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9.14
우리는 글을 읽는 것에 대해 종종 돈을 지불한다. 책을 사는 것이 대표적인 예지만 잡지나 신문을 구독하는 것도 그렇고 넓게 보면 광고가 붙은 블로그나 사이트를 방문하는 것도 그런 예일 것이다. 그런데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글이라는 개념은 나름대로 문제가 많다. 글에 대해 돈을 지불한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돈을 지불하는 행위에 대해 가지는 선입견이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가치 판단을 하게 만드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의 시작을 좋은 독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시작해 보자. 나는 좋은 독서란 작가의 강연이나 연설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친구가 되고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를 여기서 먼저 길게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이미 글을 쓴 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글의 처음에서부터 그렇게 한다면 이 글은 그 주제로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중에는 이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의문감이 드는 분들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좋은 독서가 이런 것이라고 일단 전제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한다. 물론 나는 아래에 이 주제에 대해서 자연스레 다시 약간의 설명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내가 맨 처음에 던졌던 질문과 이 답을 합쳐서 생각해 보자. 돈을 낼 만한 글이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을 좋은 독서의 본질은 작가와 대화하는 것이고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결론과 합쳐보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가 금방 들어난다. 우리는 대개 친구를 만나고 그들과 격의없이 대화하는 것에 대해서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가 어떤 사람의 강연을 듣거나 연설을 들을 때에는 훨씬 더 기꺼이 돈을 낸다. 이때 이 돈은 그 강연자의 노동에 대한 댓가가 된다. 다시 말해 친구와의 대화는 돈을 내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대화에서 많은 것을 배워도 왠지 그건 자기의 힘으로 한 것같고 상대가 노동을 한 것같지는 않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글을 그냥 읽을 때와 돈을 주고 책을 사서 볼 때 차이가 크게 생길 수 있다. 우리는 자연스레 작가가 우리에게 연설이라는 형태로 노동을 하는 책을 선호하게 된다. 의견을 내기보다는 진리를 설파하는 글과 과학적 사실처럼 변할 것같지 않은 정보가 들어간 글들만이 돈을 줘서라도 사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또 일단 돈을 주고 사면 그것은 정말 꼭 읽어야 할 책이 된다.
이 문제에 자연스럽게 끼어들게 되는 것은 권위다. 우리는 유명인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라면 그 대화가 정말 사소한 것이라도 돈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다. 즉 권위 있는 사람과 만나는 댓가로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단 유명한 사람의 책이라면 돈을 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다. 반대로 말하면 유명하지 않은 사람의 글이라면 돈을 낼 가치가 없다.
그런데 돈을 내기로 한다면 얼마를 낸다는 말인가? 가치를 결정할 노동의 양은 흔히 책의 두께가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두꺼운 책은 비싸게 돈을 주고 살 가치가 있는 책이 되고 얇은 책은 돈을 조금만 줘야 하는 책이 된다. 이것때문에 한국에는 문고판 책이 별로 없다. 폰트키우고 여백을 넣어서라도 책이 커지고 두꺼워지면 돈을 더 낼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통하는 것이 시장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고서도 내가 앞에서 말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러한 풍조는 보편적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한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 온다. 작가와 출판사는 최대한의 권위를 강조해서 마치 작가의 말이 신의 목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선전을 할 필요가 있고 작가도 그런 어조로 말해야 할 필요도 있다. 뭐뭐는 뭐라고 생각한다따위의 표현은 옳지 않다. 가능하면 뭐뭐는 뭐뭐이다라고 해야 한다. 작가는 정 안되면 악명이라도 있어야 한다. 유명한 사기꾼이라도 되고 살인범이라도 돼야 책이 팔린다. 출판사는 자기 책을 자기가 사서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일까지 하는데 책이 팔린다는 사실이 권위를 주고 그 권위가 책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순환의 고리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책은 가능한한 두껍게 써야 하며 그것때문에 책이 쓸데없이 비싸지거나 오히려 독자가 책의 기본적 메세지를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고 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 현실을 보면 사람들은 책을 두번이상 읽는 일이 거의 없고 그 안의 정보들이 과잉되거나 단순히 책이 지루해서 마구 책장을 넘기기 급급한 일이 많다. 그러면서도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책은 두껍고 많은 정보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판매의 측면에서 말하면 정보과잉으로 독자가 이해를 못할 수록 독자들은 내가 모르는 사실들이 이렇게 많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나쁜 독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권위있는 사람이 사실 내가 이해하는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책이 좋은 책이다. 나는 다만 그것을 외우면 되고 사서 서가에 꽂아둬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의 지적 능력을 과시할 수 있으면 된다.
