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좋은 글쓰기와 확률적 사고

격암(강국진) 2024. 11. 21. 12:55

오늘은 좋은 글쓰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적어보려고 한다. 이는 내게는 반복되는 주제인데 최근에는 그 이유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여긴다. 나는 그것을 주관적인 글쓰기와 객관적인 글쓰기의 문제라고 부르며 그 둘을 잘 나눠서 써야 좋은 글이 된다고 하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니까 시나 소설이라면 이렇게 써야 하고 논설문이나 신문에 낼 컬럼 같은 글이라면 저렇게 써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글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말하고는 한다.



주관과 객관이 정말 그렇게 분명하게 나눠지는 것일까? 나로서는 그 두 가지는 어떤 연속된 것의 양극단에 있는 이상으로 상상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주관적이라는 것이 정말로 나 개인의 내부나 마음에 의해서만 만들어 지는 것이라면 그건 내가 아무런 사회적 외부적 영향력없이 사고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내 생각이라고 하는 여기는 것도 사실은 사회적 영향이 누적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대표적이고 근본적인 사례가 언어다. 우리는 그냥 생각하는게 아니라 언어에 기반하여 생각한다. 언어를 초월한 생각이 있다고 해도 우리 생각의 상당부분은 언어에 기반하고 우리가 글을 쓰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언어로 표현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언어는 사회적 역사적 결과가 누적된 것이다. 내가 모든 단어를 스스로 만들어 쓰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나 시인은 어떤 단어를 만들거나 기존의 단어를 확장된 의미로 쓰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일부만 그런 것이지 하는 말의 전부가 그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로 채워진 다면 남들은 고사하고 자신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같이 주관적 글쓰기를 한다는 사람들 조차도 실은 어떤 객관성을 가정하고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그 글을 읽는 사람이 그 뜻을 해석할 수 없다. 글쓰기는 아니더라도 음악이나 그림도 그걸 감상하는 사람이 아는 만큼 보이는게 있다. 그러니까 초새가 날았다라고 말했을 때 아무도 초새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면 이런 문장은 뜻이 없다. 아무도 모른다면 글쓰기를 하면서 초새가 뭔지 설명을 해야 한다. 최소한 그런 단어를 쓰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 푸드덕이니 초로롱이니 하는 단어를 열심히 골랐다고 해도 그런 단어를 해석할 수 없는 개나 고양이에게 그런 말을 들려줘봐야 그런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 글쓰기를 한다는 사람도 인간의 본성에 근거해서 이건, 주변 사람들이 누구나 아는 상식에 근거해서 이건, 직접적인 설명에 의해서이건, 뜻이 전달되고 보존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객관성을 위한 장치와 계획이 필요하며 이런 것은 글쓰기의 객관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객관적 글쓰기는 무엇인가? 객관적 글쓰기의 전형은 과학 논문이다. 주어진 문장을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사실들을 제공하면서 주장을 펼쳐나가는 것을 우리는 객관적 글쓰기라고 말하고 그런 증명이 그럴듯해보일 때 우리는 그런 글을 훌룡한 객관적인 글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그런 교육을 오래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잘쓴 글을 보면 감탄하는 경향도 있고 그건 나도 그렇다. 우리는 신문 컬럼이나 사회 비판의 글을 볼 때도 이런 글들을 발견한다. 우리는 단 한줄로 이뤄진 사실 명제가 객관적으로 의미있다는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심지어 과학 조차도 절대적인 증명은 없다는 것이다. 귀납은 진리를 증명하지 못한다. 의미는 사실이 놓여진 유한한 문맥에서 나온다. 그나마 과학 이론의 경우는 매우 엄밀하게 이론을 구성하고 매우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증명한다. 반면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속에서 구성하는 경제, 사회, 교육, 의료등 여러방면에 대한 이론은 결코 과학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런 이론들은 개념적으로 불확실해서 과학적 검증이랄 것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산처럼 긴 증명을 달아도 그것만으로 그런 주장이 과학적 증명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나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교육과정에 대해서 누군가가 아무리 많은 경험과 증빙 자료를 가지고 어떤 간단한 주장을 증명하려고 해도 그런 증명은 과학적 증명같은 것이 아니다. 진짜 과학에 가까워질 수록 어차피 의미는 사라진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아니 왜 생각이란 걸 하는가? 어차피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첫째로 증거들이 뭘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 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증거들은 우리의 생각이 전개될 방향과 영역을 어느 정도 제시해 준다. 둘째로 그런 글을 쓰고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뭘 원하는 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생각을 정리해서 우리가 얼마나 뭘 알고 있는지 우리가 뭘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댓가를 치뤄야 하는 지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한 느낌을 가질 수가 있다.



