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7.23
우리 아이는 아무래도 외국에서 자랐으므로 한국어 책을 읽는 것이 어색하다. 그래서 나는 방학을 맞이하여 아이에게 책을 낭독하게 하고 있다. 그렇게 하고 나는 그 낭독을 듣는 것이다. 지금 낭독하고 있는 책은 꿈꾸는 책들의 도시라는 책이다.
이 책은 출판과 창작의 세계를 판타지로 그려낸 것인데 이 책을 다시 듣다보니 나는 판타지의 미덕을 하나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판타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글을 읽는 독자가 그 세계가 이러저러하다는 것에 대해 저항감을 별로 느끼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멀리 깊은 숲속에는 스파게티를 먹는 도깨비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매일 같이 더 많은 스파게티, 더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는 일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라고 글을 시작한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할때 도깨비가 어디있어라던가 왜 스파게티를 좋아한다는 거야, 역시 밥이 좋지 않아?라고 질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판타지는 판타지이기 때문에 현실과 다르다. 그러나 잘쓴 판타지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의 어떤 면을 아주 극명하고 잘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판타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판타지에 공감하고 판타지를 읽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스파게티에 미친 도깨비가 등장하든 머리에 똥을 올려놓고 살아가는 악마들이 등장하든 이건 말도 안돼! 라는 지적을 받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데 여기에 우화나 판타지의 트릭이 있다. 뭔가를 받아들였다는 느낌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는 이야기가 그저 술술 풀려나가는데도 그 세상이 왠지 우리의 세상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차이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뭘 잊고 있었는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꿈꾸는 책들의 도시는 공룡이나 말하는 외눈박이 난쟁이가 나오는 판타지이지만 그 기반은 출판의 세계를 묘사하는 것에 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책을 파는데 관심이 있건 책을 보는데 관심이 있건 책을 쓰는데 관심이 있건 그 세계속의 인물들은 모두 책에 관심이 아주 높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그런 사람들로 등장하게 된다. 거기에 약간의 판타지가 주는 과장에 대한 관용이 등장하면 이제 책이란 그게 없으면 굶어죽는 것이요, 그걸 몇권가지면 부자가 되고 세계를 통치하며 그것을 빼앗고 가지기 위해 사람들은 목숨바쳐 투쟁하는 대상이 된다.
책을 쭉 읽어나가는 동안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가 쉬워서 그것이 현실에서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잊게 되기 쉽다. 즉 현실과 판타지의 구분선이 망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책을 계속 읽으면 책이야 말로 소중한 것이며 책쓰기는 가장 소중한 직업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책 중심의 사상에 빠진달까. 실은 현실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책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 까맣게 잊혀진다.
나는 언젠가 철학을 하지 않는 닭이라는 우화를 쓴 적이 있다. 그 소설속에서 닭들은 대부분 생각이 없거나 거짓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주인공 닭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닭의 세계라는 시작점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닭들이 돈을 받고 취직을 하거나 닭들이 돈을 저금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잊혀진다.
즉 그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현실에서는 특히 한국의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면 돈이나 출세이야기 좋은 집 이야기에 몰두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잊혀지는 것이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닭이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닭과 인간에 대한 혼동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살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렇게 보면 우화란 속임수라는 것을 알수 있다. 현실과 다른 세계를 소개하면서 그세계에 독자가 빠지게 만들어서 뭔가 현실과 다른 것을 믿게 만든다.
그렇지만 우화의 교훈은 이게 다가 아니다. 우리가 곰곰히 지극히 현실적인 광경을 생각해 보자. 몇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애들 성적 이야기를 한다던가 아파트 평수 이야기, 누구 남편은 얼마를 번다는 이야기 같은 것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현실이며 우화의 이야기는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은 우리가 현실로 파악하는 세계야 말로 누군가가 쓴 우화일 수 있다. 책쓰는 공룡이 나오는 이야기는 책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두는 세계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우화를 읽으면서 책을 읽거나 쓰거나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책쓰는 작가가 책파는 출판사와 힘을 합쳐서 독자를 세뇌시키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던 지극히 정상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그 풍경은 우화가 아니라는 말일까? 당신은 철학하지 않는 닭도 책쓰는 공룡도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면 앞에서 묘사한 지극히 현실적인 대화에 몰두하는 것이 당신이라는 것은 확실한가? 그것은 누군가가 쓴 우화에 오히려 너무 몰두한 결과가 아닌가? 실은 당신은 철학하지 않는 닭이나 책쓰는 공룡에 오히려 더 가까운 게 아닐까? 그런 존재가 되는게 더 바람직한 거 아닐까?
현실을 저주하면서도 이게 현실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마치 마약을 먹고 비틀거리면서도 마약을 섭취하는 것이 당연한거라고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가장 큰 우화는 우리가 믿는 현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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