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대한 존중
이 세상은 하나다. 이 말은 폭력적이다. 나는 적어도 오늘날에는 각각의 공간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물리학자로 어릴 때부터 과학을 좋아했고 누구에게나 옳은 보편적인 지식을 좋아했지만 결국 그런 보편적인 지식이란 인간에게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은 유한하고 세상은 크고 복잡하며 그나마도 요즘은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모두 유한한 만큼 보고 듣고 기억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편파적이다. 농부에게는 농부의 삶이 있고, 화가에게는 화가의 삶이 있으며, 노숙자에게는 노숙자의 삶이 있다. 개미가 개의 삶을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듯이 우리가 자기가 아는 것으로 남의 공간을 이해하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공간에 대한 존중은 이렇게 일단 사생활에 대한 존중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공간에 대한 존중이란 반드시 너와 내가 다르다라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중심적인 사고 인데 그것 조차 하나의 편파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주제에 따른 공간에는 예를 들어 문학의 공간이 있는가 하면 과학의 공간이 있고 자영업의 공간이 있는가 하면 스포츠의 공간이 있다. 여러가지 주제로 나눠서 생각했을 때 각자의 공간은 다른 주제를 위해 존재하고,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의 인간을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살면서 그냥 나라던가 너로 살지 않는다. 그보다는 훨씬 더 자잘하게 다른 방식으로 산다. 초등학교 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어느 정도 오만이다. 초등학교 때의 나는 지금과 다르고 입시공부시절하던 때의 나는 지금과 다르며, 부모님과 집에서 살던 나와 친구들과 작은 방에서 어울려 하는 거없이 뒹굴거리고 있을 때라던가 학교에서 수업받을 때같은 다른 환경, 다른 상황에서의 나는 또 다르다. 그 모든 것을 다 하나로 묶어서 나라는 것으로 테두리를 치는 것은 그저 사회적 필요에 의한 사회적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결혼하기 전에 몇번의 연애를 한 적이 있다. 내 아내도 그걸 아는데 왜냐면 내가 아내를 처음만나 술을 마시며 신세한탄하듯이 했던 이야기가 바로 예전 연애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엔가 그런 이야기는 다 지어낸 것이며 그녀가 나의 첫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까지 물어서 이전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한 적이 있다면서 뭘 그런 거짓말을 하냐고 핀잔이지만 나는 굽히지 않는다. 지금의 아내는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거짓말인지 나도 알고 그녀도 알지만 나는 그 말도 진실하다고 믿으며 항상 그것이 진실인 양 말한다. 그 말은 내가 그녀를 만나서 결혼할 때 그만큼 다른 사람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녀앞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이전과는 같지 않고 다른 사람앞에서와는 같지 않다. 나에게 어떤 과거가 있었다는 말은 옳지 않다.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인채로 아마도 살다가 죽을 것이다.
공간에 대한 존중이란 이렇게 개인의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주제에 대한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며, 체험에 따른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은 시공간이라고 할 때처럼 시간과 다른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공간의 일부, 체험의 일부를 말하는 말이다. 나의 공간 너의 공간이라고 할 때 이것이 시간도 포함하듯이 말이다.
이런 모든 공간, 공간들을 대충 합쳐서 하나로 부르고 하나로 다루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파괴적인 일이다. 그건 마치 모든 음식은 그냥 음식일 뿐이라며 이것도 저것도 다 음식이다라고 부르는 것과 같고 수많은 종류의 음식을 하나의 거대한 솥에 넣고 뒤섞어서는 쓰레기로 만들어 놓고 저게 음식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물론 모든 공간들은 서로 연결되어져 있다. 그리고 어떤 공간들은 서로 명확하게 나눠지지만 어떤 공간들은 그저 유령처럼 존재해서 그걸 하나의 공간으로 따로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존재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인지 둘인지를 같이 생각할 일인지 나눠서 생각할 일 인지는 보기 나름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별 소용없는 일인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공간을 나눠보고 생각해 보고 탐구해 보는 일은 소중하다. 말했지만 그것없이 그냥 나라던가, 너라는 단어따위로 아니면 우리라던가 한국인이라던가 하는 식의 단어로 세상을 보고 말면 그건 아주 파괴적인 일이 된다. 20대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지금이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떄의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다른 사람이었고, 다른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의 나를 존중한다면 그때 그 사람을 지금의 나로 여기고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살다보면 사진을 찍지 않으면 다시는 기억해 낼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진을 엄청 찍고 일기를 자세히 쓰고는 날마다 과거의 일을 되새기며 사는 것도 꼭 바람직하지만은 않지만 매일 매일을 그냥 대충 살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사진이 어떤 순간에 대한 기록을 남기듯이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 시공간의 어떤 부분에 테두리를 친다. 그렇게 해서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내고 서야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고 그것이 무엇인가라던가 그것이 뭐에 쓸모가 있는가라던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소풍이라던가 외식이라던가 연애라던가 학교라던가 하는 여러가지 단어로 여러개의 공간들을 만들어 내고 있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쓰고 있는 몇개의 단어들만으로는 이 복잡한 세상이 충분히 기록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그냥 공간 공간이라고 부르고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같다. 인생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말은 인생은 하나의 공간이 아니고 수없이 많은 공간들로 이뤄져 있다는 말과 같다. 각각의 공간에서는 다른 질서와 법칙이 존재한다. 하나 하나의 공간도 다 이해하고 탐구하기가 어려운데 그것들이 수없이 많이 만들어져서 이뤄진 인생이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세상에 내가 말하는 공간이 얼마나 많은지는 도서관에 가보면 안다. 큰 도서관에 가서 끝없이 나열된 책들을 보라. 그 책 하나 하나가 하나의 공간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공간 하나에 대해서 떠들었는데 그것만 해도 저렇게 하나 하나의 책들이 된다.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책들도 사실상 다른 것에 대한 것이다. 매우 창의성이 없는 참고서나 과학책이 아니라면 그렇다. 물론 한권의 책으로 그 책이 다루는 공간의 모든 것이 다 설명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잘 모르겠다고 모든 것을 대충 섞어버리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우리는 공간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그걸 탐구하는 정신도 필요하다. 그런 것없이 우리는 그저 똥을 만들어 내는 기계에 지나지 않게 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