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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이 사람을 만든다.

격암(강국진) 2025. 3. 12. 09:11

사물과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두 가지 견해

 

한 명의 고립된 개인만을 생각할 때 선사시대의 수렵채집인에 비하면 현대인의 능력은 매우 제한적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익숙한 우리는 의식주를 모두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문명 사회라는 환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선사 시대 사람과 현대인은 소통을 하는 정보 채널 자체가 다르다. 선사 시대 사람들은 고작 구술언어로 소통했고 그나마도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인은 구술언어는 물론 문자언어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TV나 라디오등 전파 매체를 통해서도 소통한다.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통해서도 소통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늘날 과거에 비해 구술언어를 더 발달 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소통 채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기본적으로 현대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더 빨리 더 많은 정보를 소통할 필요가 있어서 일어난 것이다. 

21세기에 태어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도대체 무선전화기도 없이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는 지 믿기 힘들 것이다. 1980년대만해도 약속을 하고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사람이 약속시간에 오지 않아도 그 사람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모르는 곳에 가려면 지도를 펴고 연구를 해야 했다. 언제나 서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살아가고 어딘가에 갈 때는 실시간 교통상황까지 반영한 길을 찾아주는 네비를 쓰는 지금과는 다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행동반경이 좁아서 서울에 살아도 서울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면서 살았다. 가보지 않아도 거리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스트리트뷰니 로드뷰같은 것이 처음 나왔을 때는 무슨 마법같았다.  

이렇게 환경과 인간이 사회적으로 시공간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사실은 그 인간을 환경과 떼어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둘을 떼어내서 생각하는 것은 마치 뇌안의 뇌세포를 뇌에서 떼어내서 생각하고 물안의 물고기를 물 바깥에서 관찰하는 것과 같다. 뇌세포도 물고기도 그것들이 있는 본래의 장소에서 분리되어지면 더이상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현대인도 문명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면 전혀 다르게 사고하고 그들이 가지는 의미나 가치도 극적으로 변한다. 최고로 인기있는 프로축구선수도 프로 축구 리그가 없어지면 그 사람의 의미나 가치가 전혀 달라질 것이다. 

사물과 인간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철학적 접근은 크게 두 가지 패러다임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본질주의적 접근으로, 대상이 지닌 고유하고 불변하는 특성에 주목한다. 다른 하나는 관계론적 접근으로, 대상이 맺는 관계와 맥락을 중심으로 의미를 파악한다. 본질주의적 관점에서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이 가진 본연의 속성에 집중한다. 예컨대 인간의 이성적 사고능력, 의자의 앉음이라는 기능 그리고 말의 긴 다리와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체계적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 모든 존재는 그것의 완전한 원형(이데아)을 지향한다고 본다. 이는 변화하는 현상계 너머의 영원불변한 본질을 추구하는 철학적 전통의 토대가 되었다.

본질주의적 접근법의 가장 큰 특징은 대상을 독립된 실체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외부 환경이나 맥락과 무관하게 대상의 본질적 속성이 유지된다고 본다. 산소원자와 수소원자는 서로 다른 것이다. 인간과 침팬지도 물질적으로 분명하게 다른 것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DNA의 차이를 통해 그렇게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DNA를 가진 생명체가 인간이라고 우리는 인간을 정의하거나 이해할 수있다. 이러한 이해에는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나 그것이 놓여진 맥락이 인간 자체의 본질을 바꾸지 않는다는 본질주의적 주장이 포함되어져 있다. 

