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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과학적인 글쓰기, 문학적인 글쓰기

by 격암(강국진) 2017. 5. 18.

2017.5.18

우리는 대개 문과와 이과로 학문을 나누고 인문학과 과학을 각각 이야기 하듯이 글쓰기를 과학적인 글쓰기와 문학적인 글쓰기로 구분한다. 말하자면 픽션이 있고 논픽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들에만 기초한 글쓰기를 과학적인 글쓰기로 이해하고 문학적인 글쓰기는 사실이 아닌 것이 들어가도 되는 판타지 혹은 환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첫째로 사실들 자체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로 우리는 사실들만으로 어떤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어느 날 수학자인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제타함수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함수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럴 때 당신이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 여기에는 이 나름대로의 심각한 의미를 가진 문제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자. 그래도 수학자 친구의 지루하고 긴 이야기 끝에 가서는 수학자가 아닌 당신은 묻지 않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건데?"

 

그러면 그 수학자 친구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재미있잖아!"

 

사실들만으로 이뤄진다는 수학이나 과학조차 실은 그 끝에 가면 단순하고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 것에 기초하고 있다. 그 기초란 결국 우리가 그 문제에 흥미를 가졌다는 것이다. 당신이 이 우주탄생과 진화에 대한 아주 놀라운 이론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론이 이 세상에 대한 수많은 사실들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고 해도 그 자체가 그 이론이 왜 흥미로운가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실은 반대다. 우리가 그런 이론에 흥미를 가졌기에 그런 이론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종종 착각되어지는 것과는 달리 수학이나 과학이란 건조한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호기심과 열정의 세계다. 그것은 로보트처럼 무미건조한 사람의 세계가 아니고 가치판단이 없이 객관적이기만한 세계가 아니다. 그렇기는 커녕 어떤 것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세상의 다른 재미를 모두 망각할 정도로 그것에 빠진 열정적인 사람들의 세계다. 그래서 진정한 학자는 오타쿠나 연예인의 광팬과 통하는 데가 있다. 뭐하나에도 미쳐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저 학자들은 참 따분하다는 둥, 사는 재미가 없다는 둥하고  말하는 것은 공평한 일이 아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과거의 어떤 한 시대에 대한 드라마를 만든다고 하자. 그런데 당신은 오직 사실만을 보여주고 싶다. 다시 말해 사실에만 기초한 드라마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비록 선의에 가득차 있을지라도 위험하며 어떤 종교나 이데올로기에 중독되어 하나의 이야기만을 절대적 사실로 생각하고 다른 사실들을 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광신도에서 그리 멀지 않다. 

 

드라마는 모든 사실들을 보여 줄 수 없다. 첫째로 이 세상에는 무한정의 사실이 있는데 드라마의 길이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지난 일에 대해 모든 사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두환이 광주에 군인을 보내는 장면에 대해서 드라마를 찍는다고 해보자. 그 장면의 해석과 느낌은 수없이 많은 세부사항에 달려 있고 사실 그 이전에 왜 하필이면 다른 장면이 아니라 그 장면을 드라마로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존재한다. 사실적 재현을 위해서 배우는 전두환과 똑같이 생겨야 할까? 물론이다. 배우의 생김새는 그 상황에 대한 느낌을 전혀 다르게 만든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표정하나, 대사하나를 하는데 있어서 호흡이 어떤가에 따라서 극에 해석은 많이 달라진다. 그게 그렇지 않다면 배우들의 연기력 논란이 왜 있겠는가. 징기스칸은 몽고족에게는 위대한 정복자이며 위인이지만 몽고족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사악한 악마다. 사실적인 징기스칸의 표정, 사실적인 전두환의 표정이란 그래서 매우 어렵고 위험한 질문이 되고 만다. 그런데 아마 본인도 자신이 어떤 표정이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할 텐데 사실에만 기초한 과거의 재구성이란게 가능할 리가 있는가? 그래서 전체적 사실성을 무시하고 조각난 사실들의 정확함만을 신경쓴다면 그 드라마는 사실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 될 수도 있다.

 

자 이제 글로 돌아와 보자. 당신은 어쩌면 대단한 양의 지식을 가지고 있고 글쓰기 솜씨도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사실만을 기반으로 글을 쓰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미친거 아닐까? 백두산의 사진을 찍어가지고 온 사람도 내가 본 것은 백두산의 일면에 불과하며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그 옆에 있는 사람이 가본 적도 없는 백두산에 대한 글을 사진도 없이 자신만만하게 쓰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글에는 필자의 정신이 녹아있다. 내 글은 그런거 없이 객관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비록 선의에 가득차 있을지라도 위험하며 어떤 하나의 이야기만을 절대적 사실로 생각하고 다른 사실들을 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종교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광신도이다. 

 

우리는 사실에 중독되어 있다. 사실은 굉장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실은 종종 우리의 세계를, 다시 말해서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우리의 정신을 깨부시는 망치의 역할을 한다. 하나의 명확한 사실은 때로 그런 힘을 가졌다. 그래서 사람이 읽고 쓴다는 것과 신화의 세계에서 탈출하는 것과는 깊은 관계가 있다. 글을 쓰게 되면 당신은 사실들을 외면할 수가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당신의 낡은 신화는 더이상 일관성이 없는 허구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그러면 당신은 안간힘을 다해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 낸다. 당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이 모두 일관성있고 편안하게 존재할 수 있는 세계관을 말이다. 이렇게 사실은 자기 성찰을 통해 우리의 세계관을 파괴하는 역할을 하고 우리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의 세계관을 재구성하는 과제를 가지게 된다. 

