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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환경

격암(강국진) 2024. 10. 7. 16:33

물은 수영하기를 배울 것을 강요한다. 이 말은 결국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은 환경에 의해서 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우리의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화 이후 인간의 생각은 주로 근대적 사고나 근대적 사회라는 것을 어떻게 보완하여 완벽한 것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것이 아니면 근대적 사고를 비판하고 그것의 불완전함을 지적하여 어떻게 그 오류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왜냐면 근대화 이후의 인간의 삶이란 결국 근대 사회를 그 환경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과학철학이나 분석철학이 근대적 사고를 보다 완벽한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로 생각할 수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을 근대적 사고의 전제를 거부함으로서 근대적 사고를 부정하려는 시도로 생각할 수 있다. 객관적 지식의 존재를 전제하는 근대적 사고와는 달리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성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환경과 문맥속에서 지식과 정의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지식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믿어지는 것은 어떤 사회적 관습이나 권력이 강요하고 있는 지식일 뿐이다. 이와 관련해서 리오타르는 거대서사의 가치를 부정하고 근대의 보편적 진보이념이 더이상 가치가 없다고 말했으며 푸코는 근대의 지식체계가 권력과 결탁하여 개인을 통제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근대에 대한 비판은 자연히 근대의 시작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일찌기 마르크스는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근대적 사고가 만들어 낸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 특성이 인간이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으로 행동하고 노동하는 존재가 되기 보다는 어떤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노동하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산주의로 알고 있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 자체가 답이라기 보다는 근대적 사고의 문제로 인해 생기는 인간의 부품화내지 비인간화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의 교육론도 결국 근대 사회 속의 인간이 부품같아지는 현실을 목격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방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었고 니체이래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말들도 표준화, 수단화되어지는 인간을 근대적 사회가 주는 억압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이 수없는 철학들을 공부하는 것이 이상으로 그 철학의 배경이 되었던 이 근대적 사고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철학은 그냥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근대적 사고란 무엇인가? 그 핵심에는 정보의 누적, 지식의 누적이 있다. 일찌기 문자의 사용이래 발달한 문명은 과학혁명의 시대에 이르러 수학적이고 정확한 측정에 의해서 만들어 진 지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상어로는 제 아무리 길게 명확한 말을 해도 한계가 있지만 정확하고 엄밀하게 측정된 데이터에 기존한 말들 그리고 그 데이터에서 찾아낸 자연법칙에 기반한 말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엄밀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과학적인 지식, 객관적 지식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그 엄밀성에 기반해서 다시 새로운 지식에 대한 기초를 제공했기 때문에 지난 몇백년간 인간은 전에 없었던 높이의 지식의 탑을 쌓을 수 있었다. 그동안의 인간 사회의 변화는 지난 몇천년간의 인간 사회의 변화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80억의 인간이 살고 있는 현재다. 이 많은 인간들이 살 수 있게 만드는 인위적인 환경을 인간은 만들어 냈다. 이것은 전근대적인 기술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이성적이고 신성한 존재로 여겨진다. 왜냐면 세상에 대한 관찰 데이터에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해 내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티코 브라헤의 천문 관측 데이터에서 케플러는 케플러의 법칙이라는 수학법칙을 찾아내고, 뉴튼은 그것을 넘어서 모든 사물이 따른다는 운동법칙과 중력의 법칙을 찾아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세상의 모습 아래에는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법칙들이 있으며 그걸 써서 이 세상을 지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근대적 사고 였다. 과학기술이 성공적일 수록 인간의 마음이나 이성은 신성한 것이 된다. 왜냐면 그것이야 말로 진리를 보는 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뉴튼은 아니다. 그리고 누구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을 스스로 찾거나 언제나 새로이 발견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은 그들의 선배가 찾아놓은 진리내지 믿을 만한 지식에 의존해서 새로운 지식을 찾는다. 그래서 저 뉴튼 조차도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거인들의 어깨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현실의 의미는 인간을 해방하는 지식이 반대로 인간을 억압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미 발견된 지식들, 널리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지식들은 이제 인간들이 배우고 따라야 할 법이 된다. 그것이 옳고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높은 지식의 시스템을 쌓아올리면 올릴 수록 인간은, 적어도 대부분의 인간은 이제 수동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그 객관적 지식의 시스템에 얽매이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이제 전체 지식 시스템을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지식의 탑을 쌓아올렸다.

 

그 좋은 예가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란 결국 가장 생산성있게 사회를 지탱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파괴할 때 우리는 비참한 전근대적 삶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생산성을 기반으로 인간을 생각없는 노동자로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시스템의 일부로 살아가기 쉽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지식 시스템이 말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논박하기 힘들다. 왜냐면 그것은 수없는 전문가들이 오랜시간 쌓아올린 것이며, 시스템을 멈춰세웠을 때 발생할 피해는 너무 엄청나다. 이 시스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적어도 압도적 다수의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이성적이고 성스런 존재라기 보다는 스스로가 만들어 낸 시스템에 속박되어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노예가 된다. 뉴튼이 만든 물리학을 비판하고 극복하기는 커녕 그걸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냥 공식을 외워서 그걸 쓰기만 하는 인간이 되었을 때 그 인간이 진정으로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말하기 힘들어 지는 것이다.

