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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와 원치않던 결과 그리고 사상전쟁

격암(강국진) 2024. 8. 12. 13:48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의도와 원치않던 결과라는 것은 어려운 문제를 발생시킨다.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하건 의도라는 것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누가 무슨 일을 하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성공한 일이 있고 실패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가 좋게 보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들이 좋은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며 따라서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바라지 않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대다. 어떤 종류의 나쁜 결과이든 그것은 실수같은 것이 아니라 필연적 결과이며 그것이 충분히 예측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싫어하는 그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면 의도적으로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친구가 내 발을 밟으면 그건 실수라고 생각하고 내가 싫어하는 인간이 그렇게 하면 이건 공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이런 판단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태도 중의 하나는 과학분야에서 소위 행동주의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것은 20세기초에 유행했던 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관찰가능한 행동만을 근거로 사고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행동주의는 언뜻 들으면 자명하고 중립적이며 과학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행동주의는 이미 과학계에서 조차 흘러간 옛날 이야기다.

마음이나 의도같은 주관적인 해석을 포함하지 않는 행동주의야 말로 아주 강력히 주관적인 주장을 포함한다. 그것은 관찰 대상의 내적 세계가 아메바처럼 단순하다는 주장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떤 하나의 행동은 사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거의 일에 영향받으면서 결정된다. 우리는 그런 과거의 행동을 모두 알지도 못하거니와 간접적으로 영향받은 걸 생각하면 알게 될 가능성이 없다. 하나의 인간을 대상으로 할 때 과거에 기록된 몇개의 행동만을 근거로 그 사람이 기계적으로 그렇게 행동할거라고 믿는 사람은 상대방을 아메바수준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영향, 과거의 영향이 아주 크고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로 마음이니 의식이니 의도따위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메바에 대해서는 행동주의가 통할지 몰라도 인간의 행동에는 행동주의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인간이 아메바처럼 단순한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말을 했건 옳은 말은 옳은 말이다라는 식의 해석이나 같은 행동이라면 누가 하든 같다라는 식의 해석을 조심해야 한다. FTA에 찬성하는 대통령이라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같다는 식의 말을 조심해야 해야 한다. 그런 말은 단절과 고립을 포함한다. 현실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다. 옳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일에는 문맥이 있고, 언제 어떻게의 세부사항이 언제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칼은 살인자의 손에서는 살인무기이지만 요리사의 손에서는 요리하는 도구다. 세상을 작게 잘라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적어도 언제나 올바른 일이 아니다.

 

행동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단순히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보자. 한 소방관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일하는 동안에는 동네에는 불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 그 소방관은 불과 싸우는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고 심지어 아주 한가하게 지내는 것같았다. 그런데 그가 임기를 마치고 다른 소방관이 근무하게 되었다고 하자. 이제 불이 자주 난다. 그래서 그 소방관은 화재현장에 자주 뛰어들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어느 소방관이 좋은 소방관일까?

 

앞의 소방관은 말하자면 불이 나기 전에 그것을 예방하는데 최선을 다해서 불이 나지 않게 한 소방관이다. 그런데 불이 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소방관이 뭘 한줄 전혀 모르거나 알아도 그다지 크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 소방관이 돌아다니면서 화재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한 행동들을 귀찮은 것으로만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까지 안해도 불이 안날텐데 과민한거 아니냐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뒤의 소방관은 불까지 잘끄지 못하면 말할 것도 없지만 설사 몇번 불을 잘 껐다고 하더라도 이런 측면에서는 앞의 소방관보다 못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평가는 정반대일 수 있다. 그 몇번 불을 잘 끈 것에 대해서는 영웅적인 업적이라고 평가해주고 불을 잘끄지 못한 것들은 어쩔 수 없는 일들이라고 말하며 애초에 화재예방에 힘쓰지 못했던 것은 아예 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안나고 번성하는 마을에서 소방관은 욕을 먹고 화재로 피해가 엄청난 마을에서 소방관이 영웅시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은 화재를 막은 것에 대해서는 대개 감사할 줄 모른다.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일이 잘 굴러가면 그건 당연히 내탓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뭐가 잘못되면 사람들은 남 탓을 하고 싶어한다.

 

이런 태도가 가장 극명하게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정치다. 예를 들어 나는 부동산에 관해서 앞뒤가 안맞는 듯한 비판을 보고는 한다.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면 부동산 대책이 부실하다고 비판한다. 그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부동산 가격이 올라갔는데 그걸 팔아서 현금화하려고할 때 세금을 내라고 하면 왜 시세차익에 대해서 이렇게 세금을 많이 내야 하냐고 불만을 터뜨린다. 이것도 부동산으로 돈을 번 사람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돈욕심이 나니까 말이다. 내가 모순적이고 앞뒤가 안맞는다고 말하는 것은 하지만 이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부동산 가격을 오르지 못하게 하려고 오른 가격 차에 대해서 세금을 물리게 해놓은 것인데 가지고 있는 부동산 가격이 올라서 큰 돈을 번 사람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세금을 내라고 하니까 왜 세금을 내야 하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앞뒤가 안맞지 않은가? 이건 10억벌었는데 1억내라고 해도 10억을 왜 오르게 만들었냐고 불만을 터뜨리고 동시에 1억은 왜 세금으로 내게하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식이다.

