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는 일은 왜 그렇게 힘든가.
나는 누구인가 나아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사용하는 물건들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면서도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질문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세상이 복잡하고 빨리 변하는 곳이라서 더욱 그렇다. 반대로 말하면 세상이 단순하고 변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정체성의 위기에 빠지지 않고 고민에 빠지는 일도 적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미 주어진 어떤 답으로 대답되어지고 그 대답은 의문시 되어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내가 이전에 내가 알던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세상에 살건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서 성장하고 그 기간동안에는 이런 변화를 겪는다. 그래서 7살꼬마시절부터 막연히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겪으며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설사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뭔가가 잘못되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마치 슈퍼에 가서 물건을 사고 돈을 치뤘는데 셈이 맞지 않는것같은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사춘기니 중2병이니 하는 상태가 있는 이유다. 그렇게 되면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이 더이상 이전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 사람도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이다.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성장기에나 겪던 이런 사춘기가 지속적으로 찾아올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생 직장의 시대에는 성인들은 스스로를 직업을 기준으로 정의했다. 그래서 회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직업적 자격증이 곧 나라는 생각을 하고 그런 직장에서 일하지 못하게 되는 노인이 되면 정체성 혼란에 빠지고는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프리렌서의 시대가 아닐까 싶은 정도로 점점 더 한 직장에서 근속하는 기간이 짧아지고 있으며 직장은 경력자를 원하게 되었다. 재능있는 젊은이를 뽑아서 천천히 교육 시키고 평생에 걸쳐서 회사에서 근무하게 한다는 발상은 사라졌으므로 사람들은 이제 지속적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질문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질문에 답할 때 우리는 그 답이 고정되고 시공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형태로 주어진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변한다는 것을 안다. 작년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고 엄밀하게 말하면 5분전의 나도 지금과는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우리 안에 영혼같은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공을 초월하는 본질이 있는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다. 모든 양들이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양이라는 특성을 공유한다는 식으로 우리는 자신의 본질을 찾는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스럽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작년에도 지금도 나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 가거나 우주공간에 간다고 해서 내가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우리는 대개 그렇게 믿는다. 작년에 돈을 빌려준 친구가 지금의 나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회적 관계도 가지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다. 3살 짜리 꼬마안에 있던 나의 본질은 그것이 영혼같은 거라고 여겨지던 말던 여전히 지금 내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나라는 사실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내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이렇게 시공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고정된 답의 형태로 그 답을 찾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럽다는 것이 옳다거나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환경이 단순하고 변하지 않을 때는 이러한 답변이 크게 문제가 안되지만 환경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할 수록 이런 식으로 파악한 답은 문제가 있다. 그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옳지 않게 된다는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질문하는 우리의 태도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아주 중요한 부분에 대해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답하는 방식에는 본질주의적인 방식이 있고 관계론적인 방식이 있다. 본질주의적인 방식은 내가 나를 둘러싼 환경과 상관없이 가지는 어떤 특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를 말하는 것이다. 나의 키는 180이다라는 식의 말이 그것일 것이다. 관계론적인 방식은 내가 타인이나 다른 물체와 가지는 관계속에서 나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삼성전자의 사장이다라는 말은 내가 삼성전자라는 회사와 가지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로 관계론적인 방식에서 생긴다. 세상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할 때 내가 세상과 가지는 관계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빠르게 변한다. 따라서 나는 고정된 누군가가 아니라 시시각각 다른 누군가가 된다. 식당안에서 종업원일 때는 나는 누군가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지만 일과를 마치고 다른 식당에 가면 이제는 반대로 시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된다. 학원에서는 학생이지만 직장이 학교라면 직장에 가면 선생이 된다. 이렇게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관계론적인 답은 현대 사회에서는 빠르게 변하고 같은 시간속에서도 어떤 문맥에 놓여지고 어떤 장소에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회사의 사장은 직원에게는 상사이지만 일과가 끝나고 축구시합을 할 때는 자신의 부하직원을 코치로 모셔야 하는 일개 선수일 수 있다.
