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암(강국진) 2024. 10. 14. 11:15

인간은 이야기의 힘에 지배당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파악하고는 한다. 그런데 여기에 누구나 살다보면 아쉽고 힘든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결합되면 우리가 자기 연민이라고 부를 법한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 즉 나는 어떤 비극적 스토리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나는 말하자면 구원받지 못한 즉 해피엔딩에 도달하지 못한 신데렐라나 백설공주나 장발장이나 알라딘이다. 

 

스스로를 불쌍한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보는데 더구나 아직 해피앤딩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니 자연히 그 주인공은 불쌍한 사람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으로 보는 자기연민이 되는 것이다. 이 스토리에 따르면 나는 어떤 가해자에 의해 억압당하고 행복을 박탈당한 재수없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나만 가지지 못한 유달리 복이 없는 인간이다. 나는 평생 좌절하고 빼앗기기만 해왔다. 그래서 내가 상처받고 우울한 것은 자연스럽다. 이런 나의 이야기를 제대로된 사람들이라면 들어주고 공감해 주리라 나는 생각한다. 아니 그걸 안해주는 사람들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기연민의 이야기는 틀린 것도 맞는 것도 아니다. 모든 위에는 더 위가 있고 모든 아래에는 더 아래가 있으며 사람은 누구나 특이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측면에 있어서 평균적이라면 그것이야말로 특이한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그 엄청난 평범함에 짓눌려 고민할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평균이거나 평균 이하인 점들을 가지고 있고 소수의 사람들은 그것에 더해서 평균 이상의 것들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인생의 여러 측면을 생각하면 다 아쉽고 힘든게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기 연민의 이야기는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나 그것의 정당함을 주장할 수 있다. 사는 게 힘들 때 이런 자신을 정말로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물론 그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할 테지만 나는 그것만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진짜 위안은 결코 이런 식으로 도달될 수 없다. 진짜 위안은 타인으로부터 오는게 아니라 스스로 도달하는 것인데 그 핵심은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며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긍정하는데 있다. 즉 다리가 없고, 아내가 바람나고, 자식이 나를 배신하고 하는 식의 정말로 비극적인 일들이 있더라도, 내가 비루하고 모자라고 흉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들만 계속 일어나고 있더라도 나는 가치있는 삶을 살았고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긍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쉴 수 있는 위안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가치있는 삶을 살고, 진정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런 마음 상태가 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길은 하나가 아니고 사람마다 다르다. 하나 일 수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 그 길은 그냥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고 우울증약을 처방받는 것일 수 있다. 당신의 몸이 아파서 그런 마음가짐이 되는 것을 어떤 명상이나 깨달음으로 해결하려고 해봐야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길은 그냥 이런 저런 생각하지 말고 자기 일상에 집중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보다 당장 내게는 풀어야 할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즉 자기의 내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코 앞의 문제를 풀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다. 뭐든 열심히 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느끼고 배우는 것이 있다. 그리고 언젠가 뒤를 돌아 보았을 때 그때는 도대체 뭐하러 그렇게 자기 연민에 빠져서 허우적 대고 있었는가 하고 허망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이 바뀌는 것의 근본에는 아마도 자신의 성실함을 스스로 뿌듯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 길은 또한 철학의 길일 수도 있다. 자기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자기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못생긴 것이 한이되고 컴플렉스인 사람은 그 점에 대해서 민감해 하지만 말고 못생김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해 볼 필요가 있다. 나라는 못생긴 사람을 관찰하고, 그것을 스스로 관찰자로서 묘사해 보면서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나는 왜 못생겼을까라는 것을 한탄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들이 나를 못생긴 사람으로 여긴다면 나야 말로 못생김의 전문가이니 그 못생김에 대해서 연구해 보자는 태도다. 못생김이란 무엇인가하고 질문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못생긴 사람도 보고 잘 생긴 사람도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못생김에 대해 남들보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아는 것같은 마음이 들면 그때는 못생김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르는 것은 두려워한다. 하지만 아는 것은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은 대개 아직 일어나지않은 것에 대한 기대와 공포에서 나온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젊었던 시절 자기연민의 마음이 있었다. 외롭고 작게 느껴지고 이대로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채 영영 행복할 수 없을 것같은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일 때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이 모두 미워진다. 나를 힘들게 하는 세상도 밉지만 이렇게 보잘 것없는 나자신도 미워진다. 누구에게도 변명할 수 없게 나는 정말 모자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 있어서 그런 마음가짐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들 중에서 지금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한권의 책과 하나의 생각이다. 그 한권의 책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라는 책이었는데 이 책은 물론 좋은 책이지만 이 책 자체가 어느 다른 책보다 뛰어나서라기 보다는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던 것같다. 그것은 일종의 구도자로서의 나다. 즉 나는 어떤 질문을 쫒아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이 나의 여러가지 행동을 설명할 수 있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 책의 주인공의 삶을 보면서 객관적으로는 나와 많이 다르지만 어떤 공통점을 느낀 점에서 그랬던 것같다. 내 인생의 질문내지 목표를 찾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많은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게 된다. 남들의 기준이나 생각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하나의 생각이란 바로 나도 세상 사람들도 유한하다고 하는 생각이다. 나는 때로 근사한 생각도 하지만 나는 동시에 한 마리 짐승이다. 그리고 이같은 것은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다. 그들은 언제나 옳을 수가 없고, 언제나 사려깊을 수가 없으며, 본인의 의지나 생각에 상관없는 내부적 욕망에 시달리고, 인간이기에 이런 저런 주변 상황에 흔들린다. 우리는 많은 것들에 의지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간다. 이 말은 그런 의지가 없이는 우리가 제대로 살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라는 것을 세상의 모든 것에 의지하지 않는 어떤 순수한 나로 생각한다면 나는 정말 보잘 것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나도 완벽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완벽하지 않다. 그것에 충격을 받지는 말아야 하고, 그것을 경멸하지도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만큼이라도 멀쩡한 것을 대견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가 배고픈 개앞에 먹이를 두면 그 개가 그 먹이를 삼킬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 개를 탓하기 보다는 먹이를 그 앞에 둔 우리 자신을 탓한다. 개가 먹이에 뛰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인간은 개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개가 아닌 것도 아니다. 우리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어리석은 스스로를 한탄하거나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원래 그렇다. 다만 그 이상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다. 우리는 마치 말을 탄 사람처럼 스스로를 달래면서 앞으로 달려갈 뿐이다. 우리가 본래 이미 짐승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 마땅한데 아직도 짐승인 것을 보니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실패가 있었고 나쁜 일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 너무 깊은 상처를 받지는 말아야 한다. 그럼 뭘 기대했던 것인가? 내가 완벽한줄 알았고 다른 사람도 완벽한줄 알았다는 말인가? 우리는 되도록 미친 개를 피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살다가 보면 피할 수 없는 곳에서 미친 개를 만나게 된다. 

