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이 동네의 할아버지가 하는 작은 바에서 선물을 받았다. 그 바의 단골로 살다가 한국에 돌아간다고 하니 선물을 받은 것이다. 작은 접시에는 일기일회라는 말이 써있었는데 이 말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 하나 하나가 다 소중하다는 의미다.
일본 사람들을 만나면서 거듭 느끼게 되는 것은 일본사람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은원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한국사람도 다르지 않다고 할지 모른다. 언제나 말하는 것이지만 같은 나라사람이라도 사람마다 다르다. 의리나 신용을 나쁘다고 하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분명 한국과 일본, 미국과 일본사이에는 강조되는 정도에 따라 중대한 차이가 있다. 일본사람들이 감동하는 이야기는 작은 은원이라도 목숨을 걸고 갚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런 걸보면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 은원이 일본윤리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2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을 연구하여 일본에 대한 소개서중에 고전으로 통하는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라는 책이 있다. 그가 묘사하는 일본인의 모습을 봐도 이런 점은 분명히 들어난다. 그가 꼽는 일본의 덕에는 충, 효, 의리, 인, 인정 같은 것들이 있다. 이것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모습으로 그가 일본인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준다고 길게 소개하고 있는 것은 47낭인 혹은 47로닌의 이야기다.
47낭인 이야기의 핵심은 모시고 있던 영주가 모욕을 당하고 죽었을 때 복수해 주어야 하는 의리와 쇼군에 대한 충성을 어떻게 47 낭인이 모두 충실히 완수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의무는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의리는 복수를 주장하고 쇼균에 대한 충은 가만히 있을 것을 요구했다. 47인의 낭인은 이 충성과 의리의 상충된 요구를 모두 지키기 위해 의리에 따라 원수를 갚고 불충에 사죄하기 위해서 모두 자결을 하고 만다. 그들은 이 복수전을 위해 그들의 개인의 명예를 희생함은 물론 그들의 아내를 불행하게 하고 여동생을 희생시키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누구와 누구간의 은원에 이야기의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어떤 의리,특히 상하간의 은원를 얼마나 열심히 지키는가 하는 것이다. 목숨 이상의 것을 내놓고 그것을 지켜낸 47인의 낭인은 진정한 영웅으로 찬양된다. 이것은 거꾸로 말해 세상이 혼잡하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의리와 충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서구인의 사고방식과 비교했을 때 이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미국을 포함한 서구인에게 있어 진리나 가장 소중한 가치는 인간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며 어떤 특정인간과의 관계에 있지 않다. 신앙적인 인간이라면 그는 신과 인간간의 관계나 신이 제시한 도덕율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즉 선한 인간이 되기위해서라면 어떤 인간과의 관계도 단절할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진정 훌룡한 용기라고 찬양되는 것이다. 미국 영화에서 말하는 영웅이란 선을 행하기 위해 싸우는 자이지 특정인에 대한 충성이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죽는 것과는 좀 다르다.
이는 한국인과도 차이를 나타내는 점이다. 한국인도 어떤 인간을 넘어서는 원리에 의해 선악과 진위가 갈린다고 생각하지 인간적 의리와 충성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한국인은 절대적인 가치를 믿는 반면에 일본인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일대일 관계를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예를 봐도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분명하다. 일본의 막부시대에 농민과 사무라이에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영주에게 충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주가 지나치게 불공평하게 행동할 때가 있다. 농민은 농민의 권리가 있는데 그걸 무시한다면 농민들도 불만을 터뜨리게 된다. 원칙상 영주위에는 쇼군이 있으므로 농민들은 중앙에 직접 투서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투서가 있고 이유가 분명할때에는 중앙에서 사태를 시정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투서가 정당한 이유에 근거할때에도 투서를 한 농민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농민들도 그것을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농민의 제일 의무는 영주에게 충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앙에 가서 왕궁에 있는 신문고를 울리면 나쁜 관리가 벌을 받고 정의가 실현된다는 우리 이야기하고는 매우 다르다.
정의를 지키는 영웅과 의리를 지키는 낭인의 이야기는 둘다 매력적이고 둘다 함께 취할수 있는 어떤 덕을 표현하는 것같지만 현실에서는 미묘하게 그러나 결국은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단순하게 합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강조점의 차이는 국화와 칼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문화에서 선악의 문제가 거의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다는 점에서 들어난다.
두 패가 갈려서 싸우고 있을 때 미국인이나 한국인이 강조점을 두는 방향은 어느쪽이 정의의 편인가 하는 것이다. 즉 선과 악의 싸움으로 문제를 파악한 후 선의 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싸움에 있어 누가 얼마나 성실히 자신의 충과 의리를 실천하는가에 초점을 둔다. 전체적 구도에서 선악을 따지는 것보다는 자신의 입장에서 갚아야할 은원이 어떻게 되는가가 중점이 된다.
일본은 애초에 섬나라로서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았다고 한다. 그보다는 영주에 대한 충성 쇼군에 대한 충성 그리고 천황에 대한 충성이 자신의 입장과 의무를 정의해주는 틀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조선왕조를 위해서라면, 경국대전의 정신을 위해서라면 왕에게라도 거역할수 있다면 일본에 있어서는 그런 추상적 정신이 집단위에 있지 않은 것같다. 충과 은혜와 의리의 의무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런 태도는 물론 도덕적 진공상태를 만들어 내기 쉽다. 그저 윗사람이 명하는 바를 따라서 입은 은혜를 갚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 대량학살과 같은 잔혹한 명령에 대해서도 명령을 기꺼이 따르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쉽게 될 것이다. 과거의 전쟁에 대해서도 피해자들에 대해 전쟁은 본래 그런거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예를 들면 어떤 한국 사람들은 조선과 일본과의 싸움을 선과 악의 다툼으로 보며 물론 일본이 악이라고 파악하는데 어떤 일본사람은 그건 그저 다툼이며 지나간 일로 이제와 따질것이 없다고 생각할수 있다. 이러니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이 만나면 자칫 말한마디로 큰 싸움이 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 한국사람은 원리적으로 봐서 일본인이 같은 일을 또 할수 있는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것이고 그 일본사람은 지나간 일에 한국사람이 너무 집착한다고 말할 것이다.
