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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라는 말의 폭력성

격암(강국진) 2025. 2. 24. 09:09

우리라는 말을 지나치게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중에서는 그 말을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다수는 자신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스스로를 민주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왜냐면 그들은 우리라는 말이 가지는 폭력성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모든 일에 우리를 집어넣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에는 중국집에 가서 식사를 시킬 때 우리 짜장면 하나 짬뽕 하나 시켜서 나눠먹자라고 말하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자라나는 세대들을 마치 천연자원처럼 생각하며 국가가 의사나 군인이나 이공계 학생이 필요하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일까지 여러 차원에서 벌어진다.

 

사소한 예에서 시작해 보자. 왜 중국집에 가서 우리 이렇게 시키자라고 하는 것이 폭력적일까? 사실 이 말 자체가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제안을 꺼내는 방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흔히 식사를 나의 식사와 그의 식사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의 식사로 여긴다. 그리고 그 우리의 식사를 어떻게 먹을까하고 생각하고 제안하며 되도록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도록 행동한다. 예를 들어 이런 제안에는 다양하게 먹어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거나 싸다거나 여기오면 이걸 먹어야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서둘러 덧붙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이 폭력적이 되는 이유는 첫째로 일단 집단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를 처음부터 꺼집어 내는 것이다. 둘째로 자신의 제안을 가장 먼저 어떤 이유와 함께 꺼집어 냄으로 해서 만약 그와 다른 의견이 있다면 나를 반박해 보라는 식으로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왜 당연하게 자신이 리더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실은 제대로된 리더도 되지 못하고 있을까? 제대로된 리더라면 사람들에게 상황을 파악할 시간을 주고 좀 더 자신을 억누르면서 제안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냥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시킬 뿐 전체적으로 식사가 어떻게 되냐는 것은 신경쓸 필요가 없게 시키는 것도 된다는 식으로 말을 해서 실제로 사람들이 의견을 낼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제대로된 리더란 독재자가 아니라 정말로 민주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다 반영될 수 있게 하는 사람이다. 발언권을 장악하고 대충 형식만 물어보는 태도일 뿐 실제로는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다. 

 

중국집에 가서 음식을 시키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진지한 분석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첫째로 이 같은 태도를 지닌 사람은 사실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이런 태도를 유지한다. 이런 태도가 지닌 힘은 절대 사소하지 않다. 이런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얽어매고 지배하려고 하며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은 남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민주적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굳이 자신의 의견을 덧붙일 이유가 없는 무수한 남의 일에 대해서 이래러 저래라하는 것은 그저 제안일 뿐이다. 그러니까 같이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혼자서 식사를 한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 꼭 이걸 먹어라 저걸 먹으라고 하고, 자신이 참석하지 않은 모임에 가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에게 모이면 이걸 해라 저걸 해라라는 말을 꼭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나중에 일이 잘못되는 경우가 있으면 그건 전부 그 사람이 자신의 제안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의 말을 덧붙인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공간을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다른 사람을 간섭하는 일은 이렇게 글로 보면 아주 자명하게 잘못된 일로 여겨질 것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는 대부분 우리라는 말 뒤에서 호의와 친절함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이런 공동체 의식은 그걸 공동체 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매우 폭력적인 공동체 의식이다. 이건 공동체 의식이라기 보다는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던에서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같은 것이다. 모두가 서로를 억누르고 지배하려고 발버둥치는 사회가 공동체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폭력적이고 공포스럽다. 오히려 서로의 독립성을 인정해서 훨씬 더 개인주의적으로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세심을 발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공동체 의식을 가진 게 아닐까? 

 

중국집의 사례가 사소하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거의 같은 형태의 행태가 훨씬 더 중요한 일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국회나 정부나 언론에서 하는 말들이 그렇다. 일단 그들은 우리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며 모든 일을 우리의 일로 만든다. 마치 모든 일을 우리의 일로 만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흩어져서 국가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없을 것같다.

 

나는 의사집단이 지난 몇년간 보인 행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며 특히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언행이 반공동체적이고 반지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에 대해서 국가 공무원이나 무슨 국가가 가진 자원쯤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언행은 지극히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의료서비스가 필요하니 의사는 일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폭력이다. 이것의 극단은 윤석렬정부에서 의사에게 일하라고 명령을 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일이다. 계엄령이후 발표된 포고령에는 정말 그런 명령을 담았다. 이게 아니라도 그렇다. 군의관이나 공보의는 병역을 마치기 위해서 일하는 것인데 왜 복무기간이 3년일까? 일반병은 18개월로 그 절반인데 말이다. 국가와 사회가 필요하니까? 집단이 필요하면 개인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 당연한가? 그렇게 안해서 사람이 죽으면 군의관의 잘못인가? 

 

그러나 의사들이여 화를 내더라도 하나는 돌아보고 화를 내자. 이땅에서 다른 이공계 사람들이 얼마나 자원취급을 당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의사들의 처우가 그토록이나 형편없는데도 어째서 이땅에서 다른 이공계 학과의 인기는 추락했고 의대의 인기는 높기만 할까? 기술 한국을 이뤄야 하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밤새고 일하고 미래도 없이 경쟁하다가 사라져간 자연계 공학계 사람들 때문은 아닌가? 

 

나는 의대생이나 이공계생이나 인문학과 학생을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라는 말의 폭력성에 있다. 중국집의 예로 돌아가보자. 문제는 너무 쉽게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 하고 그리고 나서는 발언권을 장악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군사 독재시절에는 독재자의 탐욕을 포장하는 방법으로 이런 관행이 당연시 되었지만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도 이런 폭력성은 적어도 다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정치와 언론과 재계가 여전히 이런 방법들을 쓰고 사람들을 세뇌하고 서로 싸우게 만든다. 

 

공동체는 물론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는 일을 그 핵심으로 한다. 하지만 그같은 일은 쉬운 조율하기 쉬운 일이 아니라서 일종의 필요악으로 여겨져야 한다. 즉 매우 가치있고 숭고한 일이기는 하지만 걸핏하면 우리 우리하면서 모든 일을 서로 얽매이게 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로 도와주고 협력하는 가족은 아름다운 공동체다. 하지만 많은 가족공동체에서도 우리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그 핵심에는 결국 누군가가 내것은 내것이고 네것도 내것이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일이 있다. 사람들이 각자 숨쉴 여유를 주지 않고 남자가 이렇다는 둥, 여자가 이렇다는 둥, 자식이 이렇다든 둥, 부모가 이렇다는 둥하는 식으로 서로 서로 얽매기만 할 때 가족은 폭력적이고 착취하는 공간이 된다. 

 

물론 이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질서있고 조화로운 공존으로 가기 위해서는 애정과 세심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서로 서로 짓밟고 투쟁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서 자신이 뭘 하는가에 대한 자각조차 없다. 그냥 원래 이런게 아니냐는 식이다. 둔감한 사람은 자신이 뭐가 둔감한지를 본래 모른다. 많은 경우 피해자가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 문제가 완벽히 해결된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만 이 문제를 완화하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수렵채집으로 살아가는 원주민이 문명인으로 살아가려면 공부가 필요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공부가 필요한 사람, 덜 문명화된 사람이라는 것 자체를 모른다.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