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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본 미국 이스라엘

일본인이 사는 모습 : 화(和)의 일본

by 격암(강국진) 2010. 2. 13.

화의 일본


일본에 오면 조화 화(和) 자를 자주 보게 된다. 일본의 옛이름인 야마토는 야마토라고 읽지만 한문은 큰 대 조화화로 대화(大 和) 로 쓴다. 이밖에도 여러가지 것에 화자를 넣는데 그렇게 되면 대개 이것은 일본이라는 뜻이 된다. 화의라고 하면 일본옷이 되고 화식이라고 하면 일본 요리가 되는 식이다. 화과자의 화도 결국 일본과자란 뜻이다. 


자유의 미국 그리고 화의 일본. 이렇게 써놓고 나니 왠지 화의 일본이라는 말에서 전체주의적이고 획일화된 냄새가 좀 난다. 우리는 종종 한국에서 획일화된 교육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을 일제의 잔재로 이야기 한다. 일본의 학교생활이란 그럼 정말 어떤 것일까.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와코시 제4소학교이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학교이름이 그냥 제1 소학교, 제4 소학교 이렇다. 하루는 운동회를 한다고 해서 우리 부부가 학교로 구경을 갔다. 학교운동회는 중요한 지역의 행사다. 거의 무슨 명절같다. 운동회때가 되면 상점은 운동회용품 세일을 한다. 당일이 되면 할어버지 할머니며 아버지 어머니 같은 어른들은 닭튀김이나 주먹밥, 과일 같은 먹을 것을 싸들고와서 운동장주변에 둘러앉는다. 우리는 한국식으로 김밥을 가지고 갔다. 운동회는 9시반에 시작하는데 운동장은 7시부터 개방한다. 그런데 그전부터 나와서 자리잡지는 말라고 통지문이 온다. 그만큼 자리잡기가 치열하다. 


운동회 준비는 몇 달전부터 준비가 시작되며 반마다 대표인을 뽑아서 준비작업을 하도록 한다.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걸려있고 아이들은 반팔에 무릅이 들어나는 반바지를 입고 흰색과 빨간색 모자로 편을 갈라 앉아 있다. 중앙에는 내빈용 천막이 쳐져있고 그 옆으로는 응원단이 응원을 한다. 


한국의 운동회와 그다지 다를것이 없으나 어느새 맨하탄의 학교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실은 운동회 자체가 약간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운동회라는 것이 맨하탄에서는 없었다. 학생들이 전부 모여서 하는 행사자체가 뉴욕에서는 거의 없다. 이러니 운동장에 아이들 줄지워 세워놓고 교장선생님 같은 분이 단상에 올라 뭔가를 훈시하는 장면이나 죽 줄을 세워놓고 상을 주는 모습이 이젠 낯설다. 한국에서는 종종 보는 광경이었지만 벌써 내가 학교 졸업한지는 오래고 미국 생활에 적응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짜 충격이 되는 것은 4,5,6학년생들이 펼치는 집단체조였다. 나는 그후에도 해마다 이 군무를 봤는데 사실은 아직도 적응이 잘 안 된다. 이걸 처음 볼때는 우리 부부는 서로 얼굴을 마주봤는데 아마 내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 정도로 미국과는 달랐다. 아이들은 맨발에 반바지를 입고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몇 십분에 걸쳐 무용을 펼친다. 그런데 작은 돌들이 많고 땅이 단단하여 발바닥이 아플게 틀림없다. 시험삼아 양말을 벗고 바닥을 밟아보니 상당히 발이 아프다. 음악에 맞춰 이리로 뛰고 저리로 뒹굴면서 흙투성이가 되어 군무를 펼친다. 작은 아이들이 4단씩 탑을 쌓기도 한다. 맨 무릅을 땅에 대고 몇층으로 아이를 등위로 올리는 것이다. 발이며 무릎이 많이 아플 것이다. 보기는 좋지만 박수를 쳐야 하는건지 아동학대라고 화를 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집단으로 행동하는 것을 열심히 교육받고 있었다. 한눈에도 개인으로서의 자기를 인식하기보다는 전체로서의 하나를 이루는 것에 중점을 둔다. 


그 집단체조에서 나는 감동을 받기도 했다. 이 학교는 신체던 정신이던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학년마다 다니고 있다. 그 복잡한 체조를 정신에 문제가 있는 아이가 따라할 도리가 없다. 미국은 애초에 그런 군무를 잘 시키질 않는다. 한국이라면 그런 아이는 열외를 시켰을 것이다. 일본에 있는 예나의 초등학교에서는 보조하는 어른이 팔을 잡아 끌면서 끝까지 같이 시킨다. 이리 저리로 끌어당기지만 아이는 그저 끌려다닐뿐 자기가 뭘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게 분명하다. 그 아이 때문에 모처럼 몇 달이나 연습했을 군무가 모양이 망가진다. 그래도 그 아이는 군무를 함께 한다. 아이들은 항상 모두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이런 것을 통해 배울 것이다. 누군가를 뒤에 남겨놓아서는 안된다. 왠지 감동적이다. 


