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간의 가치
유년기의 실종이라는 책에서 닐 포스트만은 어린이 혹은 유년기라는 개념은 읽고 쓰기라는 개념이 보편화되면서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그전에도 물론 강자와 약자라는 구분은 있었겠지만 아이와 어른이라는 구분은 없었다는 것이다. 아이는 말하자면 그저 작은 어른이었다. 그런데 읽고 쓰기가 보편화되고 그것을 배우는 학교에 다니는 일이 보편화되면서 세상에는 읽고 쓸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구분 혹은 기초 교육과정을 마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구분이 생겼다. 너무 어려서 아직 기초 교육과정도 마치지 못한 어린 아이들은 좀 더 나이든 어른들과는 달리 아직 정상적인 시민으로 취급받을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들은 모르는 게 너무 많고 따라서 그들의 의견은 제한적인 가치만 있으며 그들은 보호받아야 하는 동시에 어른들에 의해서 그 행동이 제한되어야만 하는 존재다. 그들은 아직 이성적인 존재로, 제대로된 한명의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한 존재다. 이것은 귀족과 천민을 차별하는 논리가 되기도 했을 법하다.
비슷한 일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다. 최소한 당신이 부유한 나라에 태어났다면 오늘날은 그저 평범한 인간이 된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훨씬 복잡한 일이 되었다. 복잡한 세상에서 평범하다는 것은 간단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이정도 집, 이정도 차, 이정도 사교육비, 이정도 옷, 이정도 식비를 쓰지 못한다면 비참하다고 여겨지는 수준이 평범한 인간을 사회적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런 평범한 생활수준을 달성하기 위해 한 개인은 자연히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믿어지게 된다. 그런데 현대사회에는 기술과 정보가 아주 많이 축적 되어 있다. 사막에서 모래장사를 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방이 모래니까 그렇다. 마찬가지로 정보와 기술이 축적된 사회에서 상당한 수준의 소득을 올리고 싶다면 아주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그저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정도로는 현대사회에서 살아가기에 충분하지 않다.
경제활동의 본질은 상당부분 정보와 기술이다. 엔지니어나 학자만 그런게 아니다. 수박소매업자가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그가 소매가격보다 더 싼 가격에 수박을 구할 수 있고 소비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정보와 능력이 보편화되면 경쟁력이 하락하여 수박소매업자도 장사를 할 수가 없다. 그는 슈퍼마켓 체인점에서 단순노동을 하는 직업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고 그의 수입과 자유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같은 수준의 생활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는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거나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부가가치의 직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노동직이 아니라 대체가 어려워서 경쟁이 적은 전문직이라는 뜻인데 전문가가 되는 것은 당연히 많은 학습을 요구한다. 현대인은 한세기전이나 5백년전에 비하면 훨씬 더 많은 기술과 지식이 있어야 그저 보통의 삶을 달성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기술과 정보가 넘치기 때문이고 생활수준에 대한 욕심은 한없이 부풀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단순한 일들은 후진국의 값싼 노동인력이 하는게 아니라 아예 자동로봇이 하는 시대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인류의 출현이래로 변하지 않은 한가지 생존 조건이 있다. 그것은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태어난다는 것이고 인간의 수명이 증가하기는 했지만 그 육체적 전성기가 한없이 늘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노인의 학습능력과 일처리 능력이 젊은 사람과 같을 수는 없다. 원시인이나 현대인이나 태어날 때의 조건은 같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물론 각각의 시대에서 평범한 인간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서로 크게 다르다.
수백년전에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그 사람이 농사를 짓는 법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일이었을까? 부모를 보고 부모의 일을 거드는 것으로 기술적으로는 평생 쓸 것을 얼마지나지 않아 다 배우게 된다. 나는 결코 수백년전의 농사꾼이 현대인보다 더 행복했다거나 더 편하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적하는 것은 그저 가치있는 한명의 어른이 되는 것이 오늘날 얼마나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일인가 하는 것이다.
