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10
우리는 왜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리고 바람직한 세상이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는 용납할 수 없는 몰상식한 일들이 너무 많으며 따라서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고 지금도 많은 일들에 대해 그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기에 어떤 정당에 반대하고, 어떤 사람들을 비판하며 과학이건 교육이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의견이고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정의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평등이나 자유같은 것만 해도 그에 대한 당연한 주장은 있기 힘들다. 다만 여러 사람이 공감하는 의견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공감하는 것도 당연하지는 않다. 그러기에 일본인과 한국인의 의견이 다르고 현대인과 조선시대 사람의 의견이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에서는 비키니수영복 따위가 용납될 수 없었고 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당연했으며 가문의 재산 상속을 장자중심으로 하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들이 다 사라지거나 매우 약해졌다. 법도 바뀌어 남녀구별없고 나이 구분없이 자녀들에게 공평히 재산이 상속되게 되었다. 가문의 개념이 거의 사라진 것이다. 이런 것을 후진과 선진으로 구분하고 예전 사람들은 지금보다 미개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좋은 세상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그런 세상을 만들 방법이라는 것도 없는 것인가? 인간의 역사라는 것도 좀 더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는 발전의 역사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인가?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그렇지만 역시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나의 의견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리라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서 발전과 역사의 의미가 출발할 것이다.
내 개인적 의견이란 나는 인간답게 사는 것이 더 좋으며 이 인간이란 동물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절대적 존재에게는 소돼지와 인간의 차이점도 무의미하겠지만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인간답게 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걸핏하면 인간과 짐승이 다른 점을 말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단순히 나의 개인적 의견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뭔가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해야겠지만 그것이 매우 모호한 현재의 상태에서도 이런 지적은 의미가 있다. 그건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하는 만큼 세상에 대해 불평을 할 의미도 이유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소돼지와 똑같이 사는데 뭘 불평하고 뭘 아쉬워한다는 말인가.
배고프면 밥을 찾고 아프면 우는게 본능이라고 해도 사실 짐승이 짐승처럼 사는건 짐승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가 그런 일을 불러 들인다. 절벽에서 뛰어놓고 다리가 부러지니 아프다고 우는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던져졌다고 해서 돌처럼 그저 날아갈 뿐이라면 불평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선택을 하고 뭔가 다른 결과를 만들려고 하고 있기에 불평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 그정도로 통렬히 반성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똑같이 울고 웃는 경우를 쉽게 볼 수가 있다. 도박이나 술의 유혹에 넘어가서 혹은 똑같은 연애를 반복하면서 같은 결과를 반복하는 사람의 희노애락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러므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가지는 가장 기초적인 의미는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그에 기초하여 새로운 삶을 시도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짐승의 삶에서 인간이 탈출하는 이유는 바로 이 배움의 노력 때문인 것이다.
이는 물론 정보의 기억이나 기록과 분석에 관련된 것이고 따라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에는 그 출발부터 언어나 문자 그리고 배움이 포함되어져 있다. 배우지 않고 말하지 못하며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한다면 인간답게 사는 일을 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설혹 근사한 옷을 입고 매너있게 식사를 하며 매일 같이 신문을 읽고 직장에 나가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인간답다고 할 수는 없다. 소나 돼지도 훈련을 하면 똑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다. 어떤 문화나 어떤 패러다임에 의존하지 않고 빠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에 완전히 고정되어 새로워지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인간답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사람은 그저 고급음식을 똥으로 만드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제 아무리 고상한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선생님의 말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 사람은 그저 녹음기일 뿐이다. 사람이란 말하자면 비록 시의 운률을 지키더라도 자신의 시를 짓는 시인같은 존재다. 뭔가를 그저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면 그것은 인간적인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이렇다고 할 때 좋은 세상이란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세상의 핵심에는 배움과 체험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극단적 상황에서는 인간은 짐승과 같아진다. 그러므로 기본적 복지가 있어야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가 있다. 이 복지에는 단순히 의식주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일자리가 포함되어야 한다. 사람은 단순히 배만 안고프면 되는 게 아니라 자극과 역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본인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한국의 보수정치에서 망각되고 있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그들은 해방 직후의 절대적 가난속에서 그저 고깃국먹고 쌀밥먹는 것이 꿈이었던 시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언행을 한다. 문화와 역사 그리고 철학같은 관념적인 것들을 평가절하하고 사람이란 그저 돈을 많이 벌면 그만큼 행복하다는 식의 언행을 많이 한다.
분명히 인간답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더 많이 이야기하면 할 수록 사람들의 의견은 갈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세상이라는 것의 출발점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일없이 그저 이러저러한 것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는 말만으로는 세상은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또 뭔가 다른 것을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중의 하나가 바로 기본으로 돌아가 생각을 해보고 그 기본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인간 사회는 이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그만큼 기본으로 돌아가서 그 기초를 더 확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더 복잡한 언어를 만들고 더 복잡한 개념을 만들었고 여러 사람들이 하나의 사회에서 함께 살아도 견딜만 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당시에는 후진적 사회였던 한국은 좋은 세상이 어떤 사회인가에 대해 어떤 의미로 깊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야 할 목표로 이미 선진 사회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뿌리보다는 열매쪽을 주목하는 시기였다.
이제는 다르다.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다운 삶이라는 게 뭔지를 고민해야 한다. 아니 그것을 넘어 왜 우리는 좋은 세상이라는 것을 만들어야 하는지, 그 기초부터 다시 봐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은 기초로 돌아가야 할 때다. 그래야 새로운 열매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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