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28.
우리는 대개 우리의 몸을 우리 자신의 일부로 여긴다. 자신의 팔다리와 내장기관을 마치 입고 있는 옷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반면에 우리의 소유물은 그렇지 않다. 우리 자신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팔하나쯤 없어져도 거뜬히 행복하게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아끼는 신발이 망가지거나 아끼는 자동차가 상처를 입으면 곧 죽을 것처럼 불행해 한다. 내 몸바깥에 것에 대해 신경쓰는 것은 반드시 속물근성을 가진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안이 반드시 단순해야 하고 잘 정돈되어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그걸 견디기 힘들어 한다. 따라서 가난하고 단순하게 사는 사람도 내 주변이 반드시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신경쓰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 일 수 있다.
우리의 일부를 이루는 것에는 특정한 사물이 아니라 형태를 가지지 않는 것도 있다. 현대인에게는 직업이 뭔가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된다. 그런데 상인이란 상인으로서의 삶이 있고 작가는 작가로의 삶이 있으며 셀러리맨은 샐러리맨으로서의 삶이 있다. 그러한 생활의 질서는 워낙에 우리 자기 자신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져 있기 때문에 은퇴를 앞두거나 은퇴를 한 사람들은 종종 우울증을 앓는다. 즉 평생을 경찰관으로 살았거나 정치가로 살았거나 대기업의 직원으로 살았던 사람은 이제 더이상 그렇게 살지 못하게 될 때 더이상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은퇴가 노후에 대한 경제적 걱정만 주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뭘하고 뭘 믿고 살아야 할지를 알 수 없게 만드는 것도 아주 크다. 그의 행동과 말에 의미를 주던 가정과 문맥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우울해 진다.
이렇게 우리라는 존재는 단순하게 이 세상 어딘가에 선을 딱 그어서 이 안쪽에 우리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비록 내 손이나 심장보다는 덜 중요한 것일지 몰라도 내 방에 붙인 그림 한점, 글씨 한줄도 나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사실 글과 나의 관계를 검토해 보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몸이라던가 옷이나 자동차 혹은 집이나 직업 같은 여러가지 것들을 우리의 일부를 이루는 것들의 예로 거론했다. 정신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글이란 것은 우리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생각보다 더 중요하고 커다란 일부 말이다.
이런 이야기는 아주 추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어제 뭔가에 화가 났다. 내가 글자를 몰랐다면 그저 그것을 기억해 두었을 것이다. 그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따라 점차 희미해지고 심지어 사라지거나 뒤집어 질 것이다. 그런데 내가 글자를 알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기억해 두었다면 그 글은, 그 정보는 이제 세상에서 기본적으로 영원히 존재한다. 그렇게 존재하면서 나를 다른 존재로 있게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매우 미워하게 되어서 그 사람의 이름을 벽에 새기거나 몸에 문신으로 새긴다면 우리는 그 잊혀지지 않는 정보때문에 적어도 조금쯤은 그 전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단순히 내가 써놓은 기억만 그런게 아니다. 남이 쓴 글도 그렇다. 남이 쓴 책을 읽고 나면 나는 그 안의 것을 알게 될뿐만 아니라 이제 그 책을 언제나 다시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릴적부터의 독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자신을 바꾼다.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된다. 우리가 감동을 받으면서 읽었던 글이나 책은 지금 우리 눈앞에 있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마력을 발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다르게 살게 만든다.
따라서 도서관이 있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란 마치 뇌를 하나 더 가진 새로운 생물로 변한 인간들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오늘날 개인의 서재나 도서관뿐만 아니라 전자 파일의 형태로 엄청나게 많은 정보와 글을 기록하고 열람한다. 물론 그런 시대에도 사람들이 모두 많은 글을 읽는 것은 아니다. 또 글뿐만 아니라 멀티미디어 매체가 인간을 새롭게 바꾸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언어의 힘은 아주 강대하다. 그것은 인류가 오랜동안 갈고 닦은 지식의 체계다. 인간의 기계가 동영상으로 담아 내는 것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한다. 분명 음악이나 그림이나 멀티미디어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언어없이, 기록하고 검토하는 글을 읽고 쓰는 일없이, 우리가 보고 기억할 수 있는 양은 매우 작다. 따라서 언어를 잃어버리고 멀티미디어로만 살아가는 인간은 그 삶이 폭이 좁고 미개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언젠가는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수준에서 인간이 소통하게 하고 인간이 정보를 기록하고 열람하게 만드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가까운 장래에 그렇게 될 것같지는 않다.
글이나 언어라는 주제를 옷이나 집 심지어 직업같은 것과도 따로 떼어서 논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어를 배우지 않는 인간은 어떤 의미로 인간이라고 부르는데에 있어서도 문제를 느낄정도로 언어를 배운 인간과는 좀 다르다. 비록 말을 좀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책을 통해서 공부를 한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은 인간과 다르다.
이렇게 강력한 것이 글과 언어의 힘이라고 할 때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남이 쓴 글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글을 꾸준히 쓰는 사람은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글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글속에 자신을 담아서 꾸준하게 기록하는 사람은 그렇게 기록된 글을 통해서 자신을 세상의 파도로 부터 지켜내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함으로서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우리의 선택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선택하면서 산다. 멋쟁이 옷을 입을 것인가. 한국에 살 것인가, 어떤 집에 살 것인가가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말을 배울 것인가, 글을 쓸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평생 글한줄 쓰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그런 사람이 훌룡한 사람이 못되라는 법은 없다. 세상에 절대는 없으니까. 그러나 소총으로 탱크를 이기기는 어렵듯 글의 힘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훌룡한 사람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작가이기 때문이겠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오싱젠은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어떤 정의나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어를 통한 표현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할 때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가 글을 써서 나를 기록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이유다. 뭔가를 생각하고 글을 써서 그것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집을 짓다보면 그 집이란 나 자신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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