우리는 이같은 것을 알지만 관습적으로 여전히 자신을 시공간적으로 변하지 않는 어떤 존재로 파악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극명한 예는 직장에서 상사이면 내 아내도 직장 부하의 아내의 상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다. 이런 사고 방식에는 관계를 고정된 것으로, 마치 조선시대의 양반과 노비같이 사람을 파악하는 태도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 한번 내 부하직원이었던 사람이 내 상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이런 습성을 가지고 자기를 파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자연히 관계적 정체성을 억누르거나 변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왜냐면 세상이 변하고 나도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파악하는 일은 어렵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는 나의 부하 비슷하게 나의 보호를 받으며 살던 찌질한 친구도 시간이 지나면 반대로 나를 보호해 줄만한 대단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젊었던 연애시절에 시작된 남녀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고 몇십년 같이 살게 되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예전의 인간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면서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관계적 정체성의 변화는 대개 환경적 변화에서 오므로 관습적 정체성의 파악은 환경의 변화를 무시하려고 한다. 그런 무시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단독으로 가지고 있다는 성질이 대개는 관계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잊는다. 재벌 3세가 자신이 돈을 잘벌었던 것은 자신의 환경이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자신이 잘나서 돈을 잘 번다는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우리가 어떤 수준의 삶의 질을 누리고 있는 것은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한국인의 문화를 배운 덕이라는 점은 쉽게 망각된다. 그러다가 외국으로 나가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처럼 나라를 잃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며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우리 인생을 떠받치는 많은 것들을 우리는 대개 공짜로 얻는다. 우리가 한글을 쓰는 것, 우리가 태어나 숨쉬는 것은 조상의 노력 덕이고 부모가 우리를 돌봐주었기 때문이다. 공기가 나빠지고 자원이 없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자연환경이라는게 존재하는 이유도 우리 조상이 그걸 다 망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그러기 전에는 그것을 무한하게 여기며 태연하게 쓰레기를 바다로 던져 넣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 어떤 시공간적으로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특성이 있다면 그건 뭔가? 그리고 그런 것이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으로 중요한 나와 세계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수많은 테두리를 가지고 주변과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는 관계는 무한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서 고민하지만 우주적 스케일에서 보면 이 지구가 없어진다고 해도 그건 티끌이 사라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시간과 공간속에서 티끌만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존재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떤 것에 대해서는 정말 소중한 존재다. 내가 아니었으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문구가 있지 않았을까? 내가 아니었으면 세상을 살 수 없었던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 내가 가진 작은 생각이 실은 문명사적으로 중요한 대단한 일의 씨앗이 되는 것은 아닐까? 스티브 잡스의 가난한 양부모는 자신들이 누군가를 입양해서 키우겠다는 결정이 이렇게 대단한 일이 될지는 몰랐을 것이다.
우리가 관계를 잊을 때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만 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과 다른 물건의 의미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된다. 왜냐면 그것들이 가지는 무한한 관계를 무시하고 앞으로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어떤 고정되고 단순화된 생각으로 다른 사람과 다른 물건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작은 부품 하나가 없어지면 비행기가 떨어지고 자동차가 멈춰설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보는 사람과 물건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를 보는 것에 실패할 때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실패한다. 마치 수렵채집인이 노벨상이 뭔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무한한 관계의 가능성 속에서 우리 자신과 타인과 우리 주변의 물건들을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므로 최대한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의미는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그래도 어떤 고정되고 제한된 시각으로 세상과 우리 자신을 바라봐서는 안된다. 세상이 변하지 않던 과거에도 그런 좁은 시각은 많은 것을 우리의 눈에서 치워버렸다. 하지만 현대 사회처럼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관계와 테두리를 잊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시공간적으로 고정되고 단순하게 관습적으로 자신과 세상을 판단하고는 한다. 그게 자연스럽다. 우리는 결국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퀴벌레가 양자역학이나 문학작품의 의미를 알 수는 없듯이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이 세상에 실재하는 위대한 관계들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열린 마음으로 노력하고 약간의 운도 따른다면 우리는 살면서 이런게 있구나 하고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도 하게 된다. 아이가 어른이 되듯이 그렇게 되고 나면 왜 쓸데 없는 것때문에 그렇게 고민했는지가 한심하게 여겨지는 그런 때도 온다.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 것은 쉽지않다. 우리가 한심하게 유한한 존재라서 그렇다. 그러나 그래서 우리는 이따금 보상도 받는다. 인간이 그런 노력을 했기 때문에 바퀴벌레는 수억년전과 다를바 없이 살지만 인간은 문화적으로 진화해서 다른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어렵지만 더 풍부하게 나와 우리와 세상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