시점을 더 돌려서 아예 야생동물을 보자. 자연에서 태어난 원숭이나 가젤이 한 마리의 진짜 원숭이나 가젤이 되기 위해서 뭘 해야 할까? 나는 원숭이나 가젤이 반드시 인간보다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다만 원숭이나 가젤은 뭔가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거의 없을 거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뭔가가 되어야 한다. 오직 인간만이 뭔가가 되지 못해서 불행하다. 오직 인간만이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 그것도 인간이 지금과는 다른 뭔가가 되어야 하고 어딘가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자연속에서 태어난 인간은 인간 사회가 요구하는 기술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야생동물도 하늘을 나는 법이라던가 사냥 법을 배우지만 그것은 인간이 배워야 하는 것과는 수준이 너무 틀리다. 인간의 것은 본능과 타고난 재능 수준의 것을 한참 넘어서있다. 사자가 사냥법을 익히는 것과 비교했을 때 어떤 사람이 현대에서 엔지니어가 되거나 연예인이 되거나 프로 야구선수가 되거나 학자가 되기위해서는 훨씬 더 길고 어려운 학습을 거쳐야 한다.
인간의 학습시간은 점점 늘어왔고 특히 최근에는 훨씬 더 굉장한 속력으로 늘어나고 있다. 닐 포스트만이 지적하듯이 유년기는 사라졌다. 어린이가 어른처럼 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어린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유년기가 시작되었달까. 불과 한세기 전만 해도 대학은 소수의 엘리트만이 가는 곳이었지만 지식이 폭팔적으로 증가하는 현대의 선진국에서는 기본적으로 누구나 대학교육이 필요하다. 적어도 소수의 사람들만 대학에 가는 것은 아니고 설사 대학에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고부가가치 직종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대학교육 이상의 긴 교육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모두 대학에 갈 필요가 없는 사회가 된다고 해도 어떤 형태로든 전문가가 되는 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회사에 들어가면 다시 긴 교육을 받아야 한다. 박사를 받아도 박사후과정을 거치는 것이 보편화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한국에서는 변화의 정도가 더 심하긴 했지만 80년전쯤이면 고등학교만 졸업한 사람도 지식인 취급을 받았다.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으로 학력이 끝난 사람은 대개 교육을 평균수준 이하로 받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세상이 변하는 추세를 보았을 때 우리는 얼마지나지 않아 대학도 지금의 고등학교처럼 변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하게 된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학하고 평준화되어 명문대학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교수들은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처럼 단순 교육만 맡을 뿐 연구는 통상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위의 고급 교육기관이 다시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교육은 점점 더 길어지기만 한다. 이미 대학이 위기에 빠져있다고 국내외의 여러사람이 지적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실도 이런 추세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점점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고 어떤 의미에서 점점 더 모자란 존재로 태어나게 되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거의 20년의 교육을 받아도 경제적으로 한 명의 가치있는 성인이 되는 것이 쉽지 않다. 다시 말해 취업과 돈벌기는 쉽지 않다. 취업이 되어도 직장에서 해고당하기 쉽다. 직장을 다니고 있어도 이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생활수준을 달성하거나 유지하려면 미친듯이 일하면서 스트레스와 싸워야 한다. 가난뱅이는 물론 부자도 바쁘다. 부모가 큰 재산을 물려줘도 대개는 복잡한 세상속에서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공부해야 한다. 현대인은 바쁜 것에 익숙해서 종종 일중독에 빠지고 정서불안에 빠진다.
만약 복지의 개념이나 사회적 보험의 개념이 없이 그저 수요와 공급의 잔혹한 시장논리만 적용한다면 현대같은 지옥은 지구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 현대에서 인간은 지독하게 가난하게, 지독하게 위험하게 태어난다. 인간은 노예로 빚쟁이로 태어난다. '제대로된' 혹은 '평범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도 어린 아이는 많은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많은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공부하기란 그 자체도 힘이 드는 것이지만 하나의 독립된 존재가 되는 일이 한없이 뒤로 늦춰진다는 것은 그 자체도 힘든 일이다. 학교는 권리가 제한되고 현실과 분리된 가상공간이다. 현실과 부딪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또한 현실에서 끝없이 분리되어 살아가는 일도 그렇게 즐거울 수는 없다. 학교는 때로 감옥이나 수용소같다. 부모들도 아이를 키우는 일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부담스러워 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예 가정을 이루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한다. 대학교육은 보편화되어가는데도 교육비는 오르고 부동산은 비싸만 진다. 인간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더 떨어진다. 아이들은 부모로 부터 돈을 물려받지 않으면 자기 교육과 들어가 살 집을 구하기 위해서 태어나자마자 평생 일해서 갚아야 할 빚이 생길 판이다. 이것은 노비로 태어나는 것과 차이가 없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는 인간의 가치가 떨어진 시대, 그것도 그 가치가 점점 더 빨리 떨어지고 있는 시대다. 불행히도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나라가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법칙이 통하는 나라라면 그 사람은 단지 생존하기 위해서도 고통받고 모욕을 참아야 한다.
