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간의 세계가 문자의 세계에서 전자매체의 세계로 교체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미 정보는 폭증하고 있고 인공지능같이 큰 데이터를 다루는 기술이 증가할 수록 그 증가속력은 더더욱 커질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기계가 직접 정보를 채집하고 그것을 가공하고 퍼뜨리는 세계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정보의 폭증은 위에서 말한 문제를 극도로 나쁘게 만든다. 우리의 세계가 우리의 인식과 지식의 결과라는 점에서 이것은 세계가 크게 바뀌는 것이다.
전자 매체의 세계란 어떤 것일까?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약 1960년대에 이미 유튜브와 구글 검색과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1960년대의 세계는 어땠을까? 베트남전쟁에 대해 한국인과 미국인이 요즘처럼 쉽게 사진과 동영상과 기사를 구할 수 있다면 어땠을까? 세계2차세계대전때 일본인들이 일본군인들이 하는 일을 생생하게 유튜브로 봤다면 어땠을까? 세상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잘 모르는 일에는 동의하기가 쉽다. 그러나 내가 스위치를 누르고 한 표를 행사하고 침묵으로 뭔가에 동의에 주었을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를 잘 알게 될 때, 그것을 생생하게 체험할 때, 우리의 선택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추상적인 단어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동영상으로 경험한다면 우리가 전쟁에 대해 가지는 인식과 판단은 다를 것이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이미 전자매체에 의해 크게 달라졌다.
이제 21세기로 돌아와 보자. 그리고 미래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가 이미 유튜브와 구글과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래의 우리는 그것들을 훨씬 뛰어넘는 정보 환경을 가지고 우리를 볼 것이다. 그리고 생각할 것이다. 저 미개했던 시절 제대로된 정보환경이 있었다면 사람들의 인식과 판단은 달랐을 텐데 하고 말이다.
정보폭발의 시대에 우리 앞에는 동서양에 축적된 문화적 유산이 훨씬 더 생생히 펼쳐질 것이고 철학 문학 과학 음악등 여러분야의 자료가 끝없이 제시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 만화나 유럽 오페라나 미국의 뮤지컬등 여러가지 분야의 것들이 끝없이 정리되어 우리 앞에 늘어설 것이다. 문화적 컨텐츠는 모두 저장된다. 그런데 20세기 이래로 제작된 드라마와 영화의 양만 해도 끝이 없다고 할 정도다. 그리고 지금도 맹렬히 문화 컨텐츠는 쌓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물을 가능한한 문자의 형태가 아니라 그것을 직접 경험하는 형태로 접하게 될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한 책을 읽고 외우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조선시대를 재현한 가상현실 세계로 들어가 그 시대를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식일 것이다. 자료가 증가할 수록 우리는 매사를 이렇게 우리 눈으로 직접 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문자의 시대가 신화의 시대의 끝을 시작시켰듯이 많은 정신적 선입견과 신화를 허무는 시대가 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허물어지고 많은 것이 가까워 질 것이다. 나는 구글 스트리트 뷰가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이 얼마나 신기하게 여겨졌는가를 기억한다. 세계 어디든 우리는 클릭 한번으로 그 거리를 걷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기술이 더 발달하고 데이터가 쌓이면 우리는 정말 말 그대로 시공을 뛰어넘게 될 것이다.
한 때 세계에는 마르코 폴로처럼 세계를 여행한 사람이 아주 드물었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아주 많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도 드물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세계의 여기저기를 방문하고 거기서 살아보기도 한다. 미래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별로 들이지 않고 그렇게 살아 본 것처럼 느낄 수 있는 세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새나 사자 혹은 돌고래나 고래의 삶도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유명인의 삶도 더 생생하게 체험하고 극한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삶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낯선 고장의 사람들과 실감나게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면 그 대지진의 한 가운데에 앉아서 그 대지진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아프칸이 전쟁으로 시끄럽다고 하면 그 전쟁의 한가운데로 즉각 가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전 세계의 구석 구석을 클릭 한번으로 가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유통의 발달로 그들의 음식을 포함한 문화도 집에서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화성으로 이주를 하는 미래는 아직 멀지만 인간이 지구를 벗어나 달과 화성으로 가상현실 여행을 가는 날은 머지않아 오게 될 것이다.
그럼 우리의 세계 인식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이 모든 체험의 끝에서 우리는 뭘 발견하게 될 것인가. 그것은 홈(home) 즉 나의 집이다. 세계를 체험하면 체험할 수록 더 많은 방랑을 할 수록 우리는 뿌리박는다는 것의 소중함, 자기 집의 소중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엄청난 풍경과 화려한 사치가 없어도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집과 그 주변의 나무며 산책로를 그리워하게 되고 자기 집의 음식이 그리워 질 것이다. 외국 음식을 많이 먹을 수록 고향의 음식이 더 소중해 지고 외국의 화려한 집들을 보면 볼 수록 고향의 전통과 특징을 가진 집이 더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다.
