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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결혼 혹은 그 이상에 대하여

격암(강국진) 2024. 10. 5. 08:50

최근에는 미국 드라마를 하나 보다가 문득 결혼에 대해 또다른 생각이 떠올라서 그걸 여기에 적어 둘까 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결혼은 결국 부족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는 겁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결국 사람이 혼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혼자서는 부족한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족한 것을 메우는 방식은 반드시 결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에는 동거를 하거나 자유로이 연애를 하면서 비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너무나 큰 속박이고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이 매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결혼은 결국 부족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는 것을 왜 미국 드라마를 보다가 떠올렸을까요? 그건 미국인들 특유의 문화때문입니다. 근대화를 처음 이룩한 서구 사람들의 드라마나 영화는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상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떠드는 캐릭터들로 표현되는 그 핵심에는 평등하고 이성적인 인간, 논리로 객관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인간이 있습니다. 물론 현실의 인간들은 그런 이상에 정확히 맞지 않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현실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도 그렇게 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서구 문화 혹은 근대 문화는 강조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을 추구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누군가를 믿기보다는 끝없이 논리적으로 따지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받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회의론자의 정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의 핵심으로 소개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교육받고 있는 근대학교에서 어릴 적부터 교육되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어쩌면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는 이 사람이 어디로 가려고 그러나 싶어서 어리둥절한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성적이 되지 말자거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 말자고 하는 것인가라는 말을 하려고 하나? 그게 말이 되나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모든 것이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뭘 믿기로 선택하는가가 중요하고 이와 관련해서 이성적이라는 것이 뭔지에 대해 좀 더 깊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사람은 유한하며, 서로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합쳐져서 뭔가를 이뤄야 의미도 생긴다는 겁니다. 사람의 몸은 머리와 위장과 발등 여러가지 다른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우리는 뇌가 발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뇌만 두개라던가 발만 두개여서는 별로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서로 다르니까 협력해서 각자가 혼자 일 때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실은 평등하고 이성적인 인간상과 충돌하는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수결 투표란 무엇일까요? 그것이 된장찌개의 레시피와 그라땅의 레시피를 섞는 것과 같은거라면 애초에 무의미합니다. 그게 아니라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 노이즈를 제거하려고 하는 거라면 사실 모든 사람이 같은 진리를 본다는 생각을 하는 셈으로 결국 모두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처럼 우리 모두는 진리를 보는 완벽한 인간의 불완전한 복제품이라는 것이죠.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결혼제도는 오히려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는 근대화를 이룬 문명의 문제점이 점점 심각해져서 우리가 사회적으로 서로 협력할 이유를 느끼기 점점 더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근대 문명속에서 우리는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완벽한 이성을 가진 존재가 되기를 추구합니다. 인간의 본질을 이성으로 보고 성별이나 피부색깔, 성적 취향따위는 핵심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때 우리가 되려고 하는 것은 완벽한 이성을 가진 존재이고 이 이성은 객관적입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겁니다. 이런 객관적 진리의 가정속에서 근대문명은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시장이 발달하고 가정이나 지역 공동체같은 공동체 내부에서 힘을 합쳐야 해결할 수 있었던 기능들이 점점 더 외부로 유출되고 나자 사람들은 서로 공동체를 이룰 의미를 찾기 힘들어 졌습니다. 궁극의 지능을 가진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 필요는 있지만 타인이 필요없다고 이해됩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인간적 친밀감이나 성적 본능의 충족같은 애매한 원초적 필요로 이해됩니다. 그런 것들까지 어찌저찌 극복할 수 있게 되면 근대 문명속에서 모두가 추구하는 이성적인 인간이란 그냥 홀로 존재하는 것이 마땅하고 타인이 필요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21세기의 도시 남녀들은 결혼하기 힘듭니다. 어찌보면 그들은 홀로 완벽해지기 위해서 평생 노력해 왔는데 둘이 합쳐서 지낸다고 해도 그건 앞에서 말한대로 다소 사소한 부족때문입니다. 외로움, 인간적 접촉이나 성욕 혹은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원초적인 생각같은 것들말입니다. 그것들도 아주 사소한 이유는 아니지만 인간관계란 때로 큰 댓가를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이득과 손해를 따지다보면 우리는 도대체 왜 스스로도 완벽한 두 사람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족같은 강력한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납득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진정으로 강력한 관계로 이뤄진 결혼은 그런 걸 넘어서 내가 혼자서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배우자와 나아가 아이들과 함께 할 때 보완할 수 있다는 점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세상은 '너는 혼자서도 완벽하다. 너는 너의 삶을 살아야 한다.'같은 말로 가득하죠. 그리고 이런 메세지는 그 메세지대로 진실입니다.

 

결국 우리는 두 개의 서로 충돌하는 것같은 진실을 가집니다. 하나는 사회적 협력은 우리가 혼자서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합리화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각자는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혼자서도 완벽하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근대문명은 후자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어떤 면에서 스스로를 파괴합니다. 결국 사회적 협력없이 번성할 수 있는 문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딜레마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모두를 진공속을 나르는 입자들처럼 어떤 객관적인 우주공간 같은 곳 속에 똑같이 존재하는 서로 다른 인간들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유한성과 환경이라는 단어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우리는 결국 이 세계의 일부만을 불완전하게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물한방울 속의 짚신벌레처럼 이 세계의 작은 부분속에 갇혀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근대 문명에 빠져서 지금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고 믿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기억력을 생각하면 우리는 여전히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에도 그렇습니다. 즉 우리는 언제나 유한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어느 정도 극복하려고 하겠지만 그게 언제나 좋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타고난 육체는 한정된 기억력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미터 달리기를 좀 더 빨리 하면 좋겠지만 열심히 하면 언젠가 시속 100km의 속력으로 달리게 될거라고 믿으면 바보죠. 인간 한계의 근처에 가거나 그걸 뛰어넘으면 행복해 지는게 아니라 몸이 부서집니다.