현대의 인간은 그저 자연체로 살 수가 없다. 그들은 뭔가가 되도록 요구받고 스스로 그렇게 되야한다고 느낀다. 그것이 숭고한 행위라고 배운다. 마치 종교적 목적을 위해 고행을 무릅써야 한다는 논리와 비슷하다. 그런데 그게 어렵다. 그게 점점 더 잘 안된다. 그러니까 현대인은 우울해지기 쉽다. 스스로가 무가치하다고 느끼기 쉽다. 현대인은 자신이 아직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고통받는다. 그냥 자기 자신으로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게으름이다. 현대인은 자신을 깍아서 현대 사회에 걸맞는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긴 시간동안 자기를 괴롭혀야 한다. 이 길고 긴 고행의 길에 대해 더 기가막힌 것은 이 긴 고행의 길은 언젠가 올 미래에는 무의미한 고문처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마치 비종교적 사회에 사는 우리들에게 종교적 사회에서 종교적 각성을 위해 오랜 고행을 하는 것이 무의미한 자기 고문처럼 보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교육 기간이 길어지면서 평가와 경쟁은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변하기도 한다. 과연 영재가 무엇인지, 졸업장의 의미는 무엇인지는 점점 더 답하기 어려워진다. 가정위에 가정이 쌓이기 때문이다.
현대에서 무한 경쟁을 하는 나라는 지옥이기 때문에 선진국은 경쟁을 제한하고 시민들에게 기회를 더주는 복지를 실시한다. 그 나라의 사람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않으면 전문화가 진행된 나라는 생지옥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오랜 교육기간과 투자가 필요하다. 교육을 통한 재분배가 일어나지 않으면 오직 부자들의 자식들만이 직위를 물려 받고 나머지는 생존의 위기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복지를 위해서는 재원이 필요하다. 국가의 부채는 늘어가는데 회사들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세금내기를 회피하고 높은 세금을 요구하는 복지국가에서 고소득자들이 탈출하기도 하는 가운데 언제까지 이것이 대안이 될런지는 알 수 없다.
더구나 근원적인 문제는 복지를 실시해도 해결이 안된다. 설사 국가에서 음식 쿠폰이나 무상 주거같은 것을 제공해서 의식주를 해결해 준다고 해도, 또 계속 교육을 받도록 도와준다고 해도 그렇다. 사회에 의해서 먹여지고 길러지는 상태를 계속해서 탈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존감을 가지기 힘들다. 그들은 여러가지 실패와 거부를 통해 끊임없이 낙오자, 저능아, 게으른자로 비판받는다. 이런 사회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자포자기하기 쉽다. 복지 시스템을 악용하거나 범죄자로 변해서 사회의 더더욱 큰 짐으로 변하기 쉬울 것이다.
