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9
머릿말
김대중, 노무현 민주정권 10년에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일은 -이것도 고의가 아니라 능력의 부족이었겠고 인력의 부족이었겠지만- 이땅의 미래비전을 설계하고 이끌 문화그룹도 두뇌그룹도 그들의 토대가 되어줄 물적토대도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중소기업의 성장같은 것을 이끌어낼수 있었다면 좋은 일이 아니었을까? 모든 대학들은 자신들이 중립인 것처럼 굴고 있으나 그들은 돈과 인맥과 무엇보다 학교재단의 영향하에 있다. 그걸 다 장악한 것이 어디인가. 한나라당이다. 김대중 문학이 있는가? 노무현 문학이 있는가? 다시 묻지만 도대체 개혁이 뭔가? 상식이 개혁이라는 한마디로 모든게 설명되나?
그러나 그룹이 없다는 것은 착각일지 모른다. 변화와 개혁을 만들어 온 그룹은 존재한다. 다만 그들은 아직 실체화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정체성을 제대로 정의한다면 그들은 유령이 실체가 되듯 당장에 현실이 되어 한국 사회를 바꾸어 버릴지 모른다. 이들은 아직 제대로된 이름이 없다. 이들이 내가 말하는 21세기 진보 X다.
386운동권의 문화
한국의 진보에서 거대 노조와 학생운동권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들만이 독재에 신음하고 그들만이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이 아닌데도 그렇다. 그것은 그들이 한국사회를 변화시킨 문화운동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에서 대학생들이 돌려가며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연극을 만들고 영화를 만들고 노래를 만들고 노래를 불렀다. 거대노조는 종종 그들과 손을 잡고 같은 일을 했다.
문화운동은 사회변화에서 절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지적이해를 통해, 논리를 통해 사회변화를 선택하고 그에 따르는 것이 될수는 없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우리는 모두 믿음에 근거해서 가치판단을 하고 행동한다. 지적인 사람은 보다 많은 논리와 사실을 알고 있지만 보다 예술적인 사람들은 보다 직관적인 이해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은 그둘을 적당히 섞어서 동조하고 친화성을 느끼게 될뿐이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다. 한국의 진보를 이끌어온 문화운동은 80년대 대학생들의 문화이며 60년에 태어난 모든 사람의 문화운동일까? 그렇지 않다. 이것은 그당시 운동권학생이었던 사람들의, 거대 노조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의 문화운동이다. 운동권 학생들은 기자가 되거나 연극이나 영화판으로 가서 일을 한 경우도 많다. 물론 정치가가 되기도 했으며 변호사가 되기도 했고 사업을 하기도 했다. 운동권학생들은 회사원이 되는데는 문제가 있었다. 경직화된 한국사회에서 비규격품의 인생을 살았던 이들을 잘 받아줄리가 없다.
하지만 386운동권 문화는 그 힘을 다했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이미 거의 이뤄졌으며 그들은 21세기의 복잡한 현실을 생각하기보다는 보다 단순한 세계를 상정하고 사회적 변혁을 꿈꿨다. 그들은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들은 마치 강남의 기득권처럼 한국 진보사회의 문화적 기득권으로 남아있다. 한국에서 진보를 말하려면 우리를 통과해야 한다는 식이다.한국 사회는 이 문화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각처에 퍼져있다. 좋게 말하면 그들이 한국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 왔지만 나쁘게 말하면 이 문화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한국 진보의 한계다.
21세기의 진보
지난 5년간 한국 사회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었다. 바로 촛불집회라는 것이 등장한 것이다. 이 촛불집회는 386운동권 문화의 연장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일단 연령대가 매우 어린 학생이 많다. 또한 직장인들이 아주 많은데 이들은 민주화운동에 반대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평범하게 공부하고 직장다닌 사람들이 많다. 촛불집회에서 민노당깃발이나 거대노조의 깃발, 민주당인사들은 그리 소리를 못낸다. 그들은 그 진보들에게 우리를 이용하지 말라고 한다.