 

타인은 내가 가지고 있는 환경의 일부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부분이죠. 인간은 유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신비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저 한마리의 동물일 뿐인데 엄청난 시공간에 대한 정보를 반영하면서 행동합니다. 우리는 돌고래나 개와 대화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이 그렇게 즐거운 상대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의 정신세계는 인간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완견을 좋아하는 것은 세상에 인간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개로 채워져 있고 단 한명의 인간도 없다면 우리는 인간을 너무나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우리가 처한 환경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려고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은 타인으로부터의 정보입니다. 인간은 모두 단 한번의 삶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내가 서울에서 쉐프로 일하면서 독신으로 사는 사람인 동시에 뉴욕에서 물리학자로 살아가면서 아내와 함께 아이둘을 키우는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봅니다. 그리고 서로 정보를 주고 받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수 없는 삶들을 간접체험하는 인간이 됩니다.

 

하지만 이 정보들은 내가 직접 체험한 것도 아닌데다가 훼손되거나 과장된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어쩌면 나를 해치기 위한 가짜 정보일 수도 있습니다. 환경은 언제나 나에게 우호적이기만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정체성의 신화는 언제나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들이밀어 집니다. 그 외부의 이익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가족을 포함해서 공동체들이라는 것이 중요해 집니다. 서로 믿고 협력하고 쓸모 있는 정보를 주고 받는 공동체가 있어야 우리는 나라는 개인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유한한 육체를 가지고 유한한 시간을 가지는 개인은 결코 혼자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멀리가 봐야 달리기로 자동차를 이기려고 하면서 자신의 육체를 파괴하는 인간이 될 뿐입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한 개인이 알 수 있는 지식이 유한한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아무리 위대한 개인도 결국은 지극히 불완전합니다. 인간이 혼자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됩니다.

 

하지만 이 말이 우리는 모두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로 생각없는 기계 부품이 라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은 사회적 협력이 꼭 필요하지만 결국 궁극적으로는 혼자입니다.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언제나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무지가 있고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타인을 포함하는 환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불확실한 신호를 보냅니다. 상대적으로 좀 더 큰 신뢰와 믿음은 있고 있어야 하지만 완벽한 믿음과 신뢰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그냥 떨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세상에 던져진 존재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선택합니다. 아기에게 세계란 대개 부모가 만드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인정이나 꾸중이 그 세계에서는 가장 중요합니다. 비슷하게 초등학생에게는 세계란 학교의 몇몇 친구들과 선생님으로 이뤄진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그 세계보다 더 큰 세계를 봅니다. 다른 환경에서 살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유년기의 세계에 남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나 형제의 인정만을 갈구합니다. 혹은 어릴 적 친구들의 세계에서 평생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외부적강압에 의해서 그렇게 되기도 하지만 노력해서 우리의 세계를 확장하거나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환경을 선택합니다. 누군가의 배우자로 물리학자로 한국인으로 살기로 합니다. 혹은 나아가 인류가 도달한 적이 없는 새로운 경계를 찾기로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삽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군인이 되어 전쟁에 나가서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가장 영예로운 삶의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물리적으로 보고 우리는 어떤 고정되고 객관적인 세계에 그냥 던져졌으며 우리가 어떤 환경속에서 살 것인가가 우리의 선택과는 상관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종 형제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서로 크게 다른 의미를 가지는 삶을 삽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살아갈 환경을 선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평등하고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환경의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불완전하고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소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이란 그래서 우리가 짐승도 가질 법한 욕구를 가졌기 때문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결혼이란 서로의 삶을 좀 더 강력하게 합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험의 폭을 훨씬 더 크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환경의 확장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뭔가를 결정할 때 그것이 다수결같은 것을 의미하는 민주주의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난 번에는 한번 양보했으니 이번에는 양보를 받아야겠다는 것같은 공평이 반드시 이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판단은 손과 발의 신호를 합치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는 서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합쳐서 더 합리적인 결과를 뽑아내려고 하는 공동체입니다. 더 합리적이란 것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더 만족스럽게 공동체를 유지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겠죠. 오늘이나 내일처럼 짧은 시간이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더 길게 말입니다.

 

요즘은 결혼을 하려는 사람들은 여러가지를 따지지만 정작 사람을 보는 일은 작아지는 것같습니다. 그러니까 재산에 큰 비중을 두고 외모에 큰 비중을 두는 식입니다. 그런 결혼이 뭘 위한 것인지는 분명합니다. 더 큰 쾌락을 위한 것이죠.

 

쾌락을 위한 연합도 충분히 훌룡한 일이죠. 그리고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이뤄지는 모든 일이 제가 여기서 말하는 결혼과 같을 필요도 없습니다.다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 결혼이 점점 미친 짓처럼 보이는 겁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같은 현실이 근대 문명의 인간관에서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걸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미래에도 유한할 것이며 서로를 그 환경의 일부로 만들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한없이 더 복잡해져 갈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합리적이고 폭넓은 삶을 위해 연합이 필요하고 공동체가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연합은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연합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비로소 결혼을 긍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삶을 확장할 때 우리의 삶이 보다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언제나 결혼만이 답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