 

다른 어떤 예보다 과학이 이것의 좋은 예다. 사람들은 일상언어로 사실들을 기록하고 분석하면서 고대 신화의 세계를 넘어섰다. 그리고 수학이라는 언어로 우리의 관찰사실들을 정리하고 분석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대한 현대과학적 설명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게 한 결과 우리는 수없이 많은 환상을 제거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관찰을 통해서 사실을 얻고 그 사실로 우리의 세계를 확장하는 경험에 중독되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사실에 중독된 사람들처럼 사실들을 끌어모으는데 바쁘다. 이런 경향의 끝에 있는 현상중의 하나는 세상에 대한 자질구레한 지식들의 총량을 경쟁하는 퀴즈쇼같은 것이 대중적 인기를 얻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실들이 지혜롭고 통찰력있는 인간을 만든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인공지능 왓슨이 유명 퀴즈프로그램 제퍼디에서 인간챔피언들을 이기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인공지능에게 지나친 불안감을 느낄 필요는 없지만 이런 현실이 불러일으키는 불안감의 정체에 대해 고민도 안해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사실에 중독된 당신. 그걸로 좋은 걸까? 그거면 전부인 걸까?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저 많은 정보를 안다는 점에 있어서 인간이 기계를 능가할 수는 없다. 

 

오해를 살까봐 미리 말해두는 것이지만 나는 과학을 하는 것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거나 사실에 기반한 객관적 글쓰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니 노력도 하지 말라거나 사실들을 학습하고 세상에 대해 더 넓고 큰 관점을 가지려는 노력들을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런 노력들을 격려하고 싶다. 그런 노력들이 계속된다는 것은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우리가 뭐에 무지한지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해서 그런 발전을 계속하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의 절반이다. 예를 들어 어차피 사실적 글쓰기는 불가능하니 글쓰기를 포기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글을 쓰도록 지금의 자신의 글에 도취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계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되었을 때 그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지지자들이 가짜뉴스에 속았으며 어리석다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단지 진실들을 퍼뜨리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아직도 믿고 있다. 

 

이러한 관점들은 발전프로그램에 중독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 대한 명백한 사실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전프로그램이란 과학의 발전, 학문의 발전과 같은 것을 사회차원과 개인의 차원에서 계속해 나가는 것을 말하며 그것에 중독되어져 있다는 것이란 그 프로그램을 최대한 빨리 진행시키는 것이 최상의 선이라고 믿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무엇보다 계몽주의의 이상이기도 하다. 

 

나는 앞에서 사실이란 우리의 정신을 파괴하는 망치이며 일단 세계가 파괴되고 나면 우리는 사실들과 편안하게 동거할 세계관을 재구성하는 과제를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근면해야 하지만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정신이 파괴되기만 하면 새로운 세계관이 그 순간에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길고 짧은 고통과 혼란의 시기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쉴새없이 우리의 정신을 파괴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걸 기꺼이 즐겁게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극소수의 천재나 자학강박이 있는 사람들 뿐일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사실이란 때로 잔인하고 때로 부적절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배우자가 바람난 사람앞에서 불륜에 대한 이야기를 삼가고 대학에 떨어진 사람앞에서 대학교육의 중요성을 외치지 않는다. 강간당한 여자앞에서 옷을 야하게 입는 여자들이 문제라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의 상식만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행동한다.  

 

박근혜와 트럼프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은 설사 그들이 사실이 아닌 어떤 뉴스에 근거하여 대통령이된 면이 있더라도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될 정도로의 지지를 그들은 받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어떤 진실들이 누군가에게는 삼킬 수 없는 것이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어쩌면 불행하고 상처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자신이 더 많은 진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총탄을 쏘듯 진실을 대중에게 쏘아대면 그들의 정신이 깨어나고 그들이 자신과 같은 관점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부품을 조합하면 만들어 지는 기계가 아니다. 사람은 나무나 채소같이 살아있다. 똑같은 양의 물을 주기만 하면 그걸 어떤 방식으로 주는가에 상관없이 똑같이 자라나는 게 아니다. 똑같은 사실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그 사실을 기반으로 자신의 관점을 크게 바꾸지만 어떤 사람은 그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위대한 철학자나 야구선수 혹은 뛰어난 농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노력해도 개인적 한계가 뚜렷한 사람도 많다. 

 

결국 트럼프나 박근혜가 나쁜 대통령이라면 그것은 일정부분 그를 지지한 대중의 아픔과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의 탓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과학적인 글쓰기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사실들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인간을 보는데는 실패한 것이다. 아프고 힘들다는 사람들에게 너는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누군가를 대통령으로 만들 정도로 다수라면 단순히 그들을 비난하는 것에서 멈추는 사람도 어떤 사실을 보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의 진실을 보지 않고 내 진실만 보고 있는 것이다.  

 

가장 좋은 글쓰기는 필요한 말을 하는 글쓰기다. 그것이 과학적인지 문학적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사실이 틀려있는지 환타지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을 쓰는 것이고 그것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나를 느끼고 독자를 느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뭔가가 재미있어서 혹은 이 순간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여러가지 일을 하고 있다. 글쓰기도 독서도 마찬가지다. 수단이 목적이 될 때 우리의 글쓰기는 이상적인 형태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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