지구밖에서 지구를 보면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진 지구가 매끈한 구체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시점을 좀 멀리해서 보면 현대 사회는 결국 승자가 없는 게임을 하고 있다. 대다수의 인간을 가치가 없는 존재로 만들고 있으며 그 정도와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지식은 지금 이순간에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제 인간은 더 강력한 인공지능을 가진 로보트를 만든다. 설사 지금이 견딜만하다고 치더라도 과연 30년뒤에는 인간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30년 뒤의 평범한 인간은 얼마나 많은 것을 공부해야 하는 것일까? 언젠가는 사람들이 30년이나 40년씩 교육과정을 마쳐야 한명의 떳떳한 시민행세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오게 되는 것일까? 인간의 노화속도를 생각할 때 그것이 말이 되는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녹음기 이야기가 있다. 녹음기가 나오기 이전 유럽에서는 식당에서마다 가수가 직접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물론 전국 최고의 가수는 인기가 좋았겠지만 그런 가수가 모든 식당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따라서 많은 3류가수도 자기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고 살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 동네 최고의 가수도 나름의 자부심과 수입을 가지고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녹음기가 출현하자 이제 전국1등이나 전세계 1등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시대가 된다. 3류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1등가수가 판매하는 레코드를 사서 녹음된 음악을 듣는 쪽이 더 좋기 때문이다. 이것은 3류가수들이 더 이상 가수로 살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풍부한 의미를 가진 이야기는 하나의 중대한 질문을 남긴다. 그 3류가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발전하는 세계는 또다른 직장을 많이 만들어 내니까 그들은 다른 직업을 찾아서 오히려 더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가능한 이야기인 동시에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이기도 하다. 초일류가 되는 것은 많은 재능뿐만 아니라 길고 긴 훈련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운이 필요하다. 사실 재능과 긴 훈련이 가능한 환경자체가 운의 일부다. 노력은 존경받을 만한 것이고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 성공에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노력만 한다고 누구나 미국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가 될 수는 없다. 수없이 많은 직업이 있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초일류만 영광을 독식하는 사회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은 낙오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생존위기에 빠지거나 운이 좋아서 복지혜택으로 혹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그저 밥이나 먹고 살겠지만 자신을 계속 패배자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은 무의미하다고 느끼며 살게 되기 쉬울 것이다.
이 모든 변화의 배후에는 계몽의 꿈이 있다. 우리는 높고 높은 진리의 탑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더 훌룡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했다. 아니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그 진리의 탑안에서 인간은 한없이 비자연스런 존재로 잡아당겨 진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그런 형태속에서 행복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오늘날은 과거보다 자살률이 훨씬 높다. 2013년 한국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30대 이전의 세대에서는 최고 사망원인이 자살로 나타날 정도다. 노환으로 인한 사망에 가려져 있을 뿐 노인들의 자살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 사실은 여러가지로 설명되어질 수 있으며 자살률 하나가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좋은 사회인가를 측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사회에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거에 비해 우리 사회는 발전했다고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수 있을까? 더구나 지금의 추세로 보아 어떤 새로운 변화가 있지 않는다면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전망하게 되는가?
더 훌룡한 존재가 되려는 노력은 두가지로 분류할 수있다. 하나는 개인으로서의 내가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계몽의 꿈의 본질이다. 이것은 우리가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퍼뜨려서 모든 사람들이 더 훌룡한 인간이 되었을 때 세상의 문제도 사라지게 된다는 이데올로기다. 언뜻 보면 자명하고 틀리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멋진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과신일 수도 있다. 진리가 양자역학 이상의 복잡한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그걸 배우라고 주문하는 것은 고문이 될 것이다.
계몽의 꿈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더 독립적이고 더 뛰어난 인간들로 이뤄진 사회가 더 합리적인 집단 행동을 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학습을 촉구한다.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독립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리는 누가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인가? 그 주체는 개인이다. 내가 발견하고 내가 이해하고 내가 체득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핵심적 개념은 이성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다. 계몽의 꿈이 지배한 시대에 개인의 권리와 의무가 더 세세히 정의되고 그래서 어떤 의미로 개인이 탄생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물건의 독점적 소유에서 땅의 독점적 소유를 지나 아이디어의 독점적 소유, 심지어 생명의 독점적 소유를 거론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자부심을 한없이 부풀려왔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훌룡한 일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고 부작용이 있다. 위대한 성인, 위대한 선각자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류를 불행하게 만든다. 배우고 익히는 것은 훌룡한 일이지만 아직 다 배우지 못하고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모자란 인간으로 파악하게 된다면 곤란하다. 게다가 다 배우게 되는 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인간 능력의 첨단에 있는 사람들, 특히 광고와 과장에 의해서 더 대단해 보이게 만들어 진 사람들이 이정도가 응당 배워야 하는 수준이다라며 점점 허들을 높일 때 사람들이 느끼는 자신의 현재 위치는 한없이 낮아 보이게 된다.
