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내가 학부에 다니던 1980년대의 끝자락에도 이 질문이 있었다.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학생의 것인가? 교수의 것인가? 재단의 것인가? 교직원의 것인가? 각각의 주체는 쉽사리 대학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을 비핵심적인 것으로 여긴다. 예를 들어 학생, 교수와 재단은 교직원을 대학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교직원은 대학은 그냥 자신의 직장이고 학생, 교수, 재단은 오히려 비핵심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결국 이 직장에서 계속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라는 것이다. 재단은 대학을 자본주의 사회속의 한 기업과 다를 것이 없게 여긴다. 물론 일반 기업과는 다르지만 이라는 말을 붙이더라도 결국은 개인의 재산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은 재단의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일일이 나열하면서 그 모든 이야기들이 옳은가 그른가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나이가 좀 더 든 지금 되돌아보면 이 모든 이야기에는 핵심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하고 싶다.
내가 말하는 핵심이란 대학은 뭘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대학은 그냥 사기업과 다르다. 교육과 연구의 중심으로서 사회적 투자를 받아서 운영하는 곳이다. 국립대학이건 사립대학이건 마찬가지다. 그 투자는 돈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사회적 존중도 있다. 즉 대학의 권위를 인정해 주니까 대학이란 곳이 유지되는 것이다. 대학졸업장이나 대학교수라는 직함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니까 대학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투자는 뭘 위한 것인가? 물론 교육과 연구를 위한 것이지만 그 교육과 연구는 그럼 뭘 위한 것인가?
대학의 존재 이유가 단 하나뿐일리는 없지만 그 핵심적 존재이유는 근대의 미래 비전에 있었다. 전근대를 끝내고 근대로 오면서 사람들은 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건축물처럼 인식하기 시작했다. 과학도 그러하지만 국가도 그러하다. 그 하나의 거대한 기계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 준다. 그러니까 더 좋은 기계를 더 좋은 시스템을 만들면 더 좋은 세상이 오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 지식도 필요한 것이고 사회 개혁도 필요한 것이다.
이런 근대의 비전에서 대학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수단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더 좋은 세상이란 인간의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고 대학은 그 지식을 집대성하고 생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대학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가장 진보적인 곳, 지식의 최전선이 된다. 그래서 대학은 소중한 것이고 대학이 미래인 것이다. 교육도 교수도 대학경영도 그걸 위해 존재해서 가치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대학생들이 대학에서 꿈꿨던 것도 이런 것이다. 그들이 열심히 책을 읽었던 것도 이걸 믿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대학의 가치는 오늘날 사라졌다. 대학이 지식의 최전선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지식이 모든 인류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크게 희석되었다. 대학 교육은 본래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는데 오늘날의 대학은 그저 취업학교가 되어서 개인의 이익을 위한 곳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대학에서 인문학이 힘을 잃어가는 이유는 바로 대학의 정신을 담당하는 부분이 필요가 없어져서다.
이는 딱히 누군가 한 사람의 잘못은 아니기는 하다. 세상이 복잡하고 다원화 되면서 근대의 비전은 힘을 잃었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더 크고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면 그게 더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믿기 힘들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가치에 따라 돈이 행복을 만들어 준다는 것은 믿는다. 그러니까 대학은 더 많은 돈을 벌어주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개인의 취업도 취업이지만 교수의 연구도 그게 얼마나 사회에 큰 돈이 될 것인가에 촛점이 맞춰진다. 어떤 연구가 중요하다고 하면 당장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돈이 되는 거냐는 질문이 당장 던져진다. 다른 누구보다 언론이 이렇게 질문하는 일에서 앞장서고 있다.
그래서 대학은 사회속에서 더이상 가장 진보적인 곳이 아니게 되었다. 이는 20세기때와도 전혀 다른 것이다. 1980년대에만 해도 대학생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공부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그건 이데올로기 과다인 것처럼 보일테고 그런 면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나는 딱히 없다고 믿는 사람이 가장 이데올로기적일 수도 있다. 즉 오늘날의 사람들이야 말로 황금만능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그걸 당연한 것으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대학의 연구가 가장 첨단이 아닐 때 대학은 힘이 없을 수 밖에 없다. 그걸 잘 보여주는 것이 AI 연구다. AI 연구도 물론 대학중심으로 학계중심으로 행해져 왔지만 워낙 돈이 많이 드는 것이라 대학 바깥에서 구글이 아니더라도 오픈AI같은 대학 바깥의 회사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나는 심지어 정신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대학이 중심역할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오늘날 대학 교수가 가장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인가? 복잡해지기만한 시스템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은 아닌가? 테뉴어를 따고 교육을 위한 잡일을 하기 위해 바빠서 사회의 미래라던가 인류의 미래따위를 생각할 여유는 없는, 그런 엄청난 야심따위는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아닌가?
