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인생
열두살난 아이가 총에 맞아 죽었다. 부모와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팔레스타인 아이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 꿈은 끝이나 버렸다. 아이는 비무장으로 숨어 있다가 총에 맞았다. 먼지가 펄펄나는 바닥에 시체로 누웠다. 아버지는 아이가 있으니 총을 쏘지 말라고 이스라엘군에게 소리 질렀지만 아이는 살지 못했다. 아버지의 팔은 총알을 막아줄수 없었다. 아버지도 총에 맞았다. 아이는 아버지의 팔안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아버지는 넋이 나가 버렸다. 열두살이면 이제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정도다. 그런 아이를 군인이 총으로 쏴서 죽였다.
그런데도 이웃집 유태인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가 뭘까. 공포 때문에 울고 있는 열두살난 아이를 어른이 총으로 쏴 죽이는 것에 어쩔수 없는 이란 말이 붙는 것이 가능하기는 것일까. 그 사람에게 이 열두살난 아이는 같은 사람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음식에 달려드는 파리나 공사장에 핀 민들레 같은 존재란 말인가.
유태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면 누군가를 무슨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은 차별을 낳는다. 차별이 미움과 무서운 싸움으로 번지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주 있는 일이다. 누군가를 전라도사람이라던가 경상도 사람이라던가 고참이라던가 신참이라던가 지위가 높다던가 낮다던가 명문대출신이라던가 비명문대 출신이라던가 부자라던가 가난뱅이라던가하는 한정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대단히 폭력적인 것이다. 우리는 타인과 완전히 같아 질수는 없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에 선을 긋고 불신을 키우는 것은 매우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것을 배우는데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만큼 적당한 곳도 없을 것이다.
2000년 무렵에는 팔레스타인 사람과 유태인간의 무력분쟁 때문에 사람이 특히 자주 죽었다. 그해는 2차 인디파타 즉 2차 항쟁이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 분쟁이 시작된 해였다. 우리가 살고 있던 예루살렘의 기바트 람 지역은 유태인들만 사는 유태인 거주지역이지만 베들레햄에서 불과 1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베들레헴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많이 산다. 그래서 우리는 출동하는 헬리콥터 소리며 폭발음을 종종 듣고는 했다.
우리가 거기 있었던 당시 하루는 열두살난 아이가 총격전에 갇혀있다가 총에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 티브이가 방송하여 세계적 화제가 되었다. 이유야 어찌되건 어린애의 죽음은 애도해야 하고 책임은 어른에게 돌려야 마땅할 것 같다. 설사 어린애가 뭔가를 주장하기 위해 거기 있었으며 항의한다고 해서 총으로 쏴죽이는걸 어떻게 정당화 하겠는가. 그러나 불신과 공포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배부른 이야기다.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지 않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태인을 죽일 기회를 줘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물론 격화된 양쪽간의 감정을 생각하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그런 말은 팔레스타인 사람에 대해 강력하고 잔혹한 무력진압을 실시하고 차별과 제약을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에 대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태는 더더욱 악화된다. 불신과 차별은 반복해서 서로를 키워나간다. 급기야는 사람을 죽일만큼 커지고 만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논리가 설득력을 얻는다.
이스라엘에서는 군인에게 돌을 던지는 아이들을 잡아서 팔을 부러뜨리라는 명령이 내려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웃의 한 유태인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친절하였으나 그 아이의 죽음에는 매몰찬 태도를 보였다. 한점도 애도의 눈빛이 없었다. 저 아이는 이제 영웅이 될거라고 팔레스타인사람들이 일부러 애들을 죽인다고 말한다.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상호간의 불신과 원망이 커서 상식적 인간의 반응을 넘어선 것이다. 12살난 아이를 어른이 죽이는데 합리적 이유가 있기는 힘들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도 12살난 아이이지만 팔레스타인 아이이므로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불신은 모든 것을 정당화 한다. 12살 먹은 꼬마를 총으로 쏴죽여도 그럴수 밖에 없는 일이 된다. 그들의 뒤에는 유태인을 죽이려는 테러리스트가 있다. 그아이와 우리사이에는 넘을수 없는 선이 있다. 구분하고 분별한다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기준점을 어디로 삼는가에 따라 다르지만 팔레스타인과 유태인 사이의 분쟁은 최소 백년을 지속되어 왔고 그만큼의 원한이 쌓아올려졌다. 1922년에 영국은 국제연합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는 계획을 위임 받는다. 팔레스타인지역이 어디를 의미하는가는 역사적으로 바뀌어 왔는데 영국이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무렵에는 지금의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시리아 요르단의 영역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당시 팔레스타인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은 대다수 아랍사람들이었다. 하니 이 지역에 유태인 국가를 세운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될 리가 없다. 합의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1947년 영국은 아랍사람들과 유태인간의 합의를 만들지 못했다고 말하고 위임포기를 선언한다. 이 당시 유엔은 두 개의 나라를 건설하되 예루살렘은 유엔산하의 국제도시로 하자는 안을 내놓지만 유태인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랍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은 인구 80 만명의 나라로 개국을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린다. 개국선언은 바로 주변 5개 아랍국가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때 전체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중 80%에 해당하는 71 만여명의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에서 탈출했다. 반면에 2007년까지 이스라엘의 인구는 급격히 늘어 720만이 되었다.
