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인간의 의미
우리가 그 끝자락을 살고 있는 근대는 전근대와 비교했을 때 하나의 해방이었다. 근대화는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일이었고, 민주적인 세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근대화는 토지에 매여있던 다수의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며 살 수 있게 만드는 일이었다. 자본주의의 시대, 시장의 시대, 직장인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현대인들은 그럼 더 이상 속박되어 있지 않을까? 이제 현대인들이 어딘가로부터 해방되어져야 한다면 우리를 가장 괴롭게 하고 있는 속박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해방되어질 수 있는가? 오늘날 현대인의 삶을 보았을 때 그들이 가지는 속박의 핵심은 객관성과 보편성을 가진 단일한 시스템이다. 현대인은 이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이미 이러한 해방은 포스트모더니스트에 의해서 거대 서사의 부정이라는 이름으로 지적된 바 있지만 달성되어진 적은 없다. 왜냐면 근대의 핵심적 사상이자 미래 비전이야 말로 거대한 시스템을 계속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반성이외에 이 근대적 문명에 대한 대안은 제시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즉 현실적인 대안은 없었다.
이 단일한 시스템의 속박이란 무엇인가? 근대화란 거대한 시스템을 구축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단일한 표준에 따라, 단일한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사실상 지구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일한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살게 되었다. 근대화의 과정은 가족같은 근대적 사회 시스템과는 다른 시스템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아서 대가족 제도가 핵가족제도로 변화하게 만들었고, 이제는 결혼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좋고 나쁜 것을 떠나서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단일한 자본주의 사회가 세상의 표준이 되어감에 따라 그것의 가치관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장에 나가서 청소를 하고 밥을 하는 것은 생산적이고 재미있는 일이며 자아실현으로 여겨지지만 집에서 청소를 하고 밥을 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또한 인간의 평가는 돈으로 하는게 점점 더 당연해 보이게 되었다. 즉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내에서의 행동과 직위만이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는 결국 별로 있지도 않은 비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인 가족과 같은 공동체 내부에서의 행동과 위치를 무의미하게 여기게 만들었다.
단일한 시스템은 더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서 각각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제공하려고 하겠지만 인구가 증가하고 세상이 복잡해 짐에 따라 그러한 노력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 같은 변화는 어느 정도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선전되지만 적어도 상당부분은 여전히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인 법이나 경제 정책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시스템이란 그 자체가 인간으로 이뤄진 것이라서 개혁은 그 안의 인간의 삶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인간의 이해 능력을 넘어설 정도로 복잡해 진 현대 사회 시스템을 더욱 만족스러운 것으로 개량하려는 노력은 이제까지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교육 시스템이나 의료 시스템에 대한 논쟁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그것이 어떤 의미있는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일 것이다. 너무나 많고 다양한 사람들의 이권과 의견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기술적 발전에 따라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개혁은 점점 더 수렁속에 빠져드는 것처럼 길을 찾을 수가 없어졌다.
이러한 근대화의 결과로 현대인들은 적어도 두 가지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하나는 영원히 계속되는 발전이란 강박으로 인해 죽도록 일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현대인은 점차 자기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의 시스템의 성장이, 또한 그 시스템 내부에서의 성장이 곧 발전이고 이 발전이 우리가 가진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것이 근대의 비전이고 논리다. 그러므로 만약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고 불행함을 느낀다면 우리는 더욱 더 열심히 발전할 수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끝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진다. 현실에 만족하는 것은 나쁜 태도이다. 왜냐면 다른 사람들은 더 좋은 미래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제자리에 서있다면 나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퇴보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 사회속의 인간이란 결국 모두가 한 방향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가고 있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경쟁에 진다면 퇴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더 빨리 뛰게 된다. 그 과정에서 도대체 이런 과정에서 무슨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가같은 질문은 사치스러운 것이다. 행복은 결국 얻을 수 없을 것같지만 경쟁에서 지면 불행은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의 격화와 시스템의 거대화속에서 결국 이런 경쟁은 대다수의 사람을 패배자, 실패자로 만드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경쟁에서 승리할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쟁의 패자는 물론 승자도 겪는 문제가 있다. 바로 자기 삶의 의미를 모르게 되는 일이다. 점점 더 표준화되어지고 거대해지는 시스템 속에서 여전히 생물학적으로는 천년전 만년전과 다를 바 없이 태어나는 인간은 이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지 못한다. 물질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내 신발과 내 집과 내 옷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제공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적으로는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주장을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물론 그러한 발전덕분에 우리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전문화를 통해 복잡한 일을 처리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우리가 하는 일을 하나 하나 시스템에게 빼앗기게 될 때 우리는 그만큼 스스로의 의미를 축소시키게 된다. 그래서 시장에서 사먹는 것이 물질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도시에서 텃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반항일 뿐이다. 현대인의 삶은 점차로 아주 가느다란 실에 거대하고 무거운 자아를 매달아 놓은 모습과 비슷해 졌다. 경쟁과 표준화덕분에 현대인의 존재의미는 점차로 단순해 졌기 때문이다. 이제 현대인의 정체성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거대한 기계가 된 사회의 하나의 부품으로서의 의미다. 즉 사람은 대개 자신이 가지는 직업으로서만 자신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빨리 남에게 자랑할 만한 직장을 찾으려고 하고 직장을 찾은 사람들은 더 좋은 직장을 찾거나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며 그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정체성 위기에 빠진다. 그런 행위들이 안 중요했던 적은 과거에도 없었지만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점점 더 순수하게 직업에서만 찾는 사람이 다수가 되어갈 수록 그런 일에 몰두하는 정도나 그것이 만들어 내는 정체성 위기는 점점 더 강해진다. 그러므로 취업을 할 수 없다던가 해고를 당하는 일은 단순히 수입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가치의 부정에 이르게 된다.
