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 호수길과 원주 미리내 도서관
강릉과 나는 별로 인연이 없나보다. 전부터 늘상 속초와 비교되어 어쩐지 정이가지 않던 강릉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찬찬히 강릉을 보려고 했는데 날씨도 요일도 도와주질 않는다.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계속되어 나는 강릉 이마트에서 먹을 것을 보충한 후 안목해변으로 향했다. 전부터 강릉에 오면 차박을 하던 곳이었는데 주말에도 저녁이면 차박자리가 났고 화장실도 바로 옆에 있어서 좋은 차박지였다. 하지만 비가 왔는데도 주말 오후의 안목해변은 관광객으로 가득 붐볐다. 안목해변과 나란히 밀리는 차를 따라 운전을 하던 나는 즉흥적으로 차를 돌렸다. 이런 날씨에 이렇게 관광객으로 붐비는 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차를 횡성호수길로 향했다. 횡성은 강릉에서 한시간 정도 운전하면 갈 수 있는 곳이며 내가 횡성에 도착할 쯤에는 오후 5시가 넘을 것이기 때문에 횡성에서 하는 호수길축제도 끝나갈 것이었다. 나도 축제를 좋아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좋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좋은 계절에 열리는 축제가 끝난 직후에 사람이 없을 때 횡성 호수길을 걷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고 여겨졌고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아주 옳은 것이었다. 횡성호수는 아주 멋졌다.
횡성으로 들어서니 계속 내리막길이다. 옆에는 이 길에서는 브레이크 과열로 자동차 사고가 자주 난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즉 횡성은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 속에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횡성 호수길 안내소에 도착하니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축제 참가 차들이 있고 스피커에서는 시끄럽게 트롯가수가 노래하는 것이 나오고 있었다. 이런 건 내취향은 아니다. 하지만 횡성 호수의 모습은 정말 좋았다. 나는 차를 세우고 차박준비를 한 후 저녁은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용히 있었다. 김밥과 햄버거와 맥주가 있고 넷플릭스도 볼 수 있으니 아무 것도 더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6시에 눈을 뜨고 보니 눈앞에 펼쳐진 호수위로 떠오르는 해가 보인다. 장관이다. 마음같아서는 최근에 그렇게 했듯이 당장 산책을 하고 싶지만 이 호수길은 아침 9시가 되어야 열린다. 입장료도 있다. 본래는 2천원이었는데 5월은 천원이다. 어느 쪽이건 그 돈값은 하고 나는 쓰지 않았지만 지역상품권으로 돌려주기도 한다.
여유있는 시간동안 아침단장을 하고 전화도 한군데 하면서 시간을 보낸 끝에 9시가 되자마자 호수길로 들어섰다. 횡성호수는 1997년에 생긴 횡성댐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 호수길은 횡성호수주변에 마치 반도처럼 튀어 나온 부분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바퀴 도는 호수길이 가능하다. 정확히 말하면 횡성호수길 5구간이라고 불리는 이 길은 A구간 B구간을 합쳐서 10km정도다. 하지만 진짜 호수를 한바퀴 도는 건 당연히 엄청나게 길어서 한두시간에 걸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 10km도 길은 좋지만 중간중간 물멍에 빠지다보면 3시간은 금방간다.
횡성호수길은 어제 내가 걸었던 경포호수길의 정반대였다. 구불구불하고 나무로 가리는 곳이 많았다가 갑자기 엄청난 경치를 보여주는 식이다. 게다가 이 길은 자동차 도로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매우 조용하다. 사람만 없다면 말이다. 나는 평일날 아침 9시에 가장 먼저 들어갔기 때문에 사실상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이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적어도 처음 한시간은 그랬다. 길은 감동적이리만큼 다 좋았지만 중간에 한번 쉬었던 곳에서는 정말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 그곳의 벤치에 앉아서 조용한 분위기와 새소리, 물소리 그리고 반짝이는 햇살을 보다보니 풍경을 보다가 세상의 시름을 잊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이 길에 사람들이 우글우글 댔으면 그런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축제때 안 온 것이 다행이었다.
횡성호수길을 뒤로 하고 횡성시내로 접어든다. 도서관을 찾기 위해서인데 실은 원주의 미리내 도서관으로 가기로 했기 때문에 이건 그저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횡성읍이 생각보다 번화했다. 이런 곳에서 하룻밤 지내며 도서관도 가고 식당도 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주저하는 사이에 횡성읍은 뒤로 지나가 버렸다. 횡성과 원주는 불과 2-30km 거리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횡성을 지나면 원주는 금방 나온다.
원주는 내개 무엇보다 장일순의 도시로 보인다. 장일순은 협동조합 운동도 했지만 한국에 몇없는 토종철학자로 여겨지는 사람으로 어제 읽던 대한민국 철학사에서도 논하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다. 나는 우연히 그가 번역에 참가한 노자를 읽은 적이 있는 관계로 그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언젠가 원주에도 가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렇게 원주가 코앞에 있는 곳에 왔으니 원주로 왔다. 이런 걸 보면 땅이 매력을 가지게 되는 것도 결국은 사람때문인가 보다.
원주의 미리내 도서관에 도착하니 감탄이 나온다. 미리내 도서관은 그 앞쪽의 멋진 공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도 아주 멋지게 생겼다. 도서관을 보면 책읽는 사람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가 보인다. 그래서 전주의 도서관과 강릉의 도서관이 매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의미있게 보인다. 그런데 미리내 도서관은 어느 도서관에 뒤지지 않게 아주 멋지다. 원주는 장일순으로 한포인트를 얻었는데 도서관으로도 한포인트를 얻는다.
지금 이 글은 미래내 도서관의 2층에서 쓰고 있다. 책을 검색해 보니 내 책은 인공지능에 대해 나온 책 1권이 있다. 러셀의 책은 서고에 있고 대한민국철학사는 서가에 있다. 나는 대한민국철학사를 다시 가져왔다. 이제 오후는 여기서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여유있게 보내고 다음 일정을 또 생각해 봐야할 것이다. 내륙으로 들어와서인지 날씨가 갑자기 굉장히 좋아졌다. 멋진 도서관에 온것과 함께 좋은 날씨가 나의 마음을 가볍게 한다. 어쩌면 횡성호수가 내 마음을 씻어줘서 인지도 모르겠다.
횡성호수길은 아주 멋지다. 가능하면 사람들이 많지 않을 때를 골라가보기 바란다. 횡성호수에서 큰 잉어한마디와 뱀 한마리를보았다. 요즘은 잉어보는 건 쉬운 일이지만 거대한 호수에서 본 잉어 한마리는 왠지 의미가 있어보였다. 그 잉어에게는 그 호수가 온세상일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기분좋은 오후다. 여행은 적어도 당분간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