이런 사고는 확률적 사고라고 불려야 한다. 확률적 사고는 마치 오늘의 구름 모양이 내일의 비를 100% 증명할 수 없듯이 뭘 증명할 수 없다. 제 아무리 오늘의 기상상황에 대한 정보를 많이 끌어모아도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먼저 우리의 관점이 확률적이란 것을 받아들이고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데 모든 힘을 쓰는게 아니라 어느 정도 예측을 한다음에는 그에 기반해서 뭘 할까, 어떻게 그것에 대처해야 할까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둑을 보자. 바둑같은 게임은 항상 다르게 전개된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의 상태를 기반으로 미래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바둑의 규칙을 명확히 알면 그렇다. 글쓰기와 생각은 바로 우리가 지금 관련된 상황을 게임으로 여기고 그 게임의 제약조건과 규칙을 명확히 하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뭘 원하는 가를 확인하는데 도움이 된다. 어떤 바둑판의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이 바둑을 이길 수 있을까 없을까를 100% 예언하는 일이나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이기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일이다. 그러니까 정책이든 교육이든 개인의 삶이든 우리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를 다시 점검할 때까지는 의지를 가지고 일을 해내겠다는 생각을 해야지 법칙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과학적 사고를 기반으로한 지금의 교육은 우리로 하여금 얼치기 예언자가 되도록 교육시킨다. 마치 미래는 충분히 많은 자료만 있으면 정확히 예언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수동적으로 그 미래를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인 것처럼. 그래서 누군가가 부정할 수 없게 여러가지 사실들로 채워진 글을 쓰면 참 훌룡한 글이다, 아주 배부르게 많은 사실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라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글을 다시 되돌아 보라. 모두 그런것은 아니지만 그런 훌룡한 글을 의지와 확률의 눈으로 보면 생각보다 보잘 것없는 경우가 많다. 먼저 객관적이 되려고 하는 시도때문에 그런 글에는 종종 이것이 좋다라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어서 나는 모른다라는 말을 길게 한 것이거나 무슨 여론조사결과를 발표하는 것같은 것일 때가 많다. 즉 엄청나게 많은 사실들을 나열하며 그저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참 균형잡힌 의견이고 이해를 깊게 하게 되었다라고 말할 지 모르지만 그런 글이나 이해는 종종 도움이 안된다. 병원에 갔는데 가능한 병명만 죽 늘어놓는 식이다. 우리가 원하는것은 이것은 백혈병이라는 100% 확실한 진단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백혈병일 확률이 80%로 가장 높다는 진단이다. 그런데 머리속만 복잡해졌지 생각해 보면 생각이 정리되는게 없는 것이다. 왜냐면 내 생각과 의지가 없어서 그렇다.



객관적인 글이 위험해 지는 또 다른 경우는 그것이 아주 훌룡하게 뭔가를 증명하는 경우다. 즉 100%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원하는 우리에게 그런 증명을 주는 경우다. 말했듯이 이런 과학적 증명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사회나 삶에 대해서 말할 때는 드물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이게 확실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위험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객관과 주관의 구분은 인위적인 것이고 우리는 과학적 사고가 아니라 확률적 사고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할 때 사실과 의견을 잘 구분해서 쓰는 글은 사실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 사실의 선택도 의견에 따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확실한 사실의 나열도 의지와 의견을 말하는 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좋은 글은 어떤 글일까? 그건 경우에 따라 다르다. 나는 주관적 글쓰기나 객관적 글쓰기가 궁극적으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극한의 경우에 해당하는 글쓰기들도 훌룡할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상황이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과학논문을 쓴다면 과학논문은 우리가 객관적 글쓰기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계속 쓰여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와 우리의 일상은 매우 복잡하고 빠르게 변한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이나 글쓰기는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 된다. 그것은 이제 정확한 논리적 증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확률을 위한 것이고, 게임의 법칙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의 의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미래는 게임처럼 예측불가능한 것이 되었어도 우리는 그 게임이 가지는 법칙을 보다 명확히 인지할 수는 있다. 또 예측 불가능해도 확률적 분석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불확실한 시간들을 두고 우리가 뭘 원하는지, 그 목적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나갈 것인지를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마치 내입장은 없이 객관적 사실만 기술한다는 과학 이론에서 처럼 사고를 전개해서는 안된다.



좋은 글쓰기의 방식도 환경이 달라지면 엉터리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의 교육을 정적이고 단순한 학교 안에서 받는다. 교과서에는 정답이 있고, 교과서의 내용은 시간이 지나도 잘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는 방식도 글쓰는 방식도 객관적 글쓰기의 방향으로 편향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학교바깥의 현실에서 만나는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안될 수 있다. 실제 세계는 확률적 사고를 요청하는데 계속 과학적 사고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요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는 이유가 이것때문일지도 모른다. 학교를 포함하는 사회가 권장하는 글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글이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나 독서는 언제나 가치가 있다. 단지 상황과 환경에 맞는 글쓰기가 필요하다. 상황과 환경에 맞는 사고 방식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