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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소통의 문제

공부의 어려움과 소통의 문제

by 격암(강국진) 2014. 8. 17.

14.8.17

최근 고등학교에 올라 간 아이와 공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인 즉슨 공부가 한단계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 왜 그렇게도 지루하고 어려워 질 수 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해준 말은 이렇다. 공부를 진정으로 한단계 올린다는 것은 마치 프로야구 경기를 구경하던 관객이 실제로 선수가 되어 배트를 휘두른다는 것과 같다. 구경만 할때는 배트를 더 빨리 휘둘러야 한다, 밀어쳐야 한다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배트를 휘둘러 보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상에는 천재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천재 아닌 사람들은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계속 배트를 휘둘러야 하고 그렇게 계속 하는 가운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을 익히게 된다. 그러고 나서야 엉터리 3류 선수일 망정 선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관객이 선수훈련을 시작한 초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어보이고 전혀 진전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것같은 공부와 연습을 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특별히 더 지루하고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 단계를 좀 지나고 나면 다시 우리는 선수로서의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게도 되지만 처음에는 그런 것을 느끼기가 여간해서 어렵다. 나는 딸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물론 공부에는 여러가지 단계가 있으니 고정해서 누가 선수요 누가 관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구구단을 안 외우고 문제풀이 연습 안해본 어린애에 비하면 4칙연산을 연습한 사람은 선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학의 세계가 4칙연산 연습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므로 이 사람은 아직 관객 중의 관객이라고 말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또 이 세상에는 많은 분야가 있고 우리는 그 대부분의 분야에 있어서는 초보 중의 초보를 넘기 어렵다. 따라서 어느 수준과 비교하는가에 따라 다르고, 어느 분야에 대해 말하는가의 문제가 다르니 누가 초보자요 선수요 구분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이 공부의 단계와 차원의 다름에 대해서는 몇가지 오해가 있고 그 때문에 문제도 생기곤 하는 것같다. 공부란 것은 바로 이 ‘말로 하지 못하는 부분’을 익히는 것이 주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뭘 못하고 뭘 모르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치 영어단어장에서 단어들을 순서대로 외우듯이 그저 더 많은 지식을 조금씩 조금씩 한걸음 한걸음 더 배우는 것이 공부를 더 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공부다. 말로 명확히 할 수 있는 공부도 쉽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개 공부의 쉬운 부분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뭘해야 하는지 명확히 안다. 그러니 약간 부지런을 떨고 좀 시간이 지나면 대개 그리 어렵지 않게 그것에 익숙해 진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고 반복된 연습과 예들에 의해서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부분은 쉬운 사람은 쉽게 해내지만 못해내는 사람은 여간해서 하지 못하는 것이다. 타격을 배우자면 우리는 반드시 배트를 휘둘러 연습을 해야 하지만 단순히 많이 휘두르는게 아니라 그 연습을 통해서 어떤 감을 터득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많이 휘두르기만 하면 그것은 그냥 노동이 된다.

 

이때문에 실제로 초등학생이 중학교에 가거나 고등학생이 대학교에 가는 식으로 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성적이 크게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남들보다 더 많이 공부해도 성적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열심히 할수록 성적이 더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런 딱한 친구들을 관찰한 사람들은 그들을 가르켜 요령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 간단히 요령이라고 요약되는 부분이 간단치 않으니까 문제다. 그 ‘요령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미칠 노릇인 것이다. 그런데 그걸 알고난 후에는 내가 그때는 왜 헤맸는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미 세상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공부와 관련되어 생기는 오해가 만들어 내는 결과중의 하나는 관객이 선수를 보면서 자기를 과대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부분이 진짜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이다. 단어를 아는 것과 체험과 함께 어떤 단어를 이해하는 것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종종 하는 말이지만 아마추어 과학애호가나 기자, 어떤 잡식과 퀴즈의 전문가가 과학전문 연구자나 교수와 대화하면서 더 넓은 지식을 자랑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아는게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과신하는 경우가 생겨서는 안된다.

