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독서

by 격암(강국진) 2018. 11. 18.

2018.11.18

우리는 대개 배우려는 자세로 독서를 한다. 그런데 때로 그 자세가 문제가 된다. 우리는 작가가 써놓은 것을 모두 다 기억하고 다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가능하면 그 책을 다 암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그것을 책을 잘 읽은 것으로 여기는 일이 보통이다. 다 소화하지 못해도 일단은 전부 집어넣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은 후에 누군가가 사피엔스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라고 했을 때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불성실하게 책을 읽은 자신을 조금은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절반만 읽게 된다면 그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자세가 생기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 우리는 책을 잘 읽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독서를 망치고 만다. 독서는 작가와의 대화다. 그런데 몇번의 만남으로 상대방을 모두 다 알아내겠다는 태도로 하는 대화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책의 내용을 모두 얻어야 겠다는 방식으로 독서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비록 다 배우지 못한다고 해도 많은 것을 배우겠다며 욕심을 내는 태도는 좋은 것같지만 그 바닥에 깔려 있는 생각은 오만한 것이고 그 오만함이 우리의 배움을 가로막게 된다. 몽땅 다 배우겠다고 하다가 배울 것도 배우지 못하게 된다고나 할까.

 

책을 쓰는 것도 영감이지만 독서도 영감이다. 글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 우리는 새로운 의미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그 의미는 내가 책과 만나면서 내 안의 것과 그 책의 것이 섞이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를 얻으면 그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즐기지 못하고 '이게 다 가 아니니까 빨리 더 많이 얻어야지'라던가 하나도 놓치지 말고 다 기억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아까운 일이다. 그건 마치 맛있는 음식들을 산처럼 쌓아두고 그걸 뒤범벅으로 만들어서 맛도 모르게 해서는 먹는 거랄까. 그렇게 하면 얼마 안가서 책에 나오는 내용이 그게 그거같고 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소리를 반복하는 느낌이 들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독서는 대화다. 상대방의 말을 한자도 남김없이 외우려고 하면서 하는 대화에 어떤 즐거움이나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작가가 시시한 책을 썼다고 생각하기 전에 나의 독서법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한번에 소화시킬 수 있는 속도와 양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작가가 오랜 기간동안 쌓아온 것을 한번에 삼키고 다 소화시키려고 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 좋지 않은데도 우리는 종종 욕심을 부린다. 욕심을 부리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세뇌가 된다. 욕심을 내서라도 독서를 계속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뭔가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가 되는 것인데 그런 태도는 결국 그 작가의 정신을 자기 머릿속에 그대로 심어버리겠다는 태도가 된다. 

 

때로 이렇게 머릿속에 무작정 뭔가를 퍼부어 버리면 그 다음에는 마치 내가 더이상 내가 아닌 것같은 상태가 된다.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의 생각을 대신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그런 걸 권하기도 한다. 이해가 되건 안되건 마구 읽어서 머릿속에 집어넣다보면 나중에는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런 방법이 옳은 상황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을 마구 흐뜨러뜨리면서 하는 독서란 마치 마구잡이로 건물을 짓는 것과 같아서 그런 건물은 자꾸 무너질 뿐이다. 지금의 내 정신을 파괴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고 때로는 그런 파괴도 창조적이 될 수 있겠지만 대개는 그런 독서를 계속하면 시간이 지나도 뭔가 내 생각이랄 것이 쌓아올려지지가 않는다. 사색이 없이 외우는 느낌이 될 뿐이다. 

 

어떤 에세이를 누군가가 암기할 정도로 읽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제 그 사람은 그 에세이를 모두 알게 된 것일까? 그것은 어떤 화가의 그림을 사진을 찍으면 내가 그 작가만큼이나 뛰어난 화가가 된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국어사전을 읽고 있는게 아니다. 그러니까 문학작품이 아니라 학술서적이나 위인전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하게 지식의 문제만인 일은 없다. 우리는 왜 작가가 그런 문장을 써야 했는지에 대해서 사실은 평생을 연구하더라도 더 많은 의미를 캐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책은 언제나 책 바깥까지 이어져 있다. 그 책이 쓰여진 상황을 다 이해하지 않으면 작가가 의도한 의미를 다 알 수 없고 심지어 책은 새로운 상황에 놓여지면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까지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심지어 작가도 자신의 책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가 쓴 책을 자기가 다시 읽으면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된다. 그 책을 쓴 것은 이미 과거의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독서의 상식은 역시 대화다. 그걸 잊어서는 안된다. 어쩌다 누군가를 만나서 대화를 나눴을 때 뭔가를 하나 얻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좋은 것 아닐까? 그 하나가 그 사람의 전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건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 하나가 즐거움이건 깨달음이건 내 마음에 드는 것이고 내게 쓸모 있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감사할 뿐이다. 

 

책이든 사람이든 금방 또 만날 수 있을 것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되지 않는 일이 많다. 우리는 만나야 할 다른 책들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번에는 이 책을 다 끝내고 다음 책으로 나가야 겠어'라던가, '하나도 뒤에 남겨두지 않겠어'라는 마음가짐으로 독서를 하고 사람을 만난다면 우리는 응당 얻을 수 있을만한 것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청소년때 읽었던 책도 중년에 읽으면 다시 의미를 발견한다. 뭐가 하나도 뒤에 남겨두지 않겠다는 말인가. 가소로운 이야기가 아닌가. 우리의 이해란 어차피 최종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좋지 않은데도 남김없이 읽겠다는 태도가 흔한 것은 우리가 종종 평론가나 입시생의 태도를 가지고 독서를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즉 우리는 어떤 책을 읽고서 그 책을 평론해 주겠다는 태도거나 혹은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 나중에 시험을 볼 것같은 태도로 책을 읽고는 한다. 평론을 하겠다는 것은 비판을 하겠다는 것이니까 단순한 대화수준을 넘어서 작가의 흠을 잡아보겠다는 태도가 되기 쉽다. 하나라도 얻는게 있으면 고맙다는 태도이기보다는 여기에는 왜 이런게 없냐는 생각에 집중하기 쉽다. 

 

입시생의 태도란 책을 나의 내부를 충실하게 만드는 태도가 아니라 남에게 지식을 자랑하는 태도다. 한마디로 나는 그 책을 알고 그 책을 읽었다는 것을 증명해야겠다는 태도다. 사실 책을 읽어서 보람을 느끼는 한가지 순간은 그 책의 지식을 써서 시험에 합격하거나 남에게 자랑질을 할 때다. 하지만 꼭 자랑질이 좋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은 우리를 테스트하려고 하고 그런 세상에 살다보니 자연히 우리는 그런 태도로 책을 읽게 되기 쉽다. 친구와 어떤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어떤 사람은 청산유수로 책의 내용을 줄줄이 이야기하고 나는 더듬거릴 뿐이라면 아무래도 나보다는 그 친구가 그 책을 더 잘 읽은 것같을 것이다. 나는 그 책의 본질을 모르겠는데 그 친구는 아무래도 그 책의 본질을 확실하게 아는 것같다. 

 

그러나 다 읽지 않아도, 다 알지 못해도 그 책의 본질을 꽤뚫지 못해도 된다. 독서는 그런 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책의 내용을 줄줄 외운다고 해서 그 본질을 안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본래 무식한 사람이 말은 더 많다. 무식하니까 확신이 들고 용감해져서 그렇다. 독서는 완벽할 필요가 없다. 단지 주어진 시간이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었으면, 뭐가를 느끼고 배웠으면 그걸로 좋은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