촛불집회 세력은 그러나 아직은 특정분야에서만 힘을 내고 있다. 무엇보다 촛불집회를 주동하는 세력들은 모였다가는 흩어질뿐 어떤 내용을 가진 문화운동으로 번지지 못하고 있다. 문화운동은 어떤 중심 주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어설프게 민중가요를 부를뿐이다. 같지 않은데 차별화를 하지도 못한다.
이들은 참여의 능력을 보여주지만 거대노조나 학생운동권출신의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곳에 가면 그 존재감이 약해진다. 이들이 전부 적극적으로 노무현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노무현과 일정의 친화감을 느끼는 것도 이래서다. 노무현은 학생운동권출신이 아닌 정치인인 것이다. 나는 이들이 노무현대통령을 만들었고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을 만들기조차 했다고 생각한다. 진보 X는 화이트컬러 노동자에게 보다 친화적이다. 이들은 성실하게 대학을 다니고 취업준비하고 가정을 꾸려온 사람들을 존중한다. 이들은 민족이니 민주화니 하는 집단적 가치보다 삶의 질이라던가 여유같은 단어에 더 잘 반응한다.
개혁세력의 한계와 모순점
여기서 노무현이 당선되던 때로 돌아가 보자. 왜 개혁당은 열린우리당 대신 참여정부 당시 집권여당의 자리를 차지 하지 못했을까? 여러가지 이유를 각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 질문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역사가 이렇게 흘렀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수 있었을지.
개혁당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그 흐름을 전부 다 담아내지 못했다. 결국 정동영과 김근태라는 학생운동권출신의 사람들이 지지하는 사람들이 지배력을 발휘하는 열린우리당이 탄생하고 흥하고 망했다. 열린우리당은 아무런 새로운 메세지가 없었고 노무현 대통령과 계속 충돌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였다.
노풍을 일으킨 노사모들에게 물었다고 생각해보자. 현실론따위는 뒤로하고 그들이 선호하는 정당은 열린우리당의 창당이었을까? 개혁당의 발전이었을까? 개혁당이 없어지고 열린우리당에서 네티즌들을 어떻게 대접했는가? 노무현의 당선에서 네티즌들은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말해지는가.
내가 여러번 언급한 것이지만 네티즌은 지난 몇년간 몇번이나 비하당하고 공격당하고 패배했다. 패배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황우석사건, 아프칸 선교사건, 2PM사건등 사안은 수두룩하다. 항상 네티즌은 악플러로 비하당하고 미친 사람으로 비하당하고 반론권을 제한당한다.
그러나 정국을 흔들고 촛불집회를 만들어 내고 한국 사회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잠재력과 실천은 오직 네티즌들이 가지고 있고 행해왔다. 여기서 실질과 권력분포의 차이가 온다. 참여정부당시의 여당은 네티즌을 제약하고 자신들이 모든 것을 해내겠다는 식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옥외집회를 선호하고 지방으로 발로 뛰는데중했다. 네티즌이 어떻게 지지를 보이는가 하는 것은 열린우리당에서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이 탄생했다.
맺는말
한국 사회는 새로운 문화가 싹트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80년대 운동권문화가 한국 사회를 바꾸고 한국 진보의 기득권세력으로 자리했다면 새로운 한국은 이 새로운 집단, 새로운 문화운동이 구체화됨으로서 이뤄질 것이다. 진보 X가 더이상 X가 아니라 타당한 이름을 가지게 되면 그렇게 될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제대로 정의도 없어서 형체가 불분명하며 중심방향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기득권은 각자 자신의 안경으로 이들을 보기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들을 비방하고 비하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건 보수건 그들 스스로의 무능과 한계가 넘쳐나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의 정체성을 밝힐 시점은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같은 것이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하나의 주제가 되어 연극이 만들어 지고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영화가 노래가 만들어지고 책이 쓰여질때 한국은 분명히 변화할 것이다.
그런 새로운 소리를 들을때 우리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될것이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문득 알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이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21세기 진보 X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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