 

아마추어는 실제로 연구를 수행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연구자의 감각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아무리 대중과학서를 많이 읽어도 그것만으로 과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관객은 계속 관객으로 남게 된다. 만약 자기가 진정한 정열이 있다면 그곳에 뛰어들 때만이 진짜를 느낄 수 있다. 기본적으로 3천줄짜리 프로그램들을 여러번 짜고, 6개월동안 수학문제 하나를 가지고 밤이고 낮이고 끙끙대어보지 못하는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대중과학서만 읽는 관객은 자기가 외우고 있는 문장의 의미를 매우 애매하고 폭좁게 이해하며 때로 전혀 잘못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인쉬타인이 이랬다더라, 과학연구의 패러다임이 이런거라더라 하는 것에 대해 줄줄 외우고 있다고 해도 그 의미를 실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공부가 계속 되면 ‘말할수 없는 부분’에 속하는 부분이 말할 수 있게 분명한 개념으로 정리가 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단지 그 개념을 대표하는 단어나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체험과 실천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아는 것으로 민주시민이 되고 민주사회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와 행동속에서 명확한 개념으로 뿌리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림 베끼는 일을 열심히 잘하는 사람, 남의 이야기를 잘 베끼는 사람이 가장 훌룡한 화가, 가장 훌룡한 소설가가 될 소질이 있다고 착각하는 식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테크닉이나 단어들, 지금도 말로 명확히 전할 수 있는 지식은 쌓이기 마련이고 습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별거 아닌 것같은 그 요령이라고 불리는 곳에 포함된 것을 무시할 때 3류는 영원히 3류로 남는다. 모짜르트와 3류 피아니스트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만 가득찬 사회는 모짜르트를 종종 죽여없애거나 접시닦이를 시키면서 우리나라에는 왜 명곡이 없냐고 할 수 있다.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무지하고 위험한 사람은 없다.

 

이제까지 말한 것은 소통이란 걸 생각해 볼 때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누군가가 건축가에게 좋은 집이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하자. 이 사람이 만약 당신이 나만큼의 경험을 쌓고 나처럼 인생을 살아왔다면 그 답을 알겠지만 그 전에는 설명해 줘도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거나 자 건축학 개론 101 과정 교과서의 첫 장부터 시작해 봅시다라고 하면서 질문하는 비전문가들을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한다고 한다면 어떨까.

 

이 것은 어느 쪽이든 소통의 실패고 포기다. 이래서는 전문가라는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모른다면 실제로 해보게 하자는 아이디어는 언뜻보면 설득력을 가지지만 사실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은 히말라야 다녀온 사람에게 히말라야 어떠냐고 물었더니 알고싶다면 다녀오시요라고 답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식이라면 우리가 서로에게 뭘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세상 모든 일을 우리가 다 직접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물리과 교수에게 뭘 물었더니 자기는 10년 공부한 것을 한시간에 설명해 주고는 알겠지요라고 하거나, 철학교수에게 뭘 물었더니 마찬가지로 그런 식으로 설명한다면 이건 설명이 아니라 그냥 기를 죽이는 것 밖에 안되고 잘난체 밖에 안된다. 잘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아 그건 이 책 저 책을 보면 됩니다라고 하면서 권장도서를 한묶음 던져주는 전문가 말이다. 그들은 하나의 질문을 더 많은 질문으로 대답한다. 이게 히말라야 어떠냐고 물었더니 알고싶으면 다녀오시요라고 말하는 전문가와 뭐가 다를 것인가.

 