 

우리가 유한하다는 생각은 자기 연민의 이야기를 뒤집는다. 나에게 있었던 불행과 아픔은 특이한게 아니다. 세상이 완벽했다면 그런 일이 없었어야 하겠지만 세상도 사람도 완벽하지 못하기에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세상은 본래가 질서가 있는게 아니고 무질서가 본래의 상태인데 거기에 우리가 노력을 해서 질서를 만든 것이다. 없는 것에 분노하기보다는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대개 공짜로 주어진다. 예를 들어 이 글을 나는 한글로 쓰고 있다. 세종대왕을 비롯해 한글을 지키고 보급해온 분들 덕분이다. 나는 거기에 하나도 기여한 바가 없다. 하지만 내가 한글을 알고, 그걸로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지금의 내가 되는데 있어서 정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내가 지금 정도의 삶을 가지기 위해서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호의어린 도움이 있었다. 나이가 좀 들면 그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가 차별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그걸 막아주고, 누군가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그걸 막아주며, 누군가가 어리석어서 큰 시간낭비를 할 수도 있었는데 너그럽게 넘어가 준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면서 내가 했다고 티도 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모두가 서로 서로의 뒤를 봐주기에 사람들의 삶은 특히 어리고 경험없는 사람들의 삶은 부드럽게 진행된다. 

 

모두가 각자 단 한번 뿐인 인생을 사는 것이고 고맙게도 우리가 가지게 된 기회들이 있다. 우리는 그걸 고맙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내가 먹지 못했던 화려한 음식들을 떠올리며 불행해하기 보다는 이제까지 먹을 수 있었던 맛있는 음식들을 떠올리며 그걸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이 말은 자기 만족에 빠지라는 말은 아니다. 스스로를 완벽하지 못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 스스로를 완벽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에 우리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 조금은 더 괜찮은 사람이 될 희망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