경호의 유치원에도 예나의 초등학교에도 장애아들은 흔히 보였다. 한국보다 장애아가 유달리 많은 나라일리도 없으니 내가 장애아를 자주 보는 이유는 그들을 그냥 차별없이 받아들이고 내보이기 때문일것이다. 팔하나가 없는 예나의 친구는 혼자만 팔이 없는데도 전혀 어두운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는 것뿐일지 모르지만 좋아보였다. 


우리 아이들의 하루는 평일도 처음부터 다른 학생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나와 경호의 하루는 아침 6시 45분에 기상한다. 일어나서 밥을 먹고 세수를 하고 옷을 입는다. 교복을 입지는 않지만 학교모자는 쓰고 가야한다. 그리고 7시 40분까지 아파트 아래로 내려가면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모여있다. 아이들은 지역별로 모여서 등교를 한다. 시간이 됬는데도 아이가 오질 않으면 집으로 누군가가 찾아온다. 자기들끼리 그냥 떠나는 법은 없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같이 학교까지 2킬로미터 조금 안되는 거리를 걸어간다. 어른이 한명 따라 가기도 하지만 결국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보살피는 셈이다. 귀찮겠지만 같이 가야 한다. 서로를 돌본다는 것은 학교생활의 소중한 한부분이다. 통학길의 골목에는 자원봉사자나 학교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 학부모들이 돌아가면서 당번을 정해서 통학로를 돌고 쓰레기를 줍기도 한다. 일본의 거리가 깨끗한 건 안버리는 것 이상으로 열심히 줍는 사람들이 어딘가 있기 때문이다. 집단으로 움직이는 일본은 한국입장에서는 별다를게 없을지 모르나 개인적인 미국과는 물론 매우 달랐다. 미국에서는 모든 부모들이 각자 자기 아이들을 등교 시켰다.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돌볼 필요는 물론 없다. 


이렇게 아이들이 학교에 도착하면 실내화를 신고 실내로 들어가게 된다. 이 학교의 모습은 내가 어렸을때의 한국 초등학교와 거의 꼭 같은 것이다. 운동장 주변에는 철제 미끄럼틀과 낮은 철봉들이며 땅에 박아 넣은 타이어들이 있다. 교실에 가보면 책상들이 줄지어서 교탁을 향해 나열되어 있다. 음악실이며 도서실이며 한국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 없다. 


단지 이 학교는 내 어릴때와 비교하면 학생수가 비교할수 없이 작다. 예나의 학년에는 40명정도 규모의 반이 두반 정도밖에는 없다. 우리 때는 한반에 60명씩 채우고도 15반까지 있었다. 동경시내는 아니지만 시골도 아닌데 학교규모가 작아서 마치 시골학교같다. 학교의 규모는 주거의 형태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가 있는 것도 작은 집이 다닥거리며 밀집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많은 학생을 수용하는 초등학교를 만들면 통학거리가 너무 길어질 것이다. 


백명도 안되는 학생이 한학년으로 6년에 걸쳐 같이 공부하는 것은 5백명쯤 되는 학생이 그러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어느 숫자까지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전교생의 얼굴과 이름을 알아볼수 있다. 그러다가 규모가 조금 더 커지면 갑자기 알아보는 사람의 수가 급감하고 사람들은 군중속의 뒤로 숨는다. 작은 학교에는 가족적 분위기가 있다. 물론 단점도 있다. 학교가 작으니 아이들이 우물안 개구리가 되기 쉽다. 세상엔 아주 똑똑한 학생, 아주 체육을 잘하는 학생이 있다는 것을 모를까 걱정이다. 그저 조금만 뛰어나면 전교에서 손꼽히는 학생이 되기 때문이다. 


학교를 방문하여 교실을 돌아다니다보니 한가지가 눈에 띤다. 모든 학생들의 실례화가 다 같은 디자인이다. 그러고 보니 그것뿐만 아니다. 군대보급품을 사용하는 것처럼 모든 아이들이 모든 것을 아주 똑 같은 물건들을 사용하고 있다. 일본의 아이들은 란도셀이라고 불리는 위로 덮히는 뚜껑이 있는 가방을 맨다. 하지만 같은 것은 그 정도가 아니다. 아이들의 연필이며 실내화며 공책이며 물감이며 조각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판에 박은 듯이 꼭같다. 회사자체가 같은 물건들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학용품을 집단구매 할 때도 많다. 아이들은 고작해야 조각도의 색깔이 서로 다른걸 가지고 서로 넌 무슨 색깔을 골랐는가하고 화제로 삼을 뿐이다. 이렇게 똑 같은 걸 쓰는 것이 규칙은 아니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이론적으로는 다른 걸 쓸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꼭 같은 걸 흔히 쓴다. 다들 꼭 같은 걸쓰는데 나만 다른 걸 쓰면 왠지 기분이 안좋기 때문이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 경호가 다녔던 유치원도 그랬다. 하루는 소지품을 넣는 주머니를 준비해서 보내라는 공지가 왔다. 그런데 그 주머니의 디자인이 mm단위로 정확한 규격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주머니를 걸었을 때 예쁘게 걸기 위해서다. 결국은 모두가 실질적으로 똑 같은 주머니를 쓴다. 미국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획일화 되는 것에 대해 일본인 학부형들에게 이상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별반 저항감이 없었다. 한 학부형은 학생들이 서로 빈부격차를 느끼게 하지 않기 위해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역시 일본은 대단히 평등이 강조되는 사회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똑같이 지내는 것은 남과 달라지는 것에 대해 공포를 가지게 만들지 않을까? 


