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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삶 그리고 자아 발견의 시간

격암(강국진) 2025. 4. 11. 09:51

나이가 들어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직장인이 되기 시작할 무렵쯤이면 인생에는 새로운 시기가 온다. 그것은 죽음과 삶의 시기이고 자아발견의 시간이다.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 죽음의 시기가 되는 이유는 스스로의 육체적 죽음은 멀었기는 하지만 주변에서 죽은 자의 소식이 들려오는 일이 많아서다.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젊어서 한동안은 지인들의 결혼식에 초대될 때가 많았다. 요즘에는 누가 죽었다는 말이 잘 들리고 무엇보다 나의 부모님이나 내 장인 장모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들리거나 아니면 그들의 노쇠가 심해졌음을 느끼게 되는 때가 많다. 병이 깊어져서 몸을 움직이는데 어려움을 가지는 것을 보게 되거나 치매는 아니라고 해도 정신적으로 그들이 약해 졌음을 느끼게 되는 때가 많은 것이다. 

 

죽음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단지 부모님세대의 일만은 아니다. 나는 스스로에게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같은 연배라고 할 수 있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죽음의 기운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해외여행이나 비싼 외식 그리고 사치스런 소비같은 것을 통해서 한껏 기운을 뽐내보지만 이미 예전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들은 이미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었고 심하지는 않다고 해도 어딘가에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혈압약을 먹거나 수면제를 먹는 것은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자식들이 사회로 나가면 부모는 빈둥지 증후군을 앓는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것이 일종의 성적표를 받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성적표란 우리가 잘 살았는가, 나는 잘 살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평가를 보여줄 것이다. 그것은 지난 세월을 뒤돌아 보았을 때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았던가, 남들이 보기에 칭찬할 만한게 살았던가하는 것에 대한 평가다. 이런 평가에 대한 생각이 솟아오르는 것은 인생의 겨울이 멀지 않았다는 증거다. 즉 인생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이야기가 끝나면 그 이야기에 대한 평가가 있는 것처럼 내 삶이라는 내 이야기에 대한 평가가 슬슬 생각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요즘 기준으로 생물학적 죽음의 시간은 아직 멀었다. 요즘은 90살까지 사는 것도 흔하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도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요즘의 60대는 아주 활력에 넘친다. 그러나 정말로 인생을 60부터 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단순한 객기가 있는게 아니라 삶에 대한 흥미가 넘쳐야 한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욕망을 기본으로 하는 야망에 넘친다기 보다는 세상에 대한 흥미에 넘치는게 중요하다. 어느새 대화의 내용이나 활동의 내용이 단순해 지기 시작했다면 그럴 때 남은 욕심으로 인해서 야망에 넘치는 것은 삶의 기운은 아니다.  

 

주변에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고 느끼는 것은 어느새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내 장례식에는 사람이 얼마나 올까를 걱정하기 시작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산다기 보다는 죽은 사람을 추모하고 기리며 사는 일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했듯이 생물학적 죽음은 아직도 멀고 멀었지만 사람들이 자꾸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돌아가신 분의 장지니 제사니 하는 것을 가지고 분란이 생기거나 하는 것을 보면 다 쓸데 없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지 죽어서 흙이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뼈다귀를 모시느라 아주 바쁘다. 나이가 들면 더 그렇다.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들이 그리고 여러 관계들이 조금씩 망가지는게 보인다. 그것은 성미가 조금 더 급해졌다거나 서로에 대한 관심이나 참을 성이 조금 더 없어졌다거나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육체적이기도 하다. 조금씩 먹어가는 약이 늘고, 머리는 하얗게 변해가거나 숱이 옅어지고 피부가 늘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죽음의 기운을 더 잘 보이게 해주는 것은 새롭게 사회로 나아가는 자식 세대의 봄이다. 본래 10대때가 가장 청춘이어야 하겠지만 요즘은 입시니 취업이니 해서 인생에서 가장 청춘인 때는 오히려 취업 직후무렵인 것같다.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고, 취업을 했기때문에 이제는 미래 걱정도 좀 덜하고, 돈도 생겨서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일도 계획하는 자식들의 모습은 눈부신 봄이다. 그들이 봄의 기운으로 빛날 수록 부모세대는 미약한 죽음의 기운을 더 잘 느끼게 된다. 아무래도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이 대조를 통해 더 잘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 속에서 사람들은 자아를 찾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그걸 이미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그걸 찾을 생각도 못한 채 가장 빠르게 시들고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짐승의 욕망처럼 단순한 욕망에 여전히 물들어 있다. 나이가 들만큼 들었는데도 그들은 도시속의 짐승이나 원시인같다. 평생 배우고 정신적으로 쌓은게 없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이미 젊지 않아서 몸이 정신을 이기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빠르게 시든다. 고작해야 이제까지 모아두었던 돈으로 사치를 하고 그것으로 기운을 내려고 할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이 텅 비어있고 공허하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때문에 나이가 들어서 자아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아직도 찾지 못했던 것을 이제와 찾으려고 하니 막막하고 우울하기만 하다. 책에 답이 있던, 어떤 육체적 수행에 답이 있던 그걸 해봤어야 하는 것은 훨씬 더 젊었을 때였다. 나이는 들었고, 이대로는 뭔가가 억울하고 남이 부럽기만 해서 자기를 찾으려고 해보면 그건 마치 다 큰 어른이 초등생 교실에 들어가 앉아서 구구단을 외는 모습처럼 된다. 물론 할 수 있다면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보다 젊었을 때에 해봤더라면 그 모든 것안에 답이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해보는 것을 머리가 센 노년에 시작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나 주변 사람에게나 서글픈 일이다. 답은 멀리 있지 않다. 답은 코앞에 있다. 이런 말도 세상에는 흔하다. 그러니 도움이 안된다. 

 

60을 전후한 시기는 그래서 이런 일들로 분주해 진다. 자식을 키우고 직장일로 바뻐서 은퇴를 생각하는 시기에는 그것들이 끝나면 편안하게 늙어가는 느리고 안정된 시간이 올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충격을 받는 시간이 올 뿐이다. 그들은 죽음이 보이는 고개에 올라섰는데 평생 한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거나 아예 그런 깨달음도 없어서 그냥 빠르게 쇠약해 지는 때를 맞이하게 된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말이다. 

 

그렇게 바쁘게 살았는데 왜 한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까? 왜냐면 실은 알면서도 자꾸 중요한 일은 미루고 먹고 돈 벌고 소비하고 자식을 키우고 욕망을 쫒아 바쁘게 뛰어다니는 일로 그 모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일단은 그런 걸 해놓고 나중에 시간이 나면 천천히 철학의 시간을 가지는 때도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살고 보니 정작 이제까지 한 건 다 뭘 위한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말하자면 이야기를 멋지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스텝 1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가 끝나려고 한다. 스텝 1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야기의 주제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그래서 이 시기는 분주한 시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늦어버린 마감에 맞추려는 작가나 숙제제출기한이 머지 않은 학생들처럼 마음이 바빠진다.

 

그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빈다. 그들이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기를 빈다. 그래서 서둘러 쇠하지 않고 오래 오래 살아있게 되기를, 어느 순간 진짜로 육체적 죽음이 오기전까지 살아있기를 빈다. 하지만 얼굴 가득히 죽음의 기운을 보이면서도 자신이 왜 쇠하는지를 알지도 못한 채 여전히 욕심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안타까울 뿐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삶의 기운을 가진 사람들 주변에 모여든다. 마치 좀비가 살아있는 사람을 쫒듯이.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제대로된 질문 자체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정신은 너무나 오랜동안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