불신은 상호간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현대 이스라엘에서 재정적으로 무력적으로 약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권과 권리가 빼앗겨지는 사례는 아주 많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살폭탄테러로 이스라엘 부대의 공격에 저항한다.
테러가 벌어지면 이스라엘 측은 팔레스타인 인들이 살고 있는 곳에 전기를 끊고 예루살렘으로 오고 가는 통행을 막았다.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이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취급 받는 셈이다. 대부분이 일용직에 종사하는 팔레스타인 인들은 사태가 장기화되면 배고픔에 시달리게 된다. 그들은 아마도 임금을 빼앗기거나 실직 당하게 될 것이다.
평상시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차별을 받는다. 내가 이스라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팔레스타인 운전사가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한국인에게 동행을 부탁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은 휴일날 혼자 공공건물에 차를 가지고 들어 갈수 없다. 외국 사람이라도 옆에 앉아 있어야 가능하다.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라. 평생 테러하고 상관없이 한국에서 살아온 제주도 사람은 학교에 들어갈 수 없고, 옆에 어제 한국에 도착한 미국 사람이라도 서 있어야 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떤 느낌이 들까. 자신은 평생 그 땅에서 나고 자랐는데 외국인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 것인가. 지구반대편에서 온 유태인 이민자는 대단한 환영을 받고 자신은 불청객이나 강도처럼 취급을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 것인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유가 뭐건간에 자신들의 땅을 점점 잃어왔다. 브첼렘(B'TSELEM)이란 단체는 이스라엘 지역에서의 인간의 권리를 위한 이스라엘 정보 센터(The Israeli Information Center for Human Rights in the Occupied Territories)"로 1989년에 세워진 이래 인권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해 오고 있다. 이 브첼렘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현재, 예루살렘이라 말해지는 곳은 그 절반이상이 1967 당시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주로 사는 베들레헴과 웨스트뱅크에 속한 지역이었다. 예루살렘이 팽창해온 역사를 보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가능한 한 몰아내고 유태인들이 그 땅을 차지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뤄져왔다. 유태인 마을을 부지런히 건설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새로운 건물을 지을 허가를 잘 안 해준다. 불법건물을 지으면 얼른 와서 허물어 버린다. 유태인들도 불법건물을 짓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경우는 철거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 많은 지역에서 신축건물을 짓는 것은 엄격히 불법으로 되어있으며 그곳에 유태인들이 다수가 되면 그런 제약이 풀려버린다.
방송도 공평하지 않다. 예를 들어 분쟁을 단순히 분쟁이라 말하는 것이 그렇다. 대부분의 외신과 이스라엘 방송은 종종 팔레스타인 인이 저지른 자살폭탄테러를 주로 부각시키고 분쟁의 전체적 사망자수만을 보도할 뿐 그 내용을 잘 보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세부사항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분쟁의 전체사망자가 60명인데 알고보면 유태인은 2명 죽었고 팔레스타인인이 58명 죽었으며 죽은 유태인 두명은 군인이고 죽은 팔레스타인인의 상당수가 어린애라면 이야기는 단순히 분쟁이 있었다라는 말과는 전혀 다르게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브첼렘에서 2000년 당시에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측 희생자의 36%가 18세 이하 어린이와 청소년이었다고 한다. 유태인 쪽의 사망자를 보면 훗날 버스며 공공장소에서의 자살폭탄 테러가 터지기 전까지는 사망자의 대다수가 군인이었다. 결국 무력 분쟁의 초기에는 군인과 민간인의 싸움이었던 셈이다. 상호간의 사망자수 비율도 한때는 거의 30대1이었던 적도 있었다. 한쪽은 빈약한 무기나 돌멩이로 싸우고 있는데 그 불법시위에 대해 법을 집행한다던가 테러를 막는다고 하면서 탱크와 무장헬기로 공격한다. 이것은 내 기준으로는 과잉진압으로 보인다. 이런걸 분쟁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까.
