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글쓰기 비판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는 문자로 기록된 책이지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글쓰기를 비판하게 하고 있다. 그 비판이 무엇인가를 듣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이 시대가 구술문화가 문자문화로 전환되는 시대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때는 말하기의 방법인 수사학이 소피스트에 의해 가르쳐 지는 시대였다. 그러므로 문자 문화의 소산인 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 조차도 아직 구술문화적 전통을 어느 정도 당연시 하던 때이고 뒤집어 말하면 우리만큼 문자에 중독되어져 있지 않았던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로스에게 말한 글쓰기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다른 무엇보다 글이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글이란 마치 언제나 같은 소리를 내는 녹음기처럼 누가 읽어도 같은 말을 한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면 문자 나아가 말은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은 그것이 가르키는 것을 기억나게 하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말은 어떤가? 말도 그 자체가 진리일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말을 그대로 적은 글도 진리 일것이다.
하지만 대화는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다. 그래서 우리가 대화를 할 때는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적절한 말을 해서 상대방이 진리를 기억나게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농부의 일처럼 말하는데 제대로 된 농부란 토양을 살피고 그 토양에 맞춰서 적절한 씨앗을 적절하게 뿌릴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씨앗이 자라나서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기도 그냥 진리를 제공하는게 아니라 적절한 소통을 통해서 진리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그것이 듣는 사람의 내부에서 진리를 기억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이든 문자든 진리는 언어를 초월한 곳에 있다.
그런데 글은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가리지 않고 같은 것을 말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이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말이었어도 누군가에게는 같은 말이 오히려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말일 수 있다. 서로 다른 토양에서는 서로 다른 농사법이 필요하다.
소크라테스는 글쓰기가 사람들의 기억력을 망치게 만든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제 진리를 기억하는대신 글로 기록된 것으로 만족한다. 진리를 문자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글은 그냥 뭔가를 많이 아는 것같은 사람들을 만들어 낼 뿐이다. 글은 많은 정보를 주고 그것들을 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뭔가를 아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지만 이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오히려 진리를 망각하는 것이다. 진짜 진리는 말의 너머에 존재하면서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그걸 말할 때마다 다른 표현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림이 살아있는 것을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글은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
이같은 소크라테스의 글쓰기 비판은 현대인들이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근대화 이래 사람들의 글쓰기 나아가 사고는 객관화 보편화되어 왔다. 즉 어떤 글을 사실과 혼동하는 일을 하면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말하기나 글쓰기가 현실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완전히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말하기나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왜냐면 모든 것은 그것이 놓여진 문맥과 환경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성이 달성되기 쉬운 과학적 연구에서는 그나마 그런 사고와 글쓰기가 가능하지만 일상생활로 오면 우리의 어떤 말과 글도 그렇게 분명하게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이같은 것은 이미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습득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의 후기철학에서 지적한 바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후기 철학에서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과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언어게임'이란 개념은 바로 이것을 설명한다. 즉, 우리가 어떤 단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것은 마치 게임의 규칙을 배우는 것과 같은데, 이 규칙은 항상 특정한 삶의 형식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프다'라는 말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구체적인 상황, 즉 누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목적으로 그 말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의사에게 하는 '아프다'라는 말과 연인에게 하는 '아프다'라는 말은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와 기능을 가질 수 있다. 이처럼 언어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용되는 실천적 맥락에 따라 유동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핵심적인 통찰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점점 복잡해 져서 소위 포스트모던 하다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이제 이 세상은 어떤 보편적인 거대담론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각각의 장소마다 서로 다른 환경을 가진 곳이 되었다. 따라서 이런 세상에서 보편성과 객관성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거나 폭력적인 말이 된다. 남자가 이렇다. 가정은 이렇다. 학교가 이렇다는 단언들이 모두 그렇게 된다. 세상이 복잡해서 그렇다.
그렇다고 할 때 이것이야 말로 소크라테스가 말한 글의 문제점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할 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옳은 이야기를 절대 할 수 없다. 왜냐면 끝없이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중에서 사실을 골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자 할 때에도 그것을 듣는 사람에 맞춰서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결혼은 소중한 약속이니 그것을 쉽사리 깨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어린 아이들에게 한다면 그것은 대개 결혼은 신중하게 하고 한번 결혼하면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이혼한 집안의 아이가 들으면 그 말은 내 부모는 소중한 것을 저버린 나쁜 사람이라는 뜻처럼 들릴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혼은 개인의 선택이며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이번에는 그 말이 누군가에게는 아직 어린 아이에게 가르치기에는 위험한 말로 들릴 것이다.
결국 구술문화가 문자 문화로 전환되는 것의 정점이 객관성과 보편성을 강조하는 과학 혁명이래의 근대였다면 세상은 복잡한 AI 시대로 접근해 가면서 다시 구술 문화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즉 지금은 고정된 형식으로 보편성을 주장하면서 말하기 보다는 그때 그때의 상황과 그걸 듣는 사람에 맞춰서 소통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우리의 말들은 앞뒤 문맥을 떼고 말하면 언제든지 오해 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누가 그걸 읽을 지 모르는 글을 쓰는 것이 점점 더 쉽지 않게 되었다.
글쓰기의 의미는 우리가 그걸 누가 읽을지를 분명히 아는 경우에는 좀 낫다. 그 대표적 사례는 글쓰기가 자기 성찰의 도구로 쓰이는 경우다. 이 경우 그 글을 읽을 사람은 나 자신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글을 쓸 때 그것이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에 대해서 조금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이 경우에서도 완전한 확신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가 쓴 글을 한달이나 1년이 지나서도 읽는다. 그리고 때로 1년전의 내가 아니 심지어 어제밤의 내가 지금의 나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본인에게 글을 써도 이런 일이 생기니 타인에게 글을 쓰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누군가가 글을 썼는데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고 소통이 이뤄진다는 것은 오늘날 점점 놀라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서로 통할 수 없을 것같은 생각이 통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글을 읽고 공감하는 순간이라는 기적같은 순간이다. 그런 순간이 생기는 것은 아마도 각자 고민하는 문제들에 어떤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문제를 고민하니까 남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래서 글에 대한 공감은 고마운 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