관계론적 접근은 대상의 의미와 정체성이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형성된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는 어떤 대상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가령 '자식'이라는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며, 역사적 유물의 가치는 그것이 특정 인물이나 사건과 맺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모차르트의 의자가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 물건 자체의 물리적 특성이 아닌, 위대한 음악가와의 역사적 연관성 때문이다. 이처럼 관계론적 시각은 의미와 가치가 관계의 맥락 속에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관계론적 의미 형성의 가장 명확한 예시는 언어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의미의 자의성과 맥락 의존성은 이를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방망이'라는 단어는 야구 경기에서는 타격 도구를, 주방에서는 떡을 만드는 도구를 지칭하는 등 그 쓰임새가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더 넓은 사회과학적 맥락에서, 마르크스의 사회관계론은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를 인간 본질의 이해에 적용한 대표적 사례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이 생산관계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역동적으로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는 인간의 정체성이 고정된 실체가 아닌, 사회적 맥락과 역사적 조건에 따라 변화하면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체성과 의미의 이해에 있어 순수 본질주의나 순수 관계론은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극단적 관점이다. 인간과 사물의 실제 존재 방식은 이 두 차원의 복합적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하지만, 동시에 어떤 본질적 연속성도 유지한다. 가령 한 의자가 집 안에서 거실용 가구로, 야외에서 정원용 좌석으로 그 맥락적 의미가 변할 때에도, 그것의 기본적 정체성은 유지된다. 다른 용도로 다른 상황에서 사용된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이 물질적으로 같은 의자라는 사실을 잊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중성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맥락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일관된 자아의식을 유지한다. 우리는 육체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환경이나 사회적 역할도 달라진 10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체성과 의미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본질주의와 관계론의 통합적인 적용이 필요하다. 

과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흥미로운 양면성을 보여준다. 과학은 그 방법론에서는 본질주의적 성향을 띠는데, 이는 통제된 실험환경(고립계)에서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상호작용을 배제하고 핵심 변수만을 다루는 이러한 접근은 과학적 방법론의 필수적 요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과학은 자신의 발견과 이론이 절대적 진리가 아닌 잠정적 설명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물질이나 시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역사적으로 변화해 온 것처럼, 과학적 진리의 진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이데아론에서처럼 말은 말이고 양은 양이라는 식으로 그 본질이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이러한 이중성은 과학이 실용적 본질주의와 인식론적 유연성을 동시에 추구함을 보여준다.

 

연결이 가지는 의미가 점점 더 중요해 진다. 

 

캐서린 헤일스는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에서 정보과학이 신체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정보과학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는 인간이라는 정보를 담는 그릇처럼 여겨진다. 모짜르트의 음악은 그걸 기록한 악보나 CD와는 다른 것이며 그런 물리적인 그릇과 그 안에 담긴 정보는 서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인간의 육체와 분리해서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업로드 할 수 있다는 발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캐서린 헤일스는 이같은 것은 인간의 지능이 인간의 육체에 의존하는 것을 무시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포스트휴먼이라는 개념을 제안하면서 인간은 이미 육체는 물론 기계와 융합된 존재로 변했으며 이것은 전통적인 인간중심의 주체성이 붕괴된 것이라고 말한다.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이 상정하는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주체가 아니고 육체를 넘어 기계와 융합된 사이보그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캐서린 헤일스의 주장을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관계론적인 접근을 무시한 것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란 어떤 블랙박스 안에 담겨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의 관계를 통해 관계론적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주장을 보다 확장할 수도 있다.  캐서린 헤일스는 인간이 기계와 융합하는 것만을 말했지만 인간은 이미 적어도 구술언어를 익히고 문자를 사용하게 된 이래 태어난 그대로의 인간은 아니었다. 모든 도구를 든 인간은 도구를 들기 전의 인간과는 다르고 따라서 지극히 간단한 도구를 쓰는 인간도 이미 사이보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술언어나 문자같은 도구는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면 이같은 도구들은 도구인 동시에 인간과 인간의 환경을 이어주는 미디어 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술언어나 문자를 사용할 때 인간의 관계론적 의미는 크게 변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태어난 그대로의 인간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의 융합에 의해서 만들어 진 사이보그라는 사실이 극명해 지는 것이다. 

순수한 관계론적 이해는 극단적이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가 순수한가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변해 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간은 적어도 문명화 이래 점점 더 주변 환경과 강하게 관계를 가지는 존재로 변해 왔다. 이것은 인간의 관계론적 의미가 점점 더 강화되어져 왔음을 의미한다. 문명인은 문명사회 바깥에서는 무능하고 무지하여 마치 물바깥으로 내놓은 물고기와 같다. 