일본사람이 쓴 한국인 비판을 보면 종종 한국 사람은 충과 의리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회사도 금방 관두고 사고가 발생해도 자기가 책임지고 추락하는 자세가 없다. 쉽게 형동생하지만 급할 때가 되면 등을 돌린다. 이런 말들을 한다. 이것은 일본인이 충과 의리의 덕목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니까 나오는 말이다. 물론 충과 의리는 우리도 중요시하는 덕목이므로 그런 것을 부정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될것이다. 그러나 남의 비판을 들을때는 겸손한 자세도 중요하지만 조심하는 것도 필요하다. 도매급으로 한국인을 비판하고 바꾸려고 하기 보다는 한국인의 덕이 뭔지 생각하고 사안별로 일들을 잘게 나누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자기가 중요시하는 덕목에 집중하면 전체 그림을 전혀 잘못 볼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남자를 평가할 때 그가 바람둥이인가 아닌가에 집중하는 여자가 있다고 하자. 그녀는 미국의 전직대통령 클린턴이 바람둥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는 인간적으로 신용할수 없으며 정치가로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반면에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바람같은거 안피는 부시대통령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반대로 생각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통령인 케네디대통령도 바람둥이였다.
좋은면과 나쁜면도 속단해서 말할 수없다. 한국이 인터넷선진국으로 이름을 날리기 전인 1990년대초에는 한국인에 대한 이런 비판이 있었다. 꼭 필요한 기능이 사용가능하면 컴퓨터를 좋은 것으로 바꾸지 않는 유럽인에 비해 그다지 쓰는 기능도 없이 최신 컴퓨터를 사기에 열중하는 한국인들은 사치가 심하고 유행에 몰두하는 싸구려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유럽인들은 얼마나 검소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빛이 바래졌지만 1990년대 말부터 한동안 한국은 인터넷 선진국, 첨단전자기기의 전시장으로 유명해 졌다. 반면에 유럽은 인터넷도 제대로 깔리지 않은 후진성을 조롱받았다. 국제회의에 갔는데 인터넷이 안되서 메일체크도 못한다며 불평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렇게 되자 한국인이 진취적이라고 칭찬받고 유럽인들은 구태의연하고 변하기 싫어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이라고 비판한다. 평가는 마구 바뀌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다. 남이 한 평판들을 무조건 많이 듣고 그에 따라 뛰어다는는 것은 위험하다는 증거다. 우리가 유럽식으로 ‘검소’해 졌다면 인터넷 관련 산업의 발전은 없었을지 모른다.
의리와 충을 강조하는 일본의 덕이란 도덕적 공백을 가져올수 있다는 지적은 위에서 이미했다. 물론 이 같은 덕은 사회적 신뢰를 강조하고 집단적 성실성을 강조해서 강력한 공동체의식을 가지게 만들수 있는 좋은 점도 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만남과 은원을 소중히 생각한다는 것은 훌룡하고 매력적인 일이며 당연히 매우 중요한 것이다. 가게에서 손님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태도도 이 같은 덕목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며 장인정신이라던가 대를 이어 가업을 유지하는 일본의 풍습도 의리와 충으로 이어진 거대한 사회조직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는 태도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같은 덕목은 정치적 보수화를 가져오고 사회적으로 작디 작은 자신의 발밑만 쳐다보게 만드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전체적 구조와 조직 원리에 무관심해지고 내가 받은 것을 나에게 준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에만 매진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부자나 세도가가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으로 여러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면 그 사람들은 입은 은혜 때문에 그 부와 권력이 유지되는 구조따위에는 등을 돌려버리기 쉽다. 일본은 외국문물은 쉽게 들어오지만 외국인이 국민의 하나로 섞여 들기는 쉽지 않다. 좋은 대접을 받지만 손님 같은 느낌이 들게 되기 쉬운 것이다. 이는 일본인의 윤리관이 색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인들이 쓴 책에서도 인정하는 것처럼 조선의 역사나 한국의 역사를 보면 민중의 역할이 일본에서 보다 크다. 일본에서는 전쟁이 났는데 민병이 스스로 조직되어 싸운다는 개념이 없었다. 전쟁은 세도가들이 하는 것이고 전쟁이 끝나면 지배자가 바뀌는 것이다. 한국이 민주화운동을 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역사를 가진 것은 한국과 일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의 권세있고 돈많은 사람들이며 정계, 언론의 사람들이 의리를 찾고 인간적 친화성의 중요도를 강조하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겁이 난다. 안 그래도 작은 나라에서 힘있고 능력있는 사람들끼리 형동생이라 부르고 결혼으로 친인척으로 묶이며 선생님, 은인하면서 얽혀서 은혜와 의리를 찾으면 나라가 어떻게 될것인가. 그들과 인연을 맺기 힘든 힘없고 이름없는 사람들의 이익은 어떻게 될까. 이런거 어느정도 일본에서 크게 영향받은 것이 아닐까. 일본을 보라 부자나라가 아닌가. 우리도 비슷한 윤리관을 가지면 마찬가지로 부자나라가 될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게 가능할까. 우리는 정말 일본과 비슷하게 사고하는 나라인가?
그래도 물론 모든 것에서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신의가 중요하다는 것도 중요한 말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한국 사람의 가슴을 흔든다. 본래 불교적인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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