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에 존재하는 거대한 구멍
서론: 지리가 말하는 진실
역사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중 하나는 지리를 보는 것이다. 인구는 물이 있고 토지가 비옥한 곳에 모이며, 이러한 인구 집중 지역이 곧 문명과 권력의 중심이 된다. 이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진리다. 그런데 중국사를 들여다보면 기묘한 모순이 발견된다. 오늘날 중국 인구의 상당 부분이 집중된 황해 연안 지역이 왜 수천 년 중국사에서는 '변방'으로 취급되었을까?
현재 산동성에는 1억 명이 넘는 인구가, 하북성(북경, 천진 포함)에는 1.5억 명이 넘는 인구가 거주한다. 강소성 북부와 요녕성을 포함하면 황해 연안 지역의 인구는 중국 전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농업 생산력이 곧 인구 부양력이었던 전근대 시대에도 이 지역의 인구 밀도는 높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지역은 진시황 이후 줄곧 역사의 주변부로 밀려났을까?
춘추시대가 보여주는 진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문명의 황금기로 여겨지는 춘추시대를 보면 황해 연안의 중요성이 명확히 드러난다. 춘추오패(春秋五覇)를 살펴보자. 제(齊)나라는 산동반도의 강국으로 관중의 개혁을 통해 "천하의 부"를 독점했다. 오(吳)와 월(越)은 모두 황해 남부 연안의 국가였다. 심지어진(晉)과 초(楚)도 각각 황하와 회수를 통해 황해와 연결되어 있었다.
공자가 태어나고 활동한 노(魯)나라 역시 산동 지역에 위치했다. 춘추시대의 문명 중심은 분명 황해 연안이었다. 그런데 진시황은 이 모든 문명의 중심에서 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함양(咸陽)을 수도로 삼고 "천하를 통일했다"고 선언했다. 이는 마치 덴버에서 미국 동부 해안 도시들을 정복하고는 덴버가 미국의 중심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언어가 드러내는 균열
더욱 흥미로운 것은 언어학적 증거다. 한국어, 몽골어, 만주어는 모두 SOV(주어-목적어-동사) 어순을 따르는 교착어다. 그런데 현대 중국어는 SVO(주어-동사-목적어) 어순을 따른다. 하지만 상고 중국어, 특히 갑골문과 금문, 그리고 『시경』에는 SOV 어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춘추시대 황해 연안 국가들이 사용한 구술 언어가 현재의 중국어와는 달랐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동이(東夷) 문화권으로 분류되던 제, 노 등의 국가들은 북방 언어와 유사한 어순을 가진 언어를 사용했을 수 있다. 현재의 중국어는 진한 통일 이후 서쪽 방언이 강제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역사의 주인은 누구였나
진시황 이후 중국사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패턴이 발견된다. 황해 연안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는 거의 언제나 북방 민족이 중원을 지배할 때였다.
북방 민족 지배 시기:
- 5호16국 시대(304-439): 선비, 갈족 등이 화북 지배
- 북조 시대(386-581): 선비족 왕조들이 화북 지배
- 요·금 시대(916-1234): 거란과 여진이 화북 지배
- 원나라(1271-1368): 몽골이 대도(북경)를 수도로 전 중국 지배
- 청나라(1644-1912): 만주족이 북경을 수도로 전 중국 지배
한족 왕조의 실질 지배 기간:
- 한나라: 약 200년 (후한 말기 하북은 사실상 독립)
- 당나라: 약 150년 (안사의 난 이후 하북은 반독립 번진)
- 송나라: 화북 전체를 상실
- 명나라: 1421년 북경 천도 전까지는 황해 연안 미장악
이를 합치면 2000년 중 한족이 황해 연안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기간은 5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 1500년은 북방 민족이나 그들과 융합된 정권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중원이라는 환상
전통적인 중국사는 낙양을 중심으로 한 "중원"을 천하의 중심으로 설정한다. 하지만 이는 마치 제주도가 한반도를 변방으로 규정하며 제주도의 역사를 한국사의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실제 인구와 경제력의 중심은 언제나 황해 연안이었다.
진한 제국이 관중 평원이라는 "변방"에서 일시적으로 황해 연안을 정복한 사건을 "중국의 통일"로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오히려 진시황의 제국은 함곡관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해 잠시 동쪽으로 확장했다가 불과 15년 만에 붕괴한 변방 정권에 불과했다.
권력 공백의 불가능성
비옥한 토지에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 권력의 공백이란 있을 수 없다. 한족 왕조가 이 지역을 지배하지 못했다면, 다른 누군가가 지배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선비족이었고, 거란족이었고, 여진족이었고, 몽골족이었고, 만주족이었다.
중국 정사(正史)가 한족 왕조 중심으로 서술되다 보니 이 지역이 마치 "변방"이었던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실제로는 다양한 북방 민족들이 이 비옥한 지역을 차지하고 그들의 제국을 건설했다. 원나라와 청나라가 북경을 수도로 삼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곳이 진정한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역사 서술의 전복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5천년 중국사"라는 거대 서사는 허구다. 실제로는 황하 중류의 작은 세력이 간헐적으로 동쪽으로 확장했다가 다시 축소되기를 반복한 역사일 뿐이다. 마치 로마가 지중해를 일시적으로 지배했다고 해서 지중해 연안의 모든 역사가 "로마사"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진한 제국이 잠시 황해 연안을 지배했다고 해서 그것이 "중국의 통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사는 "장안-낙양 중심"이 아닌 "황해 연안 중심"으로 다시 써져야 한다. 그곳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교류하고 융합하며 만들어낸 풍부한 역사가 있었다. 한족,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이 번갈아가며, 때로는 융합하며 이 지역을 지배했다.
결론: 거대한 구멍의 정체
중국사의 거대한 구멍은 바로 황해 연안의 1500년이다. 이 기간 동안 이 지역은 "변방"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들의 활발한 역사 무대였다. 단지 한족 중심의 역사 서술이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축소했을 뿐이다.
현재 중국이 주장하는 "중화민족"이나 "통일적 다민족국가"라는 개념도 사실은 이 거대한 구멍을 메우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황해 연안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민족들의 역사를 한족 중심 서사로 전유하려는 것이다.
진정한 동아시아사를 이해하려면 이 거대한 구멍을 직시해야 한다. 그곳에는 "야만족의 침입"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진정한 중심에서 펼쳐진 다양하고 풍부한 문명의 역사가 있었다. 이제는 낙양이라는 변방의 시각에서 벗어나 황해 연안이라는 진정한 중심에서 역사를 다시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