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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물리학을 가르칠 수 없는 이유

by 격암(강국진) 2024. 7. 7.

과학문화는 종교 문화의 연장이 아니다. 과학이 종교로 분류되지 않는 이유는 과학은 종교와는 다른 문화적 철학적 태도로 인해서 차별을 받았고 그것을 극복한 결과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 차별의 상징이 바로 부르노다. 부르노는 우주관과 종교적 견해때문에 1600년에 화형당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다. 종교와 과학의 충돌을 중재한 것이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었다. 그의 이원론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 물질이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세상에 과학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심신이원론은 전문적인 학자들 사이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영혼이나 마음같은 단어들을 쓰면서 물질이 아닌 마음이 따로 있다는 식의 이해를 하고 있으며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논쟁하고 있다. 

 

목사는 본래 물리학을 가르칠 수 없는 사람이다. 지금은 근대철학이 세상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지도 않지만 물리학이라는 학문을 목사들이 독점했다면 물리학이라는 학문은 사라지거나 거의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되는 과학과 종교의 철학적 문화적 차이는 무엇일까? 과학은 이성의 학문이며 관찰데이터가 보여주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학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보고 듣는 것도 착각일 수 있다고 의심한다. 이는 오늘날에는 거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지식과 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던 시대에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태도였을 것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내려온 관행은 단순히 관행이 아니라 철저하게 검증이 끝나고 최적화가 끝난 진리로 여겨졌을 것인데 그것들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위험하며 무책임한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과학 시대의 초기에는 과학적 방식으로 답할 수 없었던 질문도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과학적 가설이나 이론이란 믿지 않을 이유가 많은 음모론적 가설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구가 돌고 있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체감할 수 없는가 같은 질문이 그 중 하나다. 

 

종교는 믿음을 강조한다. 과학도 마찬가지이지만 대상도 이유도 다르다. 과학은 자연법칙을 믿는다. 그 자연법칙은 수 많은 엄밀한 관찰 결과를 통해서 확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관찰의 엄밀성과 데이터의 풍부함위에서 발견된 자연법칙의 논리적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과학적 설명내지 과학적 이론이다. 종교에서는 신적 존재의 의지가 세상일에 대한 설명으로 주어진다. 종교는 신을 믿는 것에 대한 것이며 아무리 복잡한 사건이라고 해도 그것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큰 문제를 가지지 않는다. 단지 그것이 신의 의지라고 하면 되기 때문이다.

 

종교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신에대한 우리의 신앙심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데 있다. 그것이 결국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종교의 답이며 따라서 우리의 행동과 공부에 대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뭔가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고 공부하는 이유는 보다 완벽한 신앙심을 통해서 행복한 삶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것이 종교인의 태도인 것이다. 

 

과학의 주된 관심을 이것과 나란히 비교해서 말하자면 과학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자연법칙에 대한 신앙심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과학적 설명의 근원은 자연법칙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은 논리적으로 인과적으로 기초적인 자연법칙들의 조합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다. 이 신앙심을 지키는 것은 두가지인데 첫째는 자연법칙 그 자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고 둘째는 그 자연법칙들에 근거해서 계속 세상일들을 설명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는 기본법칙들에 대해 고민하거나 그것들을 기반으로 세상일에 대한 설명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계속한다. 

 

