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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우리시대의 새로운 생각

4. 다원화 시대의 자기 찾기 2

by 격암(강국진) 2016. 2. 15.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만든 세계에 갇히게 되는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답하려고 할 때에 빠지기 쉬운 함정 아니 빠질 수 밖에 없는 함정은 몇몇 자명해 보이는 명제를 절대적으로 믿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했던 인간은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다같은 말이 그렇다. 일단 그런 가정들 몇개인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는 어느새 자기에 대한 또렷한 인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더 큰 진짜 세계의 관점으로 보면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누구인지를 답하는데 있어서 내 시각, 내 인식과정은 끼어들 틈이 없다. 내가 존재하는 세계는 대개는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졌지만 견고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남의 눈으로 자기를 보고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일 수 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설사 그 가정들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들이 가정이며 임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잊는 순간, 즉 우리의 무지를 잊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그 감옥에 갇힌다. 

 

자기발견이란 결국 자아와 세계의 인식이고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어떤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수용하는가 하는 것들에 영향을 받는다. 자기발견이란 객관적인 이 세계에서 나의 위치가 어디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보는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이 세계를 만들어 낸 나와 다른 인간들은 어쩌다가 이런 세계를 만들어 냈는가의 문제다. 주관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환각은 아니다. 심리학적 효과가 경제적 효과가 되고 경제적 효과는 우리 일상의 문제가 되는 일을 보게 되는 것은 흔하다. 우리의 주관적 믿음은 종종 아주 단단한 현실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잘 아는 것처럼 착각하곤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시각에 맹점을 가지고 있다. 시신경과 혈관이 통과하는 망막의 일부분에서는 시각신호를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런 맹점을 자각하지 못한다. 시각정보의 측면에서 보면 그래야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우리는 시커먼 구멍을 늘 보게 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뇌는 우리가 보는 세상의 그림에 난 구멍을 무의식의 수준에서 적당히 주변정보로 메꿔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구멍의 존재에 대해 일부러 배우기 전에는 대부분 의식하지 못한다. 

 

심리적인 맹점도 있다.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의 책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바로 이 심리적인 맹점을 지적한다. 그들의 고릴라 비디오는 공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고릴라가 지나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고릴라가 사람들 사이를 지나간다는 특이하고도 분명한 사건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다른 것에 집중하도록 주문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생각보다 훨씬 적은 것을 본다. 그래서 우리가 뭘 보기를 놓쳤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중에 비디오에 고릴라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래서 충격에 빠진다. 저렇게 분명한 것을 어떻게 보지 못했을 수가 있었을까 하고 놀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실험이라던가 스키너의 보상과 강화이론등 많은 심리학적 연구들이 20세기 전반에 걸쳐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유롭지 못하고 독립적이지 못한 존재라는 점을 증명해 왔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안에서 자유로이 뭔가를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매순간 기억하고 인식한 것들의 합이다. 만약 우리가 3초정도의 기억력밖에 없다면 불에 손을 집어넣어서 화상을 입어도 3초후에는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의 삶은 반복되는 실수로 가득 채워져있는 것 같다. 이것은 이미 우리의 인식이나 기억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끔찍한 고통속에서 살고 있거나 굉장히 잔인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오직 그것을 인식할 때에만 우리의 삶을 끔찍하거나 잔인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인식한 세상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여기며 그것이 전부라고 여긴다. 자신이 아직 인식하지 못한 것이 많이 있을거라고 다시말해 자기가 놓친 고릴라가 많이 있을거라고는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뭔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집중이 필요하고, 그와 관련된 추상적 개념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부라는 이름이 뭔지 알기 때문에 내가 어부다라는 생각을 쉽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어부라는 개념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어부인 자신을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것을 퍼뜨리는 일이 지구전체를 뒤흔드는 공산혁명으로 번진 일을 알고 있다. 무지한 농민은 자기가 농민인 줄 모른다. 무지한 노예는 자기가 노예인 줄 모른다. 무지한 여성은 자기가 여성인줄 모른다. 그래서 적어도 처음에는 노동자문학이니 농민문학같은 것이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층에 의해 집필되고 여성문학이 남성에 의해 집필되곤 한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현실이상으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의해 조각되고 건설된 것이다. 