 

그런데도 나는 문재인 정부나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 비판하는 보수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런 말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그냥 문재인이나 노무현이 싫다라고 정해놓고 그들에 대한 비판은 무엇이든 앵무새처럼 말을 한다. 그러다보니 불만의 주체가 뒤섞인다. 사람이 반드시 자기만 생각해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는 아니라지만 자기 입장에서 보면 불만을 터뜨릴 상황이 아닌데도 불만을 터뜨린다. 이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종부세를 내지도 않는 가난한 노인들이 종부세를 비판하면서 흥분하는 경우다.

 

나는 민주와 보수가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성적으로 말하면 같은 일은 양쪽에서 모두 일어난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권에서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외부의 환경의 결과로 만들어진 의도되지 않은 결과이며 좋은 일은 정확히 의도한 결과 만들어 진 것이다. 즉 지금의 상황이 어떠하건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세상중에서 그나마 가장 최적화된 세상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권에서는 숨쉬기도 힘들다. 왜냐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 많은 나쁜 일들이 모두 바보같은 정부때문에 생긴 일이거나 아니면 그런 일을 만들려고 의도하는 사악한 정부때문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는 윤석렬정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기사댓글을 보면 이 정권에서 일어나는 제 아무리 엄청난 비극이나 경제적 추락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본다. '이재명이 했으면 더 했을 것이다.', '빨갱이 좌파가 나라를 차지하게 둘 수는 없지 않았는가.'. 그들은 일어나지 않은 비극을 상상한다. 만약 윤석렬이 아니라 이재명이 당선되었다면 훨씬 더 대단한 국가적 참극이 벌어졌을 거라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비극들은 사소한 댓가다. 즉 일어나지 않은 그 거대한 비극을 작은 비극으로 막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윤석렬정부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나도 이 글에서 말한 사람에 속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내 눈에 윤석렬정부는 바보가 아니면 사악하다. 예측할 수 있는 비극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재명이 당선되었다면 생겼을 거라는 그 거대한 비극이 뭔지 모르겠다. 문재인은 문재앙으로 부르곤 하는 보수지지자들이 도대체 뭘 재앙으로 여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 기억에 문재인 정권때 만큼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았던 적이 없다. 그때보다 지금이 경제적으로 훨씬 안좋다. 안보도 안좋다. 안죽어도 될 것같은 사람들이 갑자기 무더기로 죽고는 한다. 확실히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 우리는 모른다. 모든 가능한 경우를 다 실험해 보면서 살 수도 없다. 농약을 먹으면 죽는지 안죽는지 확인해보면서 살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나는 윤석렬이 대통령을 잘하지 못할지를 시켜보고 나서 평가하는 현재의 상황도 매우 유감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이재명이 당선되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있어도 그 시절이 너무 살기 힘들다고 보수 지지자들은 불평할거라고 나는 믿는다. 경제 수치가 어떤가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들은 매우 사상적이다. 사실 데이터를 사상이 압도한다.

 

결국 인간의 의도라는 것도 우리의 사상이고 이론이다. 우리는 과거의 데이터에 기반해서 이런 저런 일에 대해서 그런 일이 생겨날 확률을 추측한다. 그런 추측을 돕는 것이 사상이고 이론이며 인간의 의도라는 것도 현실적으로 보면 우리가 가진 이론과 사상의 결과 만들어 진 것이다. 나에게 친절했던 사람은 나에 대한 치명적인 정보를 알아도 그걸 나를 공격하기 위해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인의 의도에 대한 한가지 생각이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의 이론, 하나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는 인간의 의도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우리는 중립적이고 과학적이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왜냐면 그런 건 일반론적으로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건 과학이나 수학 분야처럼 명확히 정의되는 세상일중의 일부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행동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말했듯이 언뜻 보기에 중립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가장 사상적으로 강력한 가정에 의존하는 것이다. 뭔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당연한 것처럼 해놓고 나니 세상에 가정이 없는 것같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상적이다. 이론적이다. 사상이 없는 상태라는 의미에서 중립적인 태도는 없다. 우리는 단지 그 사상이 충분히 보편적인 것인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보편성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그것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포용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종을 차별하는 사상은 다른 인종을 배격할 것이다. 자신을 피해자로만 여기는 사상은 스스로를 언제나 피해자로 남게 만들 것이다. 우리의 사상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상이 아니라면 그것은 결국 문제를 만들 수 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그 사상이 충분히 포용성을 가지고 있더라고 하더라도 그 사상이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이 끝없이 소모적인 정치적 논쟁을 벌이는 것도 사상적 분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확실히 정치적 사상적 논쟁이 끝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고 와서도 안된다. 하지만 상식적 기본적 부분들에 대한 사상적 공통점이 있어야 사람들은 함께 살 수 있다. 한국은 불행한 과거 탓인지 이런 부분이 너무 약하다. 한마디로 상식이 정착되지 못했다. 교육도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이론 없이는 세상을 볼 수가 없다. 그것은 벗을 수 없는 안경과 같다. 깨어진 안경으로 보는 세상에는 괴물이 가득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안경탓일 수 있다. 그래서는 누군가의 행동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