독서가 작가와 친구가 되는 일이며 강연을 듣는게 아니라 대화를 하는 일이라는 것은 말그대로 작가와 친구가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내가 논어를 읽으면서 어떻게 죽고 없는 공자님과 말그대로의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빌게이츠의 책을 읽고 빌게이츠를 찾아가서 내가 당신 친구요 한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 친구로서의 독서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자기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책을 이해하려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훌룡한 책도 이것은 그저 작가라는 하나의 지적 동료나 도반의 의견이라는 입장에서 읽는 것이다. 그렇게 한 결과 책의 내용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진정으로 자기에게 도움되는 독서가 된다. 자기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는 독서는 돼지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돼지고기 요리를 만드는 법을 읽으면서 그거 참 맛있겠네하고 생각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자기가 죽는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신을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건 모두 변할 수 없는 진리라고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종종 작가의 뜻에 대해 큰 오해를 하게 된다. 작가에 대한 존경이 오히려 작가를 오해하게 만드는 셈이다. 어떤 책에 대한 훌룡한 이해는 많은 도전과 대화후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항상 어느정도 오해하고 있다. 설사 작가가 불멸의 진리를 안다고 해도 그나 그녀는 그것을 유한한 길이의 글과 특정한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장을 둘러싼 모든 문맥을 다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작가가 겸손이라던가 사랑이라고 말했을 때 그 단어의 진정하고 완벽한 뜻에는 독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가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면 거기에는 언제나 오독한 부분이 있다. 그런데 오독을 해놓고는 작가를 존경한다면서 이게 그 작가의 말이며 진리라고 믿어버리면 작가의 뜻에서는 더 멀어지는 셈이다. 이것은 노자가 무위자연이라고 말했다고 놀고먹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 낸 색안경을 작가가 가지는 권위때문에 벗지 못한다. 예수님의 말은 무조건 옳다면서 사랑보다는 미움을 행하는 종교인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게 되는가? 오히려 작가의 말중에 이건 사실과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나름대로 해본 결과 우리는 왜 작가가 이렇게밖에 표현을 못했을까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돈은 시장가치를 상징한다. 그래서 돈을 등장시키는 순간 당신은 객관적 가치라는 개념속으로 쉽게 빠져든다. 당신이 돈 몇푼을 들고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과 친구가 되겠소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바보같은 말이다. 설사 로또맞은 사람이라고 해도 돈가지고 친구를 골라사귀면 그 사람은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될까? 독서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돈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키고 돈을 지불할만한 책운운하기 시작하면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좋은 친구에 등돌리고 나쁜 사람들과만 놀게 될 수도 있다.
독서가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런 혼란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물론 돈을 주고 책을 산다. 그러나 글의 가치는 우리가 그 글에 대해 지불하는 돈의 가치와는 거의가 아니라면 완전히 관련이 없다. 사실 가장 가치 있는 글들이 되곤하는 많은 고전들은 거의 공짜다. 당신이 친구를 잘 골라사귄다면 공짜인데도 읽을만한 글들은 세상에 무한정있다. 도서관만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은가. 책을 안사도 지역 도서관에 가면 공짜로 볼 수 있는 책은 무한정 있다. 블로그의 글도 그렇고 기사도 그러하며 무엇보다 당신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에게 보내주는 몇마디의 글은 알고 보면 어떤 고전의 가치보다도 더 가치있는 글일 수 있다. 사실 가장 가치있는 것들은 대개 당신에게 공짜로 주어진다. 왜냐면 그것을 준 사람들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많은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당신의 돈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가장 가치있는 것을 주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글에 돈을 낸다. 그래야 세상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무도 돈을 내지 않는다면 고전이건 현대인의 글이건 어떤 종류의 글도 세상에 퍼질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책에 돈을 내는 것은 세금처럼 내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티비방송과 독서의 차이를 생각해 보자. 티비 방송은 이미 시청료를 냈기 때문에 돈을 냈지만 우리는 돈을 잊고 그냥 어떤 프로그램이 좋은가 나쁜가를 가지고 볼까 말까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시청료는 이미 나간 돈이므로 우리가 특정 프로그램을 본다고 해서 돈을 더 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책을 한권 한권 사서 보는 경우 우리는 항상 이 책이 이 돈만큼의 가치가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민은 내가 앞에서 말한 문제들 때문에 독서를 나쁜 쪽으로 이끌게 되는 때가 있다. 우리는 어느새 돈 몇푼들고 친구를 고르는 것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때문에 많은 도서관이 사회적인 자금을 가지고 책을 사주는 것 그리고 모두의 근처에 그런 도서관이 가까이 있는 것이 건강한 독서시장을 만드는 기본이 된다.
한국의 독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독서를 하는 사람도 드물지만 하는 사람들도 주로 소유를 위한 독서, 도구가 될 지식을 주는 독서를 한다. 책이 많이 팔릴 때도 있지만 자신을 잃어버리고 거기에 온통빠지는 독서를 하는 것이 정상적인 독서로 여겨지며 그런 책들이 돈을 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여겨진다. 사람들은 친구가 되어줄 책을 찾지 않고 자신을 지배할 책을 찾는다. 친구가 되줄 좋은 책들을 소개해 주는 시스템도 망가져있다. 같은 사람도 어떻게 사귀는가에 따라 관계가 달라지듯이 같은 책들도 어떻게 읽게 되는가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누군가를 친구로 사귀고 싶다면 예의와 정성이 필요하다. 서둘러 읽어치우고 빨리 다음 책으로 넘어가겠다는 태도로는 충분치 않다.
어떤 글이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개념은 누군가에게는 처음부터 말이 안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친구가 될만큼의 가치가 있는가라던가 어떤 이성이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연애를 할 가치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친구가 뭔지에 대해 사랑이 뭔지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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