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여행의 끝
나는 현대인의 불안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질문이 없는 답은 무의미하며 언제나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애초에 문제가 없거나 우리가 가진 문제를 누군가가 이미 해결했다면 고민도 필요없을 것이다. 세상을 둘러보면 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쉽게 발견한다. 한정된 지구 자원을 생각하면 무한대의 소비란 그 한계가 뻔한 약속인데도 마치 무한정 성장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바보가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계는 마치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믿는 것처럼 움직여 가는 것같다.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다른 분야에서도 많이 한다. 교육문제나 노후대책문제도 그렇고 주거문제도 그렇다. 전반적인 경제정책에서도 그렇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세계의 문제에 반응을 보인다. 지방자치의 강화도 그렇고 마을 만들기도 그렇고 대안교육도 그렇고 공유경제도 그렇다. 협동조합만들기도 그렇고 지역화폐운동도 그렇고 환경운동도 그렇고 작은 집만들기 운동도 그렇다.
그런데 크게 보면 어이가 없는 일들이 생긴다. 터무니 없는 사람이 선거에서 이기고 중요한 자리를 맡는다. 그리고 터무니 없는 정책들이 실시된다. 마치 똑똑한 인간들이 모여서 더 바보가 되기로 결심한 것같다. 과학시대를 사는 우리는 종교시대를 돌아볼 때 불합리함을 발견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과학시대가 가진 불합리를 계속 목격하는 느낌이다. 우리는 종종 그 문제의 근원을 때로 어떤 특정 권력자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나 어떤 계층의 탐욕문제 혹은 그저 우리 모두의 욕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것도 문제다. 하지만 그것은 답을 너무 쉽고 빠르게 발견한 것이다. 진짜 문제는 어떤 개인이나 소수의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기적처럼 정권이 바뀌고 책임자가 바뀌어도 세상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자기를 억지로 자제하려고 해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오직 우리의 인식이 바뀔 때만 해결 된다.
나는 그 불안과 불합리의 뿌리를 계몽주의라고 지목했다. 진리를 찾고 발견한 진리를 퍼뜨려서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문제를 만들고 있다고 말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보가 폭증하는 전자매체의 시대에 한계가 더욱 극명해 지는 방식의 사고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계몽주의적 이상을 나쁜 것으로만 여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계몽주의와 새로운 생각의 관계를 뉴튼의 물리학과 상대성 이론의 관계처럼 생각한다. 그것이 너무 거창하게 들린다면 지동설 이전의 세계와 지동설 이후의 세계라고 불러도 좋다.
뉴튼의 물리학은 어떤 극한에서 현실과 차이를 만들어 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한 진리다. 우리는 그것이 유효한 아주 넓은 영역에서 뉴튼의 물리학을 앞으로도 잘 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구가 움직이고 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매일 매일의 일상에서는 우리는 대부분 지구는 평평하며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을 계몽주의적 이상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섣부르게 모든 것을 상대주의적으로 해석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진리를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것을 퍼뜨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계몽주의에 대한 기나긴 부정끝에 그것을 긍정하는 말을 적는 것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계몽주의적 사고 방식이란 거의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다. 인간의 호기심, 성장하여 다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계몽주의의 뿌리다. 그러니까 계몽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런 식으로 인간은 행복해 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배우고 성장하는 것에서 또 배운 것을 남에게 알려주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우연한 일이라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지만 공자의 논어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 즉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나에게 의미가 있는 일로 생각된다. 나는 그 말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명령이나 당위의 말이라기 보다는 이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라는 발견의 말로 여겨지는 것이다.
다만 이 모든 계몽주의의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무지한 상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뭘 모르는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착각해서도 안된다. 우리가 발견한 진리에 대해 과도한 확신과 애착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럴 때 우리는 뉴튼의 물리학은 어떤 극한에서 진실이 아니며 지구가 평평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은 어떤 상황에서는 터무니 없는 오류라는 것을 잊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터무니 없는 신화나 존재하지 않는 유령들에게 휘둘리게 될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많은 다른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강하게 계몽주의를 믿었다. 혹은 다만 나는 그 때 더 젊었던 것일 뿐이런지도 모른다. 물리학도였던 나는 이 세상에 대한 진리를 믿었고 그걸 어딘가에서 배울 수 있거나 내가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퍼뜨리고 남에게 설득하는 것이 이 세상을 좋게 만든다고 믿었다. 나는 심지어 지금도 그 믿음을 실천하고 있다. 내가 이런 글들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나 자신에게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하여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욕망때문이지만 동시에 그 이야기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이것은 여전히 계몽주의적 이상의 연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나는 다만 나 나름의 경험과 사색을 통해 계몽주의에 대한 약간의 수정과 한계를 배웠을 뿐이다.