나는 일전에 시간을 낭비한 거북이라는 작은 이야기를 만든 적이 있다. 이 이야기는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시간을 낭비했다면서 자책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거북이나 고양이는 거북이나 고양이로 살면서 자신이 시간을 낭비했으며 뭔가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자책할 일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 바쁘고 충분히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을 때 자책감에 빠진다. 이러한 자책감을 모두 나쁜 것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가진 생각때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될 때 이것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근대의 억압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계속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제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느꼈다고 해도, 우리가 그곳을 탈출해서 갈 곳이 없다면 불평이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탈출 한다는 개념이 기이한 말이듯 이제까지는 이 시스템으로부터의 탈출이 그런 말이었다. 자본으로부터의 해방, 직업으로부터의 해방, 근대 사회로부터의 해방이란게 어디로 간다는 뜻일까? 그런게 있기는 한가?
일단 문명적 비판이 20세기 내내 있었지만 이러한 탈출이 이제까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은 인간의 한계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자. 확실히 과거의 사상가들이 제시한 철학적 반성을 이해하고 그에 맞춰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있다면 그런 공동체는 근대적 사회라는 틀을 벗어날 수도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세대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마치 모든 사람들이 아인쉬타인이나 칸트같은 1급 과학자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즉 그들의 문명비판과 그에 대한 대안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문명적 대안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핵심적인 것은 오히려 기술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구술언어가 발달하거나 문자가 보급됨에 따라 인간 사회는 크게 변했다. 즉 소통과 정보의 저장기술이 달라졌기 때문에 더 큰 사회, 전과는 다른 사회가 만들어 진 것이다. 가까운 예인 근대화만 해도 인쇄술의 발달과 수학의 발달이 그것을 만들어 내는 핵심적인 힘이었다. 그것 역시 소통과 정보의 저장기술이 전과는 달라졌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그 안의 사람들이 모두 천재여서가 아니라 그들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달라진 관계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살게 되었다. 수렵채집인은 누군가의 땅을 소작하는 소작인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누군가의 회사에서 일하는 샐러리맨이 되었다. 밤늦도록 일해도 그 일의 댓가는 월급날이라는 한달 뒤에 제공되며 그 댓가는 고기도 금도 아니고 전자신호에 불과한 통장 잔고지만 현대사회의 시스템을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근대로부터의 확실한 해방이란 오직 AI가 연결의 미디어로서 힘을 발위할 때만이 가능해 보인다. AI는 다른 AI는 물론, 인간, 기계, 서비스등 많은 것들을 서로 서로 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언어와 같다. 이미 우리가 친구에게 찾아갈 때 주소줄께 네비로 찾아와라는 말은 의미를 가지는 말이 되었다. 특정한 AI가 이미 하나의 어휘가 된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는 공기오염 문제를 해결하는 말로 그러면 P하면 되겠네라는 말을 할 지 모른다. 그 P는 우리가 아직 가지지 못한 어떤 AI를 포함하는 시스템이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사고는 점점 AI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나 AI가 그 자체로 해답이 될 수는 없다. 금속활자기술은 고려인들도 가지고 있는 것 이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하나의 기술이 미래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 기술이 어떻게 세상과 특히 그 안의 사람들과 연결되어지는가 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AI 기술이 인간을 해방시킬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비전이 필요하다.
구술언어와 문자의 예가 보여주듯이 그 비전이란 연결의 미디어로 작동하는 AI로 세상을 잇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은 AI와 함께 새로운 존재로 변할 것이다. 수렵채집인이 쓰고 읽기를 통해서 문명인이나 근대인이 될 때 그들은 유전적으로는 다를바가 없지만 문명적으로, 집단적으로 보았을 때는 같은 생명체라는 것이 의심이 될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AI를 통해 연결된 세상 역시 이같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연결의 비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비전이 근대의 억압을 해소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근대 사회의 시스템에서 그 구성품의 역할을 했던 것이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빛나는 설계도를 생각해 낼 이성이 있었지만 그 설계도에 따라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벽돌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시스템을 조작하고 개혁하는 일은 그 시스템이 거대화될 수록 점점 더 비현실적이 되었다. 이제는 어떤 인간의 이성으로도 더 좋은 시스템을 만들기 어려워 진 것이다. 그것을 설계하는 것이 인간일 뿐만 아니라 그 시스템의 재료가 되는 것이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근대 사회는 단순히 인간의 집단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받은 인간의 집단이다. 문맹자들의 집단이 근대화된 사회가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AI 사회는 근대인의 집단이 아니다. 그것은 AI를 사용해서 다른 인간들을 포함한 세상과 더 잘 연결되게 된 새로운 인간의 집단이다. 그것이 지금의 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AI 사회는 근대사회와 기본적으로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성숙한 AI 사회에서는 발전의 개념이 없다. 있는 것은 우리 각각이 개인으로서 혹은 집단으로서 가지는 문제가 있을 뿐이며 그 문제는 우리의 내적 상황과 환경적 조건에 따라서 발생하게 된다. 즉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화를 즐기고 싶다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며, 그러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연결되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 문제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절대적이고 보편적 지식에 도달하려고 하고 어떤 단일하고 강력한 시스템을 더욱 크게 건설하려고 하는 근대에서와는 달리 AI 시대에는 하나의 시스템이 다른 시스템을 억압할 이유가 별로 없다.
