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새로운 생각
0. 우리 시대의 새로운 생각
사람으로 채워진 거대한 방을 상상해 보자. 동쪽 벽에서 쾅하고 커다란 폭발이 일어난다면 동쪽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움찔하면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합의하여 동쪽 벽을 쳐다보기라는 운동을 시작하거나 서쪽으로 탈출하기 같은 운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하나의 생각이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고 또 하나의 새로운 생각이 대중화되는 시대에 속한다. 사실 그 생각의 시작은 20세기에 있었지만 이제 그 것이 퍼지는 일이 본격화하려고 한다. 쾅하고 터지는 폭발이란 옛 생각, 옛 시스템이 비효율과 불합리를 보이면서 무너지는 현상이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교육에서 경제에서 환경에서 학문의 추구에서 정치에서 주거에서 예술에서 각자 반응을 보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쪽벽을 쳐다 보았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런 각분야의 반응과 문제에 대한 대응, 대안은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한 주제다. 우리는 코앞의 문제를 잊어서는 안된다. 또 대기근이 다가오고 있다고 해도 쓸 물은 써야 한다. 무조건 거시적인 흐름만 더 깊은 의미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견하기에 그다지 관련성이 없어보이는 것들이 실은 모두 하나의 원인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도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의 반응과 대안은 같지 않지만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그 생각이 뭔지를 보다 분명히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동쪽 벽을 쳐다보는 우리의 행동이나 서쪽으로 탈출하는 우리의 집단적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그 소리를 듣지 못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쉬울 것이다.
인간의 사고의 범위는 시간에 따라 확장되어져 왔다. 그렇게 함에 따라 우리의 생활방식도 달라져 왔다. 그런데 사고가 확장되는데 있어서 결정적 사건이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의 생각, 하나의 아이디어가 탄생하고 대중화 되는 것이다. 그 생각자체는 처음부터 모두에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반복되고 대중에게 퍼져서 하나의 문화가 된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것은 마치 어떤 아이가 책을 읽다가 전에는 읽지 않았던 탐정소설을 읽게 되거나 과학서적을 읽게 되는 것과 같다. 일단 새로운 분야의 책이 가지는 매력을 알게 되면 읽을 책과 읽은 책의 목록은 빠르게 늘어난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심적인 생각이 퍼지게 되면 그것이 풍요로운 열매를 맺는다. 일찌기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화이트 헤드는 인류의 역사를 이렇게 어떤 생각이 적용되고 퍼지는 것으로 기술한 적이 있었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문화의 확산을 문화유전자 혹은 밈의 확산으로 불렀다. 아이디어 즉 생각은 나타나고 퍼진다는 관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나는 무엇이 옛 생각이고 무엇이 새로운 생각인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누구보다 내가 그것이 필요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새로운 생각은 비교적 최근에 퍼지기 시작했으므로 당연히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옛 생각도 분명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것에 너무 익숙해 졌기 때문이다. 옛 생각은 하나의 사고의 패러다임으로서 자신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보이지 않게하고 자신과 다른 종류의 생각은 말도 안되는 것이거나 아주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당연히 이 옛날 생각도 처음부터 당연시되고 대중화된 상태로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과학을 생각해 보자. 서구 문명의 시초라고 말해지는 그리스 시대에 과학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오늘날이나 17세기 이후의 유럽에서처럼 대중화된 것은 아니였다. 그때는 보편화된 인쇄술처럼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술적 여건이 준비되지 않았다. 심지어 과학혁명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시작되고도 과학적 방법이란 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비합리적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중세시절의 서구에서는 비신학적이라는 말이 비합리적이라는 말이었으므로 과학적 사고란 비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면 매우 미심쩍은 것이 많은, 근거없는 생각이었다. 때문에 브루노는 과학적 생각때문에 화형당했고 갈릴레오는 재판받아야 했다.
당대의 새로운 생각에 대한 그 의문과 회의는 흄이나 칸트같은 철학자들을 계속 고민하게 했다. 게다가 문제가 다 해결되어서 끝난게 아니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복잡한 논리적 철학적 말들 속에서 질문이 녹아 없어졌다 혹은 거대한 답들의 바닥에 깔려 버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20세기가 되었어도 세상에는 데카르트 이래의 사고의 오류를 논하는 리처드 로티같은 철학자가 있었다. 우리가 과학적 방법을 확신하게 된 것은 그 논리보다는 그 결과때문이다. 기적을 경험하고 신을 믿듯이 눈부신 과학의 성과는 사람들의 의심을 무너뜨렸다. 과학은 많은 편리한 기술발전의 바탕이되어 사람들의 자신감을 늘렸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과학을 골치 아픈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믿기 힘들지 모르지만 이 세상의 모든 전자기 현상은 막스웰의 방정식들로 모두 기술될 수 있다라는 사실앞에서 과학도들은 할 말을 잃는다. 미천한 인간이 생각해 낸 방정식들이 온 우주의 모든 사건에 적용되다니, 그리고 그 법칙이 이렇게 짧게 요약된다니! 이런 성취앞에서 확신은 저절로 무럭 무럭 솟아났다.
지금은 옛 생각이 되버린 그 당대의 새로운 생각에는 이름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계몽의 꿈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앞으로 차차 더 분명해 지리라 기대하지만 그 계몽의 꿈이란 대충 이렇다. 이 세상에는 문제들이 있다. 그 문제들이 있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를 알아 볼 수 있는 능력은 가졌지만 아직 진리를 찾아내지도 못했고 더구나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퍼뜨리지도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리를 들은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은 깨인 인간 즉 기존의 인간을 초월한 초인이 된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탐구는 그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로 채워진 세상에서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이같은 메세지들은 너무나 당연하거나 훌룡하게 들리는 것이어서 이것을 옛날 생각이라거나 한계를 들어낸 생각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충격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에 반대한다는 것은 분명히 불합리한 행동이라고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세상이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퍼뜨리는 계몽의 방식이 될거라고 믿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믿어도 된다. 나는 표현방식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말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답을 그 질문에 대해 내놓았는가 하는것이며 거기에서 우리는 뭘 느끼고 배웠는가 하는 것이다. 즉 체험이 중요하다. 그리고나면 남의 말들은 다 없어져도 좋다. 자기 말, 자기 느낌이 중요하다. 사실 남의 말에 집착하는 것은 계몽의 꿈의 일부다. 남의 말이 보편적 진리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새로운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얼마나 새로운가. 과학문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이전에도 이 세상에는 과학적 사고가 있었듯이 새로운 생각이란 것도 완전히 새로울 수는 없다. 우리가 시장경제나 과학이나 농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무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도 제한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처럼 새로운 생각도 보다 또렷해지고 나면 그 뿌리를 하염없이 옛날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질문은 그렇다면 왜 새로운 생각의 대중화는 하필 지금 이 시대에 일어나는 가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적어도 두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기술적 환경의 차이다. 인쇄기술의 발달로 인쇄물이 보편화되지 않았다면 과학문화는 그렇게 빨리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세기를 거치면서 크게 발전한 컴퓨터와 전자통신기술이 없다면 새로운 생각은 대중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또 하나는 세상을 지배하는 기존의 생각이 그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즉 낡은 생각이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생각이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새로운 생각이 뭔지를 쓰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준비가 되질 않았다. 준비없이 그건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게 할 때 그것은 즉각 이러저러한 사소한 것으로 분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낡은 시대안에서의 우리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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