새로운 생각은 무엇일까? 지금도 그것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전에는 더 어려웠다. 나는 20세기를 거치면서 여기저기에서 벌어졌던 사람들의 민주화 운동이나 반전운동이 종종 예술에 의존하고 심지어 성적 일탈이나 마약으로 인한 환각으로 까지 번졌던 일들의 배후에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문제는 문자의 이성 그 자체였고 그걸로 소통이 안되는 어떤 것을 전달하려고 하다보니까 예술같은 다른 매체를 사용하거나 마약으로 인한 환각을 쓰게 된 것이다. 세상이 미쳐있다고 느껴는 지는데 문자로는 소통이 안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물론 어떤 사람들은 문자를 써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는데 그것은 매우 매우 추상적 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이미 대중이 계몽주의의 문제를 더 심하게 느끼고 동시에 여러가지 추상적 체험에 길들여진 상태다. 우리는 여러가지 새로운 체험을 이미 전자매체를 통해 경험했다. 20세기의 작가들은 그런 독자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우리는 비록 전자 매체의 시대가 완전히 본격화되지 않았지만 훨씬 더 많은 체험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변화는 이미 진행되어 오늘날에는 뇌과학과 인지과학분야의 결과들도 축적되어져 있고 서점은 그런 분야의 책으로 가득하다. 21세기의 우리는 조금은 그때와는 다르게 세상을 바꿔 보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길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말해온 것은 그 핵심에 있어서 단순하다. 나는 다만 우리의 무지와 한계에 대한 고민없이는 우리는 바보같은 실수를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진리에 대한 명제도 그 밑에는 가정들이 존재한다. 그 자명해 보이는 가정들은 종종 우리가 지금 확인해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더 나쁜 것은 그 가정들은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나머지 우리가 뭔가를 가정한다는 생각자체를 들게 하지 않아서 그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뭘 가정하고 있는지 대개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발견한 진리를 너무 강조하는 계몽주의는 패러다임을 더욱 강화해서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탈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가정들은 이제 거꾸로 그 진리에 대한 믿음때문에 더더욱 확실한 토대로 믿어진다. 진리를 소중히 여길 수록 진리는 멀어지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각자 다른 것을 보고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것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한 명 한 명의 인식이 가진 한계를 서로 깨주고 발전시켜 줄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성공적이었고 여전히 훌룡한 것이지만 여기에도 적어도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집단으로서의 인간의 인식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집단으로서의 인간도 패러다임에 빠진다. 자기가 뭘 가정하는지 모르면서도 지나친 확신에 빠진다. 그것은 언제나 그럴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한계를 기억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계몽주의에 눈이 멀어서 우리가 알게 된것을 맹신하게 되는가의 문제다.
둘째로 더 심각한 것은 개인이 가진 능력과 시간도 유한하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태어나고 그 기억력도 한계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인류전체가 가진 인식의 크기가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고 많은 것들이 전문화 되었다. 오늘날에는 천재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아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행운아도 결코 인류 문화 전반에 대해 모두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압도적 다수의 인간은 그냥 남의 말을 믿을 뿐이다. 예를 들어 물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물리학의 이론을 아는데 한계가 있게 된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과학은 더 이상 지구는 돌고 있다는 식의 단순한 발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자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려면 종종 그 개념의 이해를 위해 긴 공부가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법도 의술도 교육도 건축도 모두 자기들 나름의 말의 시스템을 만들고 키워온 사람들 다시 말해 전문가들에 의해 주도 되어지며 비전문가들은 그저 막연히 그 의미들을 추측할 뿐이다. 그러니까 거대한 과학 프로젝트, 거대한 개발 프로젝트, 거대한 의료, 교육, 금융 프로젝트들이 발표되고 실행될 때 인간은 왜소해 진다. 개인의 삶과 너무 먼 곳에 있는 그런 계획의 전체적인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기가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정말 뭔가를 알고서 독립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면 우리는 평생 공부만 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상황은 급속도로 더 나빠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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