고국을 처음 벗어나 본 한국인이 뉴욕을 보고 동경을 보고 예루살렘을 본다면 그는 뉴욕을 보고 동경을 보고 예루살렘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가 점점 더 길게 점점 더 많이 외국을 보면 볼수록 그는 오히려 점점 더 자기의 나라를 발견하기 위해 외국에 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한국에만 있었을 때는 오히려 한국을 몰랐는데 많은 외국들을 보게되자 그는 그때마다 고국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
꼭 외국과 고국의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정보가 그렇다. 우리가 작은 수의 것을 관찰하게 되면 우리는 그 안에서 내 것이 아닌 세상의 것, 남의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아주 많은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그들 안에서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것들을 보고 있는 자기 자신이다. 점점 더 우리는 어떤 것을 보는 관점의 존재 즉 세상을 이렇게 보이게 만드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정보가 무한히 흔해질 때 우리는 이제 단순히 책을 소유하듯이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무의미해 진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체험이다. 그것들과의 나의 관계고 나 자신이다. 나를 바꾸지 못하는 지식이나 그저 내가 서재에 소유하고 있을 뿐인 책은 큰 가치가 없다.
바깥으로만 향해있던 이 관심의 반전을 집의 발견이라고 부른다면 이 집의 발견은 사실 우리의 발견이고 나의 발견이기도 하다. 정보폭팔의 시대에 정말 중요한 것은 나 혹은 우리를 지키고 키우는 일이다. 우리가 그저 정보에 휩쓸리고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집을 잃고 끝없이 방랑하는 사람들처럼 고독해 질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점점 더 자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쓰게 될 것이다.
모두가 그럴 수 있거나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현재에도 세상에는 어디선가 길을 잃어버린 것같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남들이 말하는 꿈을 쫒고 남들과 비슷한 차를 타고 남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남들과 비슷한 집에 살고 남들과 비슷한 일정에 따라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자기가 좋아하는게 뭔지 자기가 누구에게 중요한 사람이고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지를 자기도 모르게 된다. 그들의 삶의 의미는 무한히 엷어지고 고독과 불안의 깊이는 무한히 깊어진다. 그들은 단순한 자극에 중독되기 쉽다. 그들은 소비와 폭력과 섹스와 관음증 중독에 시달린다. 그들은 일중독에 걸리거나 몸이 아프기 쉽다. 그들은 종종 범죄자가 되거나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한다. 그들은 문자시대가 시작되고 농경문화가 시작되었는데도 여전히 숲에서 채집하여 먹고 살면서 점점 사라져 갔던 사람들과, 공화국의 시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왕정시대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다.
그렇지 않고 자신에게 신경쓰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작은 세계들을 만들 것이다. 자기의 집을 만드는 것이고 자신들의 마을을 만드는 것이다. 그 작은 세계를 만들고 키워 내는 것이 미래의 가치 창조다. 개인에서 작은 마을에서 지역의 문화에 이르기까지 어떤 문화를 만들고 어떤 형태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미래의 가치 창조다. 삶의 형식을 고민한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물리적 형태를 가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사이버공간에 자신의 정신적 집을 짓거나 자신의 핵심적 정체성을 건설하기도 할 것이다. 이 정보폭팔의 시대에 뒤진 사람들은 마치 문자를 쓰기를 거부한 인간들처럼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세상에 대한 더 자세한 관찰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를 찾는 것. 이것은 과학혁명의 시대에 있었던 일을 기억나게 해준다. 서구의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던 것은 바로 과거의 자료가 아니라 사물을 직접 관찰하는 것에서 그리고 분류하고 이름붙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정확히 측정하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는 과학의 기본적 자세는 이 시대에 도입된 것이다. 그 전에는 그리스에 가보는 것보다 그리스에 대해 쓴 책들을 읽는 것이 진리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사물을 전통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관찰한다라는 사소하다면 사소한 차이가 과학혁명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인쇄술에 힘입어 더 많은 자료를 축적하던 시기와 사람들이 인간을 강조하는 문화를 만들어 낸 시기는 비슷하다. 그것은 아마도 더 많은 자료를 통해 그걸 보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데이터와는 그 양이 다른 과거에 인간이 발견한 것은 그냥 인간이었다. 무슨 의미에서건 그것은 평균되어지고 정형화되어진 인간이었다. 우리는 이제 훨씬 더 많은 데이터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인간이 아니라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미래의 가치중심이 나와 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미래의 새로운 학문일 것이다. 인간들이 인간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게 될 수록 그래 보이는 것과 그런 것의 차이는 무한히 작아질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이미 진행되어졌고 지금도 빠르게 진행되어지고 있다. 그것이 서점에 그렇게도 많은 인지과학과 뇌과학 책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르네상스운동이 인간의 발견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생각도 비슷하게 말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결국 자기를 돌아보라는 이야기다. 우리 시대의 어리석음은 그렇게 하지 않는 데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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