 

객관적이성, 환원주의적이고 논리적 이성을 강조하는 근대적 사고는 세상을 기계로 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사회는 원자적인 개인의 합이다. 그 개인의 본질은 이성인데 이 이성을 객관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우리는 사회를 완벽한 이성의 불완전한 복사품들로 채운 방같은 것으로 보게 된다. 다수결 투표는 이 불완전한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 평균을 내는 과정이고 모두가 점점 더 완벽한 이성에 가까워 질 때 모두는 서로 똑같아 질 것이다. 이성은 객관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결국 같은 존재가 되기를 갈구하며 그같은 목적이 이뤄지는 궁극에 이르면 서로가 필요없어진다.

 

즉 근대적 사고는 그 궁극에서 사회적 협력을 부정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회적 협력없이 문명과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까? 모두가 모두를 이성의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올바른 시도인가? 대화와 투표가 단순히 노이즈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면 유달리 진리로부터 멀어져 있는 무지한 자들은 투표에서 추방시키고 엘리트들끼리 답을 정하는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인 것이 아닐까?

 

정리하자면 근대의 사고란 세가지를 특징으로 가진다. 첫째로 지식의 객관성이다. 둘째는 새로운 지식이나 법칙을 찾아내는 인간 이성의 중요성이다. 마지막으로는 이렇게 만들어진 지식들을 누적시키고 순환시키는 인쇄기술같은 정보기술의 효율성이다. 근대 사회의 다른 특징들 예를 들어 개인주의나 세속화, 민주주의등은 이런 근대적 사고에서부터 도출된 것들로 생각할 수있다. 개인주의는 이성중심주의의 결과물로 생각할 수 있고 세속화는 발달된 시장의 결과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민주주의는 달라진 정보환경으로 인해서 중앙집중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던 봉건제가 무너지고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AI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이제까지의 사회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오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사회는 근대와 확실한 결별을 하게 될 것을 예측하게 만든다.  AI는 반드시 근대에 대한 비판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 이유는 AI를 근대에 출현했던 지식이나 기계들의 단순한 연장으로 파악할 때 우리는 AI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사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AI는 근대와의 완전한 결별을 뜻한다. 전근대와의 결별이 있어야 근대가 발달할 수 있는 것처럼 AI와 근대를 구분할 수 있어야 AI는 발달할 수 있다.

 

AI가 근대로부터의 확실한 결별을 의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지식과 이성의 객관성이 보다 확실히 사라지게 되었다. 비록 이같은 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곳에서도 주장되었지만 현실적으로 사회적 운영은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행해질 수 없었다. 충분히 빠르게 정보를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다원주의를 인정한다고 해도 세상의 다원주의적 운영은 한계가 분명했다. 하지만 AI의 발달은 이같은 정보처리문제를 해결하고 이성이나 지능이 어떤 틀안에서 유효한 것이며 이같은 틀들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사회속에서 현실화해서 보여줄 수 있다.

 

둘째로 AI는 컴퓨터 최적화를 통해서 데이터 속에 존재하는 질서나 법칙을 찾아낸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만이 진리와 법칙을 발견하는 존재라는 관점은 약해지고 우리는 인간의 의미를 새롭게 찾아야 하게 되었다. 우리가 새롭게 강조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욕구를 포함하는 감정과 틀을 정의하는 능력일 것이다. 즉 AI가 만들어질 데이터를 생산하는 시스템을 설계하고 정의하는 일을 인간이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만이 욕구를 가지기 때문이다. 기계는 원하는 것이 없고 풀어야 할 문제가 없다. 두 개의 가능한 시스템중에서 어느쪽이 우리가 AI를 만들어야 할 시스템인가에 대해 답을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근대인이 이미 존재하는 하나뿐인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속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인간이라면 AI 시대의 인간은 문제를 설정하고 세계를 창조하는 인간이다. 그 세계에 존재하는 법칙은 컴퓨터가 찾아내고 그 결과물이 AI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AI 시대가 AI와 인간은 물론 AI와 AI가 소통하면서 데이터를 주고 받고 최적화를 진행하는 시대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 시대에서는 인쇄물이건 전자매체를 쓰는 소통이건 결국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는 지금의 시대와는 복잡성에 있어서건 양에 있어서건 전혀 다른 수준의 소통이 행해질 것이다. 즉 AI와 AI의 소통은 인쇄술의 보편화 이상으로 정보소통의 복잡성과 양을 크게 증대시킬 것이다. AI는 지금도 책한권을 순식간에 읽고 도서관의 책을 모두 읽을 수도 있다. 언어도 가리지 않는다. 인간과는 같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AI가 발달한 사회는 지금과는 확실히 다른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그 환경 속에서 우리는 근대적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고방식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객관성과 보편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다양한 맥락과 관점을 인정하고, 인간의 역할을 재정의하며, 복잡하고 다층적인 정보 생태계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AI의 등장은 단순한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과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근대에 대한 확고한 결별을 의미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철학적, 윤리적, 사회적 질문들을 던진다. 우리는 이제 AI와 함께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고유한 가치와 역할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형태의 지식과 협력 방식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이 새로운 시대는 도전이자 기회이며,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