그래서 인간은 DNA같은 물질 기반으로만 정의될 수는 없다. DNA를 가진 수정체는 엄마의 자궁이라는 환경을 거쳐야 인간으로 태어난다. 게다가 그렇게 태어난 인간도 구술언어를 배우고 문자를 배우는 등 후천적인 교육을 거쳐야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타고난 DNA를 기준으로 본질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현실적인 특성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고도로 발달된 문명사회에서는 문맹이라면 살아가기 힘들다.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역할을 하기 힘들다. 우리는 통상 인간의 이성을 인간 정체성의 핵심적 요소로 여기는데 교육없는 인간이 문명 사회속에서 이성적 존재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본질론적 이해는 관계적 이해를 끝없이 억압해 왔다. 우리는 DNA뿐만 아니라 교육까지 포함해서 인간을 다시 본질론적으로 정의하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빠진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란 인간의 DNA를 가지고 태어나서 인간 문명 사회의 교육을 받은 존재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관계론적 이해는 혼란스럽다. 우리가 우주복을 입고 저 우주의 진공속으로 던져진다고 해서 갑자기 내가 내가 아닌 존재가 되고, 내가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주까지 갈 것도 없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만이라도 우리는 우리를 어느 정도 본질론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마치 거울속의 상처럼 우리는 세상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하는 존재가 되어 자기 스스로를 말할 수 없어질 것이다. 세상과의 관계, 주변 환경과의 관계는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정되고 상대적으로 단순한 인간의 본질론적 이해에 만족 할 수 없는 것은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발전이나 사회적 변화라는 개념은 고작해야 서구의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에나 분명해 진 것이다. 그 이전에도 역사가나 고고학자들은 오랜 기록을 통해 세상이 변해 왔음을 느꼈겠지만 사회적 자연적 변화라는 것은 인간의 수명과 비교했을 때 너무 느려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그저 세상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한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태어나기를 농부로 태어났으면 농부로 살다가 죽는 것이고, 귀족으로 태어났으면 귀족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다. 환경의 변화가 없으니 관계의 변화도 드물고 따라서 관계론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이유가 적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론적 이해가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 이래 세상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빨리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한 인간의 수명 안에서도 세상은 몰라보게 변하고 있다. 또한 개인들이 전과는 다른 지역에 가서 살고, 전과는 다른 직업을 가지는 일도 많아졌으며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여러가지 사회적 역할을 하는 일도 많아졌다. 가게의 손님의 역할을 했다가 주인의 역할도 하고, 선생이었다고 학생이기도 하고, 관리자였다가 관리받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환경적 변화속에서 인간을 혹은 우리 자신을 단 하나의 보편적인 정체성으로 파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관습에 따라 본질론적으로 스스로와 서로를 파악하는 경향도 있지만 현실은 이미 우리가 끝없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바꿔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압력을 주고 있다. 

서로 다른 공간은 서로 다른 규칙을 가지며 우리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된다. 이 점을 잊어버리고 가게를 나와서도 가게 주인이나 종업원을 하인부리듯이 하면 곤란하다. 회사의 부하직원은 회사에서 부하직원인 것이지 회사의 일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나의 명령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분야에서 공과 사를 구분하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는다. 장소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이 변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아버지로서 아들을 돌봐줘야 한다는 의무와 공적인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아들을 특별취급해서는 안된다는 의무는 충돌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정체성과 의미에 대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예를 들어 디지털 혁명, 기후 위기, 팬데믹과 같은 대규모 환경 변화는 우리의 존재 방식 자체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이때 우리는 본질주의적 차원에서 '변화 속에서도 유지되는 것'을 식별하고, 동시에 관계론적 차원에서 '새로운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기존의 관습적 이해에 안주하는 것은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과 세계를 오해하게 만든다. 따라서 환경 변화의 시기에는 정체성과 의미에 대한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재검토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빠르고 복잡한 소통이 점차로 늘어나는 시대에는 관계론적 접근이 점점 더 중요해지게 된다. 소통은 사람과 사물이 가지는 의미를 바꾼다. 그리고 뒤에 설명하듯이 AI 시대야 말로 빠른 소통의 시대이며 이러한 빠른 소통으로 인해 인간과 사물의 의미가 인간의 수명이 가지는 스케일보다 훨씬 더 빨리 변하는 시대이다. 이전과는 달리 인간의 관계론적 이해가 압도적으로 중요해지게 되는 패러다임의 변화의 시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