근대와 AI 시대의 차이는 마치 기차 시대와 자동차 시대와 같다. 기차 시대에는 사람들은 기차 시스템이라는 하나의 플랫폼을 통해서 물자와 인간을 실어나르고 기차역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키지만 자동차 시대는 훨씬 자유로운 연결을 통해 훨씬 더 많은 땅을 도로로 만들고 훨씬 더 중앙의 계획없는 자유로운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 물론 자동차 시대도 도로교통법과 같은 모두를 위한 규칙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기차 시대에 비하면 하나의 해방이었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몰고 자신이 원하는 어떤 방향으로든 언제나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AI로 무장한 인간은 자동차를 탄 인간과 같다. AI 에이전트는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정보 검색과 처리를 담당해주고 지금으로서는 효율성때문에 유지불가능한 시스템을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미 세상에는 p2p 연결을 통해 몇십년전에만 해도 상상에 불과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작동하고 있는데 그게 암호화폐다. AI의 발달은 그같은 움직임들을 훨씬 더 많이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아마존이나 SNS나 방송국이나 정부를 통과하지 않고 같은 게임의 규칙과 비전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새로운 시스템을 시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고 그 중에는 혁신적으로 효율적인 시스템도 나타날 수 있다. AI시대에는 스스로가 지금 느끼고 풀고 싶은 문제의 해결이 있을 뿐 발전의 개념은 없기 때문에 인간은 무한한 발전과 경쟁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리고 모두가 참여하는 단일한 시스템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 거대한 시스템안에서 삶의 의미를 잃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단일한 시스템은 아무리 거대하고 복잡해도 의미의 축소를 가져오고 억압을 발생시킨다. 반면에 AI 시대의 삶은 우리가 푸는 문제들과 과거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다른 시스템들이 수없이 공존하는 다원적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궤적이 되고 정보가 되어 물리적으로 우리가 죽어도 영원히 남아서 우리의 삶의 의미를 보존할 것이다. 즉 우리 모두는 대체가능하지 않은 데이터를 제공하는 대체가능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AI 시대에는 취업이라는 개념이 없다. 우리는 여러가지 문제의 해결에 참여하거나 그것에 참여하도록 다른 사람에게 호소할 수 있다. AI 시대에 AI를 거느린 사람들은 하나 하나가 마치 오늘날의 기업가나 자본가와 같은 삶을 살 것이다. AI가 직원의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CEO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취업이 아닌 것처럼 사람들은 취업자리를 찾는게 아니라 새로운 프로젝트를 찾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머지 않은 미래에 직장에서 해고당하거나 은퇴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정체성 위기를 겪는 일들을 기이한 노예의 습성으로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마치 현대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 충성스러웠던 과거의 시대의 노예나 노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AI 시대는 자본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킬 것이다. 물이 귀할 때에는 물을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물이 흔해지면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 된다. AI가 모든 것을 연결해 낼 수 있을 수록 중요한 것은 남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거나 괜찮아 보이는 아이디어에 공감하고 그것에 참여하는 일이 된다. 즉 그것은 창업이나 투자에 가깝다. 지금의 세상에서는 비록 아무리 멋있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도 그걸 실제로 시도해 보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본이 사람들을 속박했지만 AI 시대는 이러한 속박에서 사람들이 훨씬 더 해방될 것이다. 근대가 전근대에서 소작농을 하던 사람들을 농토에서 해방시킨 것처럼 말이다. 이미 클라우드 펀딩같은 개념이 미래가 어떤 것이 될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두 가지를 기본전제로 한다. 하나는 AI 기술이 성숙으로 향해 발전해 갈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 지는 것이다. 최근의 AI의 발전은 이같은 것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결실을 보이고 있다. 두번째는 우리가 그 AI 기술을 가장 중요한 문제를 풀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AI는 우리가 어떤 문제를 푸는가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설거지 기계로 쓴다면 AI는 설거지를 하는데 멈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AI를 근대 사회가 만든 구속을 끊고 근대인을 괴롭히는 속박을 끊어내기 위해 사용한다면 AI는 근대에 대한 대안적 문명을 제시하는 기술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그것을 향해 노력한다면 그같은 일을 이뤄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을 이렇게 부를 것이다. 해방된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