 

계몽의 꿈이 가지는 문제는 그 수동성에 있다. 계몽의 꿈은 이 객관적이고 유일한 세계에 존재하는 진실들을 발견하고 전파하려고 한다. 그런데 전체적 과정을 가만히 보면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것을 결국 타인이 결정하게 만든다. 어딘가에 있는 머리 좋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여러 개념을 만들고 그걸 우리 머리속에 집어 넣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의 주관성을 숨기고 있거나 자각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그들은 내가 이렇다라고 말하는 대신 세상이 이렇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명해 보이는 모든 명제들은 어떤 가정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가정들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부활하는 순간이다. 이제 우리가 뭘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색안경이 그 안경을 통해서 보이는 모습에 책임이 있는 것이상으로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의 모습에 크게 책임이 있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세상에서 나의 역할은 매우 크다. 이걸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서 우리의 자아를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다원화시대의 자기 찾기는 지동설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는 과학한다는 것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주었던 충격에 대해 말한다. 그에 따르면 지동설이 놀라운 것이 되는 이유는 단순히 지구가 움직인다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주장이 우리의 체험적 사실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즉 우리는 감각적으로 지구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지 않는다. 땅은 평평한 것같고 적어도 단단하게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같다.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이유들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지만 왜 지구가 움직이는 데 우리가 그것을 느낄 수 없는 지를 처음부터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동설이 결국 옳은 것으로 믿어진 데에는 이론적 장점이 크게 작용했다. 이것은 지구가 움직인다고 생각할 때와 태양이나 별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할 때 과연 어느 쪽이 더 세상에 대해 간단한 그림을 보여주는가에 대한 것이다. 천동설에 근거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별들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아주 많은 수의 원을 동원해야 했다. 지동설이 옳다는 것을 깨닫자 사람들은 동서남북이라던가 아래나 위의 개념이 유한한 의미만을 가진다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되었고 우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다. 지구는 허공에 떠 있는 구체였다. 

 

하지만 한가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감각적으로 보면 움직이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같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일단 감각 혹은 체험과 이론의 대립 속에서 이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자 인간은 정신적 의미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감각을 넘어서는 세계도 나중에는 설명가능하고 받아들여질 수있는 그리고 오히려 더 만족스러운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세상은 그냥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의 것이 아니다. 이걸 받아들이며 인간의 사고는 추상적 세계로 확장되게 된다. 페터 피셔는 이는 칸트철학과도 연결된다고 말한다. 진짜 외부는 알 수 없으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한 결과만을 알 수 있고 그 인식과정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부라는 생각은 물론 추상적이고 감각을 넘어서 있었다. 

 

만약 지동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면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같은 추상적 이론은 거론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조잡한 아이디어의 수준에서 일상의 감각을 말도 안되게 거부하는 그런 이론들은 당장 거부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을 만들어 낸 과학자들은 아이디어는 미친 소리처럼 들릴 수록 더 좋다는 생각을 한다. 오히려 충분히 미치지 못한게 문제라는 것이다. 양자역학은 인과론과 실체라는 개념까지 어느 정도 파괴했다. 과학적으로 말했을 때 그런 것들도 한계가 있는 개념들이다. 이것이 쉬뢰딩거의 고양이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이유다. 

 

우리는 여러가지 기본적 가정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너무나 당연해서 그것은 원래 그렇다라고 하는 것이고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들은 엉성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 인간은 이기적이다라고 믿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에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라고 믿었던 물리학적 가설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다. 이 기본적 가정은 그 것의 너머에 있는 무지를 무시하게 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무지의 벽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무지의 벽은 마치 우리가 감각으로 인식한 세계의 어떤 면같다. 진짜같지만 사실은 진짜가 아니다. 지구는 돌고 있는 것같지 않지만 사실 지구가 돌고 있듯이 말이다. 무지의 벽들은 우리가 보는 세계를 고정시킨다. 무지의 벽들은 우리가 단단하다고 믿고 의지하는 바닥이다. 우리 시대의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의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진짜로 고정된 바닥따위는 없으며 그 무지의 벽들은 작게는 개인이 크게는 인류라는 집단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깨닫는 것이다. 지구 주변을 태양이 도는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주변을 돈다. 객관적이고 유일한 세계에서의 위치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결정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하는 것이 이 세계를 결정한다. 우리의 중요성은 증대되었다.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고 갈릴레오와 뉴튼을 거쳐 과학혁명의 시대가 열렸다. 새로이 열린 우주공간에서 법칙을 탐구하는 것이 지상의 사과에 대한 법칙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동설이라고 부를만한 관점의 변화가 새로운 과학을 만들어 낼 것인가?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미래의 티코 브라헤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이 인간의 마음 혹은 인간의 인지과정과 뇌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를 축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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