문제는 종교인에게 이러한 노력은 그다지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법칙은 인간이 발견한 것이고,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설명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은 무한한 권위를 가진 신의 행위에 비하면 틀리기 쉬운 시도일 뿐이며 무엇보다 과학이 신에 대한 신앙심을 해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그걸 증대시키는 일은 없어 보인다. 비록 자연법칙의 존재가 이 세상을 기계로 보게 만들고 그 기계의 설계자로 신을 생각하게 만든다고는 하지만 과학적 탐구로 발견하게 되는 종교가 전통적이고 관행적으로 내려온 종교들의 교리와 같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어느 시대이건 그 시대에는 충족되지 않은 욕망이 있고 불행과 고통이 있지만 그걸 해결하는 방법이 종교인에게는 과학이 아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에게는 과학적 진보가 인간의 힘을 증대시키고 그것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과학의 진보라는 너무도 힘든 일에 자신의 삶을 소모시킬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지만 과학적 연구라는 것은 마치 대서양이나 태평양을 부실한 배로 건너서 신대륙을 발견하는 일이 어렵고 위험한 일이듯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과학자들은 풀리지 않는 문제를 평생 풀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그들의 삶을 낭비해 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이 과학에 매달리는 것은 과학적 질서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학자들에게 왜를 제공한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스마트폰같은 것을 쓴다. 그들도 이미 존재하는 기술과 이미 발견된 자연법칙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그걸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인생을 던져넣을 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여기지 않을 뿐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목사는 물리학을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물리학을 가르칠 때 그들은 왜와 욕망을 빼고 가르친다. 진정한 과학자라면 지금의 과학이론들이 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법칙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미래를 생각할 것이다. 과학자란 과학지식을 외우는 사람이 아니라 과학연구를 하는 사람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건을 보면 그 사건의 과학적 설명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종교인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런 것은 핵심적으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나는 지금의 학교에서는 AI를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해왔다. 그 이유도 같다. 철학적 문화적 차이때문이다. 지금의 학교는 문자 지식을 가르치기 위한 곳으로 AI가 가정하는 빠르게 변하고 복잡한 세상과는 달리 변하지 않고 단순한 세상을 가정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지금의 학교는 기본적으로 지식이 이해를 가져 온다고 하는 태도를 가지며 이 지식의 시스템은 빠르게 확장되기는 하지만 그 기초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몇십년전 혹은 백년전에 학교에서 가르치던 것은 지금도 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누구나 무지한 상태에서 교육이 시작되고 인간의 타고난 학습능력이 점점 좋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과거의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던 것과 지금의 그것들은 그리 다르지 않다. 

 

지금의 학교가 당연시 하는 것에는 객관성이 있다. 과학적 사고의 핵심이 자연법칙에 대한 믿음이라면 그 자연법칙은 모두에게 똑같이 그리고 시간과 위치에 상관없이 존재하는 단 하나뿐인 세상에 대한 지식이다. 이런 객관적 세계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자연법칙에 대한 믿음도 튼튼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쌓아온 지식이 유효한 것은 그 지식의 기초가 되는 기초적 지식들이 계속 진리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사실이 되려면 세상은 객관적으로 단 하나만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AI와 충돌한다. AI는 빠르게 변하고 복잡한 세상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도 하나의 객관적 세계를 다루지 못한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경계를 정한 임시적인 공간뿐이다. 그 임시적인 공간도 그 임시적인 공간에 대한 지식인 AI도 객관적이지 않다. 푸는 문제가 달라지면 AI가 다른 것이 당연하다.  

 

학교는 객관성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단 하나뿐인 세상에 대한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겠지만 AI는 공간의 창조와 함께 무한히 다양하게 온다. 학교가 하나뿐인 세상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AI는 우리가 좋아하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의 가치를 학교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오직 객관적으로 의미가 있을 수 있는 지식에만 집중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학교와 AI가 갈라지는 부분이다. 

 

객관성따위는 왜가 아니다. 아니 왜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현실 세계 혹은 단 하나 존재하는 객관적 세계에서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풀리는 특별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 바로 데이터수집과 컴퓨터 최적화를 통해서 말이다. 그 공간을 만드는 것은 집을 짓는 일과 같다. 나의 편의에 따라 집을 짓고 집은 밀림과는 다르다. 학교는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SNS가 중요하다고 학교가 말하던가? AI를 믿는 사람들은 무한한 창의성속에서 우리는 최고의 공간들을 계속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안에서 인간들은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과학과 AI가 갈라지는 지점이고 이것이 학교가 AI를 가르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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