조금만 해봐도 상당히 감이 다르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해보고 바뀐 감이란 동시에 내가 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독소도 가지고 있다. 미국 일주일 여행하고 미국에 대해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미국 안가본 사람이상의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때로 전문가가 더 많은 숙제를 내주면 내줄 수록 열광하곤 하는 데 그 학생이나 독자가 뭔가를 전공하여 그 길로 계속 매진할 생각이며 마침 그에 맞는 재능을 갖춘 경우라면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앞에서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말로 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고 강조했으니 어쩌면 그것 자체가 소통의 불가능성을 말한 것일 수 있다. 이 소통불가의 절벽에 희망은 없는가. 희망은 있다. 무엇보다 그 이유를 몰라도 인간은 과거에도 지금도 서로 소통하고 경험을 나누고 있다. 소통의 희망은 밖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다른 삶을 산다. 어떤 사람은 농부고 어떤 사람은 선생님이며, 경찰이거나 화가다. 어떤 사람은 외로운 독신이고 어떤 사람은 바람둥이거나 대가족의 일원으로 산다. 우리는 다른 게임을 하고, 다른 세계에서 살고, 다른 체험을 가지고 산다. 나는 나의 체험을 가질 뿐이고 너는 너의 체험을 가질 뿐이다. 그런데도 각자 자기라는 섬에서 혼자 사는 우리는 소통을 할 수 있고, 하고 있다. 물론 그것에 종종 실패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사람의 소통능력은 두가지에 크게 의존하는 것같다. 그 사람이 가진 경험의 넓이 혹은 그가 살고 있는 정신적 세계의 넓이가 하나고 또 하나는 자신의 정신세계 혹은 자기가 보고 있는 세계를 얼마나 일관성있고 명확한 개념으로 정리하고 사는가 하는 것이다.

 

소통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의 여러가지 개념들을 다른 세계의 개념들로 번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한 쪽 세계의 정신적 넓이와 복잡성이 너무 작고 단순하면 번역은 매우 조잡해지거나 불가능해 진다. 에스키모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눈의 색깔을 훨씬 자세하게 구분한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따라서 그렇지 못한 적도의 나라의 사람들의 말로 에스키모의 눈에 대한 정서를 번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초등학생이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면서 그들의 말을 초등학생들의 말로 번역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신적 세계의 넓이와 복잡성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세계에 대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소통도 불가능하다. 과학의 한계를 고민해 보지 않은 과학자는 비과학자와 소통을 못한다. 그것은 다른 전문 영역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 세계의 한계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분야에서 전문지식이 아주 많아도 그 세계가 가진 한계를 생각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그 세계 바깥에 속하는 사람과는 소통을 잘 할 수 없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제대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저 뜻도 모르는 말을 외우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의 세계에 능숙해지게 되면 자기의 모습을 확연히 알게 된다. 그럴때 다른 사람도 보인다. 이것이 진짜 통섭이며 우리가 장인의 경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냥 무조건 다른 분야와 섞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질문을 추구하고 집중한 나머지 자기분야를 넘어가 버리게 되는 것이 통섭이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지식을 섞어놓기만 한 것은 의미가 없다. 장인의 경지에 이르른 화가는 그림에 대해 말하면서도 마찬가지로 장인의 경지에 이르른 농부와 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각각의 분야에서 서투른 감을 익히는 단계를 지날 때 보편성, 소통가능한 체계와 만난다.

 

그러다 우리가 더 넓은 세계를 보게 되면 우리는 또 한동안 소통이 불가능해 진다. 자기가 온통 흐뜨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있는 개념이 전부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기안에 파고들어가서 자기 세계를 다시 구축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예로 부터 공부의 깊이와 넓이는 공부하는 사람의 고민거리였다. 깊이를 위해서 넓이를 희생해야 할 것인가 넓이를 위해서 깊이를 희생해야 할 것인가하고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문맥상에서 보면 깊이와 넓이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깊이에 도달하지 않고 넓이에 도달할 수 없다. 그저 이름 달달 외우는 것이 뭔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넓이는 오직 깊이가 있을 때 이룩되는 것이다. 우리가 젊어서 뭔가에 미쳐보지 못했다면, 우리가 평생 단 한가지에서라도 미쳐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평생 다른 사람의 세계를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흐리멍텅하고 일관성을 상실한 세계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입시공부를 잘하는 법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려면 그저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을 아는 단계를 넘어서 선생님이 뭘 가르치려고 하는가를, 선생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 진짜로 잘하려면 그것조차 넘어서 교과서의 의도, 교육과정의 의도까지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그것은 결국 그 단계를 지나온 사람의 말이었던 셈이다. 금방 고등학교에 올라간 학생은 선생님의 의도건, 교과과정의 의도건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이 보일 때까지 결국 지루하고 비효율적인 연습을 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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