나는 배우는 것이 쓸모없다거나 배움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계몽의 꿈 이데올로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이 모두 독립적인 지성인이 되는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설사 우연히 그런 미래가 온 것으로 생각되는 때가 와도 그 미래가 인간이 행복한 미래이며 유지가능한 미래인지는 좋게 말해줘도 확실치 않다. 게다가 독립적 인간에 대한 강조는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인간은 더 외로워지고 더 약해지기도 했다.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전략, 새로운 시점이 필요하다.
이러한 현실은 새로운 돌파구에 대한 사회적 압력을 발생시킨다. 우리는 미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더 훌룡한 존재가 되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방식은 바로 인간과 인간은 서로 연결됨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개미의 언어와 개미의 지능을 생각했을 때 개미는 인간이 발견한 물리학 법칙을 이해할 수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개미의 언어 구조와 그 복잡성이 물리학 법칙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엄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페로몬으로 슈뢰딩거 방정식에 대한 이야기를 소통할 수 있을까? 포크레인처럼 크고 거친 기구로 작은 시계를 고치는 일을 하기는 불가능하다. 움직임의 오차범위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시도도 하지 않겠지만 시도한다고 해도 개미는 스스로의 언어 구조가 가진 약점으로 인해 온갖 혼란만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 물리학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문제들이 단순히 개미의 언어 문제일 뿐 환상인 것은 아니다. 풀어야 할 진짜 문제는 존재한다. 개미는 집단으로서 물리학 법칙이 만들어 내는 문제들을 해결해 가면서 집을 짓고 먹이를 끌어오고 유충을 키운다. 어떤 한마리의 개미가 그것을 전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집단으로서의 개미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뇌가 수없이 많은 신경세포로 이뤄져 있으며 하나의 뇌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하나 하나의 신경세포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보기에 너무 단순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우리가 우리의 무지를 대처하는 또다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의 꿈은 무지가 발견되면 무지와 싸우고 그것을 없애려고 한다. 무지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라는 식이다. 우리는 무지하다는 우리의 원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분명 칭찬받을 만한 자세이지만 그 씨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앞에 무지의 벽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모두 없애고 난 다음에 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무지와 싸워야 한다. 배워야 할 것이 한없이 많아지는 시대에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배우기만 하지말고 세상에 뛰어들어야 한다.
결국 우리는 무지와 함께 살아가는 법, 무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자전거타기를 다 배우고 페달을 밟는 것이 아니라 페달을 밟아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균형잡는 방법을 배워야 하듯이 세상과 어울려야 한다. 세상은 더 이상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호흡을 맞춰야할 나의 댄스 파트너다. 내가 다 몰라도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내 환경의 존재에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환경에 기대야 한다. 우리는 환경의 진실을 추구하는 동시에 진실추구보다는 환경과의 공존을 생각하고 그 환경과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역설적이게도 독립적 인간을 강조하는 계몽의 꿈은 인간의 독립성을 빼앗는다. 진리를 너무 쉽게 믿으며 진리의 상호배타성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옳으면 네가 틀리다. 이러니까 결국 모두는 모두와 자기의 자아를 걸고 싸우게 된다. 뉴튼의 법칙은 이 우주가 끝날 때까지 뉴튼의 법칙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생각, 우리의 관점을 이 사회에 박아넣고 싶다. 결국 독재자나 시스템의 관점이 모두에게 강제된다. 진리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따르지 않는 것은 합리적 토론에 승복하지 않는 비윤리적인 일로 여겨진다. 계몽의 꿈이란 진리를 사람들에게 퍼뜨리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진리는 누가 누구의 머리에 집어넣는 것일까?
새로운 생각은 우리의 무지를 인정한다. 새로운 생각은 질문을 바꾼다. 우리의 질문은 너는 누구인가에서 너와 함께 살아가는 더 좋은 규칙은 무엇인가로 바뀌는 것이다. 새로운 생각은 나와 너가 모두 고립되어 정의되고 존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버린다는 점에서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나와 너의 자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모두에게 숨쉴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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