 고민했지만 그것이 그때는 소수 지식인들이 내부에서 가지는 고민 수준이었다고 하면 지금은 경제, 정치, 교육, 장래 계획등의 이유로 모두의 당면과제가 된 상황이 된 것이다. 객관성이 무너진다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단순한 사람들에게 네가 지금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남한에서 북쪽으로 가면 북한이 나온다는 것은 지표면에 사는 사람들에게나 객관적이다. 우주적으로는 객관적이지 않다. 지구를 떠나 우주 공간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상황에서는 동서남북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복잡해지고 빠르게 변함에 따라 사람들이 믿는 것이 무너지고 있다. 열심히 돈을 아껴 저축하는 사람들이 비트코인으로 100억벌었다는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느끼듯이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언론이 뭐냐고 물어야 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공중파 방송에 나오고 거대 신문사 기사에 나오면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미디어의 발달로 언론이 뭔지는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언론이 가장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까? 오늘날에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SNS로 블로그로 직접 정보를 전달한다. 현장을 찾아간 기자가 가장 빠른 것도 가장 사실을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기자는 전문가일까? 사회적으로 교육수준이 낮았던 50년전에는 교육받은 기자가 일반적인 지식인으로서 가치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전문적인 식견을 가졌다고 말해질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세상이 교육받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모든 문제에 대해서 진짜 전문가들이 언제나 댓글을 달 수 있다. 이것저것 보도하는 기자보다 그들이 더 전문가들이다. 게다가 기자는 월급을 받고 일한다. 그러니까 조직에 매인 몸이다. 그게 아니라 기꺼이 자신의 전문적인 식견을 이해관계에 상관없이 말해주겠다는 사람들이 네트웍에 있다.
오늘날에도 심층보도를 통해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좋은 기사를 쓰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말이 안된다. 그런 사람은 그냥 자기 책을 쓰거나 나가서 1인 미디어로 특종을 내고 보상을 혼자 받는게 좋다. 거대 언론에 매인 사람들이야 말로 온갖 관행과 억압속에서 쓸데없는 컨텐츠를 양산하기 쉽다. 물론 인터넷 댓글 다는 사람이 기자보다 항상 훌룡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반대도 사실이다. 기자가 인터넷 댓글다는 사람이나 블로거나 유튜버보다 항상 훌룡하지는 않다. 그런데 이것은 언론이 국가를 떠받치는 중대한 사회적 기둥이라고 여기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일이다. 언론사기자는 월급도 받고 나름의 특권도 있다. 그래서 1인 인터넷 신문사를 차려서라도 나는 기자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차별성이 없다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신문방송을 안보는 젊은 세대와 여전히 신문과 공중파 방송을 신뢰하는 나이든 세대는 객관적 사실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견이 달라지게 된다.
객관성을 포기하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이럴 때야 말로 우리는 더더욱 고민하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기는 쉽다. 앞에서 든 언론의 예에서 처럼 기존의 사회적 관행속에서 권위를 자랑해 왔던 조직들은 객관성이 가장 중요한거라는 주장을 강하게 강조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앞에서 말한 나무삽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원하면 객관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더이상 낡은 생각만으로는 세상의 문제들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도 백년전쯤에 있었을 법한 계몽주의자의 태도를 지니면서 세상이 좋아질거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물론 우리는 합리적 판단이란 걸 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여전히 좋은 정치가와 나쁜 정치가의 차이는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모든 걸 포기하고 일상을 멈추고 공부하기를 멈춰서도 안된다. 전쟁이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라도 오늘도 밥을 먹어야 하고 방청소도 해야 한다. 다만 가끔은 머리를 들어 모든 사람을 다 죽일 수 있는 전쟁을 막지못하면 모든 게 끝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붕에서 비가 새는데 당장 그걸 어떻게 할 수 없으면 바닥을 청소하기는 해야 하지만 지붕이 완전히 무너지는 문제를 잊지는 말아야 한다.
사실 이 세상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한다는 사실은 큰 눈으로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중요한 문제였다. 유럽인들에게 인종청소를 당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세상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한다는 사실때문에 그렇게 당한 것이다. 그런데 왜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 것이라고 할까? 그것은 우리가 전세계적으로 근대화라고 불리는 서양 문화와 근대 철학에 편승한 쪽에 몸담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 세력에게는 복잡한 환경의 문제가 상대적으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면 그들은 제국주의적으로 세상을 채워나가는 승리자의 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이 힘이다같은 말을 하면서 더 많은 지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더 강하게 만들어 왔다.
그런데 사실상 지구가 근대 철학으로 가득 찬 지금 상황이 바뀐 것이다. 이제 더 착취할 전근대적 인간이 거의 없다. 그러니 사회적 문제가 외부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되지 않는다. 수없는 대학졸업생들이 인도, 베트남, 중국에서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은 복잡한 환경의 문제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백년전쯤에 식민지 쟁탈전 문제로 일어난 것이 1차 세계대전이다. 지금 보면 그것도 복잡한 환경의 문제를 풀지 못한 결과다. 복잡한 환경의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할 수 없다면 앞으로 같은 결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전근대적인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도 복잡한 환경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학살당했다. 이런 결과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계속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