미국은 남과 달라지는 것을 강조한다. 일본은 튀지 않는 것을 강조한다. 사이 좋게 지내는 것, 튀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이들의 교실에 들어가보면 반마다 세개의 액자가 걸려있다. 학교의 교육목표 세가지를 써놓은 액자, 학년 교육목표를 써놓은 액자, 학급 교육목표를 써놓은 액자다. 거기에는 각각 세가지의 목표를 써놓는데 예를 들어 건강한 아이가 되자거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아이가 되자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그걸 읽다보니 뭔가가 좀 이상하다. 보니까 학교의 교육목표에 사이좋게 지내는 아이가 되자고 써있다. 그말이 학년 목표에도 있다. 그리고 학급목표에도 있다. 이게 좀 신기해서 학교를 돌아다녀 보니 반마다 학년마다 예외가 없다. 이쯤이면 학교전체를 사이좋게 지내자라는 말로 도배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교육목표에 그게 포함되어 있으니 좀 다른 것을 써보자고 할만도 하지만 돌아보는 교실마다 예외가 없다. 


학교의 첫 수업참관에 가니 예나가 잘하는 수학시간도 있었다. 예나는 산수를 따로 좀 가르쳤기 때문인지 물어보는 문제가 예나의 수준보다 훨씬 밑이다. 예나는 발표를 하겠다면서 열심히 손을 들지만 선생님은 예나를 잘 시켜주질 않았다. 외국인이라서 차별하는 걸까? 나중에 동료 일본인 연구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다들 자기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일본 최고의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로 초등학교때부터 성적이 좋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특별히 잘하는 초등학생이 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잘하는 학생들은 종종 일본에서 답답하게 크는 경험을 한다고 한다. 잘 시켜주질 않는다. 잘하는 학생은 영재학교로 가서 영재안의 평등을 이루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통학교에서 너무 잘하는 티내지 말고 살거나 해야 하는 식인 것 같다. 


한국같으면 잘하는 아이를 칭찬해서 아이들간에 시기와 질투를 유발해서 경쟁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미국에서는 잘하는 아이는 계속 빨리 진도를 나가라고 격려한다.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너는 좀 천천히 하라는 말은 없다. 참잘하는구나 하고 칭찬할 뿐이다. 일본은 그렇지 않다. 너무 튀면 사이가 나빠지기 때문일까. 


경호가 그림 그려놓은 곳에 가보니 아이들이 그려놓은 그림이 죽 걸려있다. 자기 얼굴을 그려놓은 것 같은데 구도가 천편일률적이다. 커다란 얼굴이 있고 거기에 작게 몸을 그려놓았다. 알고 보니 선생님이 기본적 구도를 주고 아이들이 거기에 더 손을 대서 그리는 모양이다. 미국이라면 아이들이 서로 다를수록 잘했다고 할것이다. 그 때문에 형편없는 그림도 나오지만 특이한 그림도 나온다. 일본 아이들의 그림은 서로 비슷비슷했다. 


오후 4시 15분이 되면 우리가 사는 와코시에서는 거리에 스피커 공지가 나온다. 어린이 여러분 이제 집에 갈시간입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스피커 공지가 거리를 가끔 울린다. 스피커 공지는 연구소에도 많다. 비가온다. 전기절약하라. 지진경보가 있다. 화재경보기 고치러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여러가지가 있는데 제일 인상적인 것은 빨리 집에 가라는 공지다. 매주 수요일이며 이런 공지가 나온다. 오늘은 급한일이 없으면 빨리 집에 가십시요. 오늘은 집에 빨리 가는 날입니다. 이쯤되면 무슨 군대같다. 처음 일본에 와서는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 이 스피커 소리에 짜증이 났었다. 뭐랄까 중앙에서 전체에게 일괄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익숙하다. 


이것은 물론 미국과 매우 다른 것이다. 일본이 우리가 이러저러하게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하는 말을 보면 대개 누군가를 쫒아가고 따라잡겠다는 표현이 많으며 그 대상이 되는 것은 종종 미국이다. 그러나 튀지 않게 살고 자기 주장보다는 남을 의식하고 개인의 권리보다는 전체적인 관리를 강조하는 분위기는 초등학교때부터 학교에서 가르쳐진다. 거리의 곳곳에 그런 흔적이 보인다. 그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연 서구식 민주주의의 형식을 이런 밑바탕에 그냥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 노력은 어떤 결과를 낳게 될것인가. 그렇다고 일본이 초등학교때부터 미국처럼 해보자고 하는 주장은 현실적인가. 일본이 미국이 될수있을 것인가.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의 고민도 깊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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