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랬동안 내가 권장하던 두권의 책이 있다. 그것은 닥터 노먼베순과 부분과 전체라는 책이다. 미친다라는 말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젊은 날의 나하나 만이 아닐것이다. 뭔가에 열중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바쳐서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에 도달하고 싶은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닥터 노먼베순은 대단한 감동으로 읽혀지던 책이었다. 캐나다의 폐수술전문의 노먼베순은 중국 공산혁명에 참여하다가 패혈증으로 죽은 사람이다. 나는 어린 시절 그의 전기를 읽으면서 나도 이렇게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도 자서전적인 책이다. 물리학을 전공하는 것을 지망했던 내가 어떻게 이책을 보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대학생형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형의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노먼베순 이상으로 나를 감동시키고 빠져들게 만들었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던 때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하이젠베르크를 적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하이젠베르크가 부분과 전체에서 묘사한 학창시절과 젊은 시절 그리고 그의 양자역학의 연구들에 대한 묘사들은 제발 나도 저렇게 좀 살아봤으면 하는 갈망을 가지게 만들었고 과학자가 되겠다던 나의 꿈을 더더욱 단단한 것으로 만들었다.
대학생들이 취업걱정에 시달리는 요즘은 낭만적으로 생각될지 모르나 나는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는 그야말로 학문에 몸을 바치는 심정으로 마치 어디 절로 들어가 출가하거나 수도원에 수도사로 들어가는 심정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돈을 번다거나 어떤 직위를 얻는 것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일종의 과학이라는 종교단체에 가입하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과학이 이제 나를 자유롭게 하리라. 과학이 나를 행복하게 하라라. 그런 식이었다.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두권의 책이었지만 실은 읽어본지 굉장히 오랜된 책들이기도 했고 가지고 있던 책들은 오래전에 잃어버렸었다. 한번 읽은 책은 그다지 소중히 하지 않았던 젊은 날의 바보스러움 때문이다. 그러다가 얼마전에 두권의 책을 다시 사게 되었다. 어린 딸아이에게 꼭 권해주고 읽어보라고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권해주기 전에 나는 그 두권의 책을 다시 읽었고 결과적으로는 초등학생인 딸에게 그 책들을 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어릴적에 부분과 전체를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겠다. 그 책은 역사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의미심장하고 생각할 거리가 아주 많은 책이었다. 딸아이가 나처럼 물리학자를 꿈꾼다면 이해못해도 읽으라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너무 어렵다고 중도포기할것이 뻔했다.
닥터노먼베순은 조금은 다른 이유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게 좋아만 보였던 닥터 노먼베순도 다시 전기를 읽어보니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는 분명 이룬것도 많은 사람이고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을 하기도 했지만 하나의 삶의 예로서 무조건 추천하기엔 왠지 꺼림직한 것이 있었다. 특히 어린 딸에게 말이다.
젊은 날의 광기같은 열정은 어린 시절의 나에겐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나이든 나에게는 지혜로운 삶으로만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왠지 걸러서 조금 넓은 시각을 가지고 봐야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모의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마도 어리석은 걱정일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결국 무모하게 세상을 살아갈 도리밖에는 없다. 무모한 열정이 없다면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것이다.
지금와 생각하면 시대가 소위 포스트모던적인 요즘 이전이라서 이기도 하겠지만 닥터 노먼베순도, 독일의 하이젠베르크도 절대적이고 아름다운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묘하게 서로 부합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시대가 변했다는 말이다. 요즘은 절대적인 것,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그다지 찬사받지 못한다. 파시즘같은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마도 너는 아직도 그렇게 순진하구나. 세상에 절대란 없어라고 말하는 현학적인체 하는 사람의 핀잔을 듣게 될것이다.
물론 그렇다.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그러나 클래식음악을 들으면서, 아름답고 장엄한 경치를 감상하거나 상상하면서, 무한히 넓은 우주공간에 홀로있는 나를 상상하면서, 그 책들을 다시 읽는다. 절대란 없다. 그러나 절대에 대한 열정은 아름답지 않은가. 내 가슴속에도 과거의 열정에 입은 화상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그 두권의 책은 내가 대단히 사랑하는 책으로 남아 있다.
'독서와 글쓰기 > 고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읽고 (0) | 2010.10.18 |
---|---|
정인보의 양명학연론을 읽고 (0) | 2010.08.30 |
월든의 소로가 말해 주는 지혜 1. (0) | 2010.02.12 |
윤오영의 수필집, 곶감과 수필 (0) | 2010.02.10 |
빅터 프란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0) | 2009.09.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