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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격암(강국진) 2025. 3. 17. 02:01

오늘날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 이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이유는 우리가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종교에 지배되던 시대에 인생의 의미는 신의 뜻을 알기 위해서라던가, 신에게 복종하기 위해서라던가 하는 식으로 종교적으로 답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럴 수가 없다. 수 없이 많은 지식들이 인생의 의미를 그렇게 답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지금 이순간에도 종교적 답을 인생의 의미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게 납득하기 쉬운 답이 될 수 없다. 종교적 의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그 자리에 놓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이유로 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회의에 빠지고 애초에 그런 건 없다는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매우 물질적으로 동물적인 가치를 그 의미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걸 다른 식으로 말해보자면 이렇다.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이 놓여진 문맥에서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에는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그런 문맥과 경계를 발견하고 믿기 힘들다. 예를 들어 내가 받는 상은 그걸 주는 단체나 그걸 선정하는 과정이 결정하는 것이다. 내가 훌룡한 시민상을 받아서 자랑스러웠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비리와 담합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었다면 내가 그 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같을 수는 없다. 인생의 의미에도 비슷한 일이 있기 쉬운데 그것은 인생에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할 방식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시공간적으로 훨씬 큰 이야기를 요구한다. 그런 이야기는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제대로 알아내기도 쉽지 않다. 이 상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많아질 수록 증가하는데 인간의 지식은 계속 증가해 왔다. 국가에 애정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는 일은 어렵지만 국가는 누군가가 노예를 만들기 위해 만든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는 말은 이해하기 쉽다. 우리는 마치 너무 똑똑해진 바퀴벌레 같다. 바퀴벌레의 머리로는 본래 바퀴벌레의 환경을 폭넓게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애를 써도 유한한 바퀴벌레는 바퀴벌레일 뿐이다. 그런데 이 바퀴벌레가 도구의 힘을 써서 세상이 크고 복잡하다는 것을 이해할 정도로 똑똑해졌다. 그래서 사는 건 더 편해졌지만 의미를 따지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무한의 경지에서 보면 단세포동물이나 바퀴벌레나 인간이나 그게 그거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를 모르지만 또한 유한하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인생에 대한 절망이란 사실 유한한 존재가 할 일이 아니다. 뭘 알아서 인생에 대해 절망한다는 말인가? 절망도 일종의 확신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뭔가를 보고 깨닫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에 빠진다. 뭔가가 손을 뻣으면 금새 손에 들어올 것같다. 그런 상태에 빠지면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민따위는 까맣게 잊혀진다. 

 

사랑하는 이성과의 사랑이 이뤄질 것같은데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어떤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따위는 우리의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실현시키지 못한 꿈을 가지고 그 희망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맞다. 무한한 경지에서 보면 그게 다 무의미하다. 하지만 일단 희망과 꿈을 가지면 그런게 잊혀진다. 사람은 어차피 죽어서 썩는다. 하지만 꿈이 생기고 재미있는게 생기면 마치 영원히 살것처럼 인생의 의미가 명확한 하게 느껴진다. 

 

이런 꿈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나는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문명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문명의 꿈은 인간 집단 전체가 가지는 꿈이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다. 그 꿈에 따르면 우리가 뭔가를 하면 우리가 뼈져리게 느끼는 세상의 구질구질함과 험난함이 사라진다고 한다. 인간이 지금 집단을 이뤄서 지구 전체의 표면을 덮으며 하나의 거대한 문명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는 것은 마치 개미가 집단적으로 개미집을 짓듯이 인간이 이런 집단을 이뤄서 꿈을 이루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실패로 끝난 꿈이며 많은 상처를 남긴 꿈이라도 공산주의가 많은 사람을 꿈꾸게 만든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가 꿈꾸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든 꿈은 오히려 완성단계에 들어서면 시들해 진다는 것이다. 제주도에 가는 것이 꿈인 사람은 제주도에 가게 되면 희망의 절정을 지나게 된다. 박사를 받거나 취업을 하거나 회사를 세우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거나 어떤 목표를 이루는 단계에 도달하면 그것들은 이제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한번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일에 좀 더 시간을 쓰게 된다. 그럴 때 우리가 실제로 하는 것은 우리의 다음번 꿈을 모색하는것이다. 

 

지금 인간은 근대의 꿈이라고 하는 것을 완성한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300년전쯤이라면 너무나 꿈꿨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시대의 수학자이자 사상가였던 콩도르세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앞두고 인간정신의 진보에 대한 역사적 개요라는 글을 쓴다. 정치범으로 죽게되는 비참한 현실에서도 그는 그의 이상을 글로 적었다. 거기서 그가 꿈꾸고 있던 것을 우리는 실제로는 거의 이뤘다. 그가 상상도 못한 것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뤄진 꿈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근대의 비전이 이제 낡아진 것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발전에 대해서 더이상 그렇게 신나하지 않는다. 선진국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부모보다 자신들이 더 가난하다고 느끼고 아이도 많이 낳지 않는다. 문명의 전성기가 지났다는 느낌이다. 그런 문명적 우울증은 결국 경기 침체로 이어지고 여러 소시민적인 꿈도 보다 더 힘든 것으로 만든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지식인은 철학자였다. 과학과 철학이 잘 구분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철학은 힘을 잃는다. 사람들은 어느새 문학에서 희망을 찾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문학도 힘을 잃은 것같은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첫째로는 지식이 너무 많아서 꿈꾸기가 힘들고 둘째로는 문명적 비전이 이미 한계에 도달한 시대를 살고 있어서 세상 전체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희망과 꿈에 차서 살기가 쉽지 않다.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다. 다만 지금이 문명의 고비라서 그렇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비전이 출현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삶은 보다 활기찬 것이 될 것이다. 달려갈 곳을 알게 되면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필요없게 된다. 우리가 해야 할일은 우리의 유한성을 기억하고 희망에 대해서 회의적이 될 뿐만 아니라 절망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일이다. 앞일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매일 매일을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