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우연히 학벌과 4차산업혁명이라는 글에 달린 댓글을 보게되었습니다. 제 블로그에 달린 댓글이 아니라서 보지 못하고 있던 글인데 그 댓글은 제가 쓴 글이 유교적 교육이 무너지고 대학이 선 예로 4차산업혁명이 학벌을 무력화시킨다고 했지만 서구에서 대학의 역사는 천년이 넘어 계속 유지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모순이 아니냐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 자신의 공부를 겸해서 약간 자료를 찾아 정리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여 서구 중세 교육에 대해 몇마디 써볼까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서구의 대학은 그 출발부터가 종교적 교육에 대항하는 기관이었습니다. 따라서 유교적 교육이 그 나름으로 발달하여 서구교육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그런 교육은 쇠하고 서구 교육기관인 대학이 들어오게 된 우리의 역사와 비교해도 모순이 생기지 않는 것이지요. 오히려 세상이 변하면 학벌이 파괴된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중세가 끝나고 비종교적인 근세가 되어도 대학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번성합니다. 원래 그런 기관이니까요.
서구의 중세란 기독교적인 시대였습니다. 즉 신학이 교육의 중심이었으며 또한 정치적 세력또한 그랬습니다. 교황이 가장 부자이자 가장 강력한 정치적 중심이었죠. 따라서 교육의 중심이 되었던 기관인 기독교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중심도 신학이었지요. 중세에서 학교가 가지는 기본목적은 성직자를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전반기에는 이교도의 개종과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위한 문답학교가 있었고 교회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대성당학교가 세워졌습니다. 또한 수도원 학교도 있었는데 이 학교도 나중에 일반아동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원래의 의도는 수도사를 기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기독교적인 시대에 교육기관이란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는 막연한 목적이 아니라 교회의 일을 돌보기 위해서는 교육받은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세력이 아니라 봉건 군주나 신흥 시민계급이 중심이 되는 시민사회가 성립하면 다른 상황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세속적 교육기관도 자연스레 자라나게 됩니다.
12세기는 서구학문에서 중대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이슬람 문화권의 지식들이 서구에 유입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에 포용한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같은 신학자들을 떠 올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 철학이나 이슬람 문화권의 지식들의 본질이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억지겠지요. 이러한 학문의 발전에 뒤이은 현상은 바로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서 일어난 중세대학의 등장이었습니다. 이 학교들은 기존의 학교들이 성장하는 사람들의 인식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최초의 대학들로 말해지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교와 살레르노 대학교 프랑스의 파리대학교등이 바로 이런 예들입니다. 결국 기독교적 세상이 한계를 들어내기 시작하자 학벌이 파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최초의 대학들은 물론 반기독교적 기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졌는가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반기독적 뿌리를 그 안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수도사나 성직자를 키우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면 다시 말해 훌룡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곧 성직자가 된다는 뜻이며 그 사회의 중심이 계속 성직자가 될 것이라면 대학은 세워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대성당학교나 수도원학교로 충분했겠죠. 단순히 나중에 지식이 점점 자라났다는 것만으로는 대학이 왜 따로 세워질 필요가 있었는지 그리고 종국에 기독교 학교는 사라지고 대학이 그들을 대체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세속화된 현대인인 우리는 기독교학교는 종교만을 가르친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종교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가능한 모든 지식을 가르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유학자도 유학을 가르친다기 보다는 진리를 가르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떠올려보면 알겠지만 성직자나 수도사도 지식인이었습니다. 기독교 학교가 모든 지식을 수용해서 그것을 신학적 틀안에서 가르치는 것이 가능했다면 새로운 교육기관은 탄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바로 유교적 교육기관이 서구적 지식을 수용해서 그 틀안에서 새로운 교육기관으로 성장하는 것이 불가능했듯이 말입니다. 그 기관의 근원을 이루는 철학적 틀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지금의 대학들이 그 틀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이겨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당장 1,2년안에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종국적으로는 새로운 교육기관이 등장할 것입니다.
사실 이미 변화는 여러모로 일어났습니다. 저처럼 물리학과를 졸업한 사람들은 처음으로 물리학과나 수학과를 없앤 대학이 나왔을 때 이미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인문학을 없애는 대학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이미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이상 대학이 아닙니다. 문제는 물리나 수학 그리고 인문학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국만 워낙 과의 구분에 아직 완고할 뿐 외국 대학은 전통적 학과의 벽이 무너지면서 대학에 아주 이상한 이름을 가진 학과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세상에 필요한 학문을 해야겠다는 시도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대학이 이러한 추세의 끝에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살아남기는 어려워보입니다.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학벌유지라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의 모든 학과가 없어지고 대학들간의 서열이 거의 없어져 버린다면 지금 서울대 특정학과를 나온 것이 그때가서 상당부분 의미가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런게 무슨 학벌입니까. 지금 와서 옛날에 경기고 유명했을 때 나 경기고 나왔었다고 자랑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의 옛날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벌파괴는 서구와 우리나라 모두에서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을 만한 증거는 상당히 있으며 서구의 대학이 천년넘는 역사를 자랑한다는 것이 이런 믿음에 대한 위협이 되지는 않습니다. 실은 서구 대학의 존재야 말로 학벌파괴의 예가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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