2008년 현재 팔레스타인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2007년 11월의 애너폴리스 회의 이후 분쟁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립하여 종결 짓는 것으로 결정되어 졌다. 그러나 언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지 아직은 모른다. 독립이 되도 경제적 종속문제와 보상문제, 해묵은 원한 때문에 문제는 깨끗이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과 유태인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나와 너는 다르다는 말은 너무 슬프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선을 긋고 사람들에게 이런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선이나 딱지는 차별을 낳고 차별은 불신을 낳는다. 심지어 악의가 없는 친절도 누군가에게는 악의가 된다. 예를 들어 어느날 나는 이스라엘에서 자동차 수리점에 갔었다. 차를 고치는데 천불을 부른다. 그런데 내 친구가 전화 한 통화를 해주니까 갑자기 가격이 크게 깍인다. 친구니까 그렇다. 친구의 친구는 친구다. 이 친구의 친구는 나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호의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바가지를 쓴다고 생각할 것이다.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친분이 아니라 인종이나 민족적 차이가 있을 때는 무조건 대접이 다르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지역적 문화적 친분은 누군가에게는 피해의식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된다. 그 사람들은 나는 단지 친구들에게 선의를 베풀 뿐이었다고 주장할지라도 말이다.
분쟁과 불신은 반드시 나쁜 사람들 사이에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분쟁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건 유태인들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단순히 좋고 나쁜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마을에는 유태인, 이치크 같은 사람이 있었다. 이치크는 집수리가 있으면 불려다니는 유태인 만능수리공이다. 하루는 이치크가 우리집을 수리하는 날이 있었다. 우리 집을 방문한 그는 부지런히 공구를 나르고 자재를 나른다. 도와주고 싶지만 그는 자기 일이라고 말한다. 사실 손재주도 없고 뭐가 뭔지도 모르는 내가 도와주면 오히려 방해만 될 것이다.
바쁘게 움직이던 그는 아내가 준비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다가 자기가 실은 팔레스타인 동료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이 바쁘니 그 친구 생각이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일하고 있다. 그 팔레스타인 친구는 테러 때문에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그 동료는 생계가 막연한 처지다. 이치크는 예루살렘에 들어올 수 없는 팔레스타인 친구를 위해 군인들이 지키는 경계선으로 가서 경계 바깥으로 돈을 건네 주곤 한다.
그러나 그런 이치크조차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태인을 죽이려고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제약 하는 데도 동의한다. 어쩔수 없는 것이다. 팔레스타인과 유태인은 다르니까. 유태인에게 무차별적으로 보복하는 팔레스타인인이 있으니까. 일단 구분이 존재하면 불신과 미움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고 굴러간다. 그리고 불신은 결국 가장 질나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낸다.
근래에 한국, 광주에서 인근 임대아파트와 분양아파트 사이에 고소고발 사건이 벌어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분양아파트 사람들이 철책을 만들어 임대아파트 사람들이 분양아파트 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통행을 막아버린것이다. 덕분에 임대주택 아이들은 아파트단지를 빙돌아서 움직여야 한다. 어느쪽이든 자기 할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을 긋는 것의 위험함이 너무 쉽게 무시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집단으로 그런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슬프고 섬뜩한 일이다. 철책을 만들어 우리 만의 천국을 만들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거 아닐까.
우리나라도 보다 부자가 되면서 빈부격차가 늘어나고 있다. 그것이 나라가 보다 부자가 되면서 생기는, 어느정도 자연스런 일이라고 해도 그런 차이가 생겼을 때 그 차이를 잘 극복하고 함께 잘살아갈수 있는 사회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즉 한국이 여러종류의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라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잘 살아갈수 잇는 사회인가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르면 쉽사리 선을 긋고 차별을 하는 나라라면 그렇게 될수 없을 것이다. 옷만 잘입고 차만 크면 갑자기 대우가 좋아지는 사회라면 그렇게 되기 힘들것이다.
미국의 빈부격차는 한국보다도 크다. 그러나 한국처럼 지위와 가진 것 많이 따지고 체면차리는 사회에서 빈부격차에 의한 상대적 박탈감은 오히려 훨씬 더 클지도 모른다. 그걸 단순히 한국사회에서 누가 돈버는걸 배아파 하는 것이라 할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가진 것 없고 사회적 지위가 없으면 멸시감을 느끼고 미국에서는 없어도 당당하게 살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에서는 더 큰차를 타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큰 아파트를 구해서 있는 티를 좀 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한국에서 빈부격차에 의한 박탈감을 왜 그리 크게 느끼는가라고 가난한 사람에게 말할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비극에서 한가지 또 명백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비극이 구심력을 잃어버리거나 가지지 않은 사회 공동체가 가지고 오는 비극이라는 사실이다. 요즘 세상에 민족, 국가 같은 거 뭐하러 따지냐고 말을 하기는 쉽다. 그것들은 논리적 근거가 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총맞아 죽는 아이에게, 그 아이의 부모에게, 분노와 공포에 젖어있는 유태인들에게 그것은 아주 생생한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은 그들을 지켜낼 강력한 울타리, 그들을 묶어주는 내부적 질서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희생당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유태인이라는것이나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것에 신경쓰지않으며 그건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해도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한국인을 지키는 공동체가 굳건하지 않으면 한국인도 비참해 질수 있다. 우리가 피해받고 학대받아도 보호해 주는 집단이 없을 것이다. 언젠가 민족이니 국가니를 따지는 생각도 진짜로 낡은 생각이 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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