대학이 살기 위해서는 대학도 기업처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나는 이같은 주장을 교회나 절이 살려면 교회나 절도 기업처럼 운영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보다도 못하다. 왜냐면 종교 시설은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이 비교적 분명하기 때문에 기업화를 하더라도 최소한의 틀은 유지하기 쉽기 때문이다. 종교 시설의 경계를 개방하고 그 안으로 뭐든지 들어오게 해도 종교시설이 민주화 운동을 하는 곳이 되지는 않는다. 교인들이 모여서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최소한의 신앙심이 남아있는 셈이다.
그런데 대학이 이익을 위한 곳이 되면 그 정신이 가장 먼저 포기 된다. 돈을 버는 방법은 누가 봐도 표절인 졸업 논문을 정치가의 눈치를 보느라 표절이 아니라고 시간만 끄는 것 같은 일이다. 말도 안되는 국책사업을 말이 된다고 해주거나 말이다. 1+1 은 항상 2가 아니다. 돈이 된다면 3이라고 외치는 사람이 옳다고 해주는 것이 대학의 운영이 된다. 서양에서 전근대의 끝에는 돈받고 면죄부를 팔던 교회가 있다. 오늘날의 대학 특히 한국의 대학이 이와 다르기는 다른가? 이런 분위기라면 학생은 배울 생각이 없고 교수는 가르 칠 의지가 없을 것이다. 결국 취업학교가 되어버린 것이 현실인데 그 현실과 대학이 가지는 후광에는 격차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교수들은 모욕을 느낄 것이다. 어떤 학생들은 사기당한 기분일 것이다. 재단은 돈이 안된다고 야단일 것이다.
이걸 다 함께 생각하면 대학은 오늘날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로 쳐져서 미래로 가지 못하게 하는 곳이 되어간다. 낡은 권위와 시스템 위에서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세상이 더 좋아질 수 있다면 그건 누가 중심이 되어서 그렇게 될까? 오늘날 그 답은 시민운동이거나 기업가일 것이다. 대학교수보다 유튜버가 사회적 영향력이 더 크다. 세상을 바꿔나가는 중심이 대학의 담장 바깥에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대학은 너무 보수화, 세속화되었다. 대학이 기업처럼 움직이겠다는 생각이면 오히려 더 진보적이어야 할텐데 그냥 어설프게 돈만 찾는 것에서 멈춘다. 벤쳐기업이기보다는 대기업처럼 행세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예 세상을 바꿔버릴 새로운 산업을 찾아보던지, 세상을 혁신할 새로운 사상을 내놓던지 해야 할텐데 대학이 아직 기업에 취업하지 못한 사람들의 임시 거처처럼 변해 버린 것은 아닌가?
이게 대학도 기업처럼 운영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보수성때문이다. 언뜻 들으면 그럴싸하지만 그런 말하는 사람들치고 보수적이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즉 그들은 대학을 진짜로 개혁하기 보다는 대학 바깥의 세상을 어설프게 흉내만 낸다. 그러니 대학이 창의성을 잊을 수 밖에 없다. 창의성이 없는 대학이 세상을 어떻게 선도하는가? 기업의 하청업체가 되기를 자처하면 결국 서서히 죽을 수 밖에 없다. 기업조차도 그런 대학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도 창의성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판알만 두들기면서 권력에 아부하고 돈에 아부하면서 좋은 대학이 된다고?
대학의 주인은 누구인가? 지금이라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대학의 주인은 진보적 정신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진짜 진보다. 소위 정체성 정치라는 것이 정치를 망친다는 지적이 나온지도 한참이다. 그런 것들은 이미 힘을 잃었다. 그런 것들은 진짜 대안적 사회를 제시하지 못한다. 진짜 새로운 것을 생산하고자 하는 깨어있는 정신이 대학의 주인이다. 그런 정신이 주인 행세를 못할 때 대학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사회적 악을 행하는 도구가 될 수 밖에 없다. 악한자들에게 명분이나 주는 곳으로 말이다. 이거 딱 돈받고 면죄부 팔던 시대의 모습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