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23
나는 본래 물리학자다. 그래서인지 나는 사회과학같이 적어도 완전히 계량화되지 않은 분야의 책을 읽을 때 당혹감을 느낄 때가 있다. 사회과학이란 문학일까 과학일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해 기분 나빠할 사람이나 나의 무식한 용감함을 지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나 그렇게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이름이 사회과학이라는 것은 이미 과학이거나 과학이 되기를 지향한다는 뜻인데 그걸 과학이냐 문학이냐를 묻는다는 것은 사회과학에 대한 모욕으로 들릴 것이고 나는 그런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점을 피해서 순화시켜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우선 과학을 포함하는 개념인 학문과 문학을 포함하는 개념인 예술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학문과 예술의 차이는 하나 둘이 아니겠지만 나로서는 그 대표적 차이가 객관성과 주관성이라고 생각된다. 객관적이지 못한 것은 학문이라고 부르기 힘들고 순수히 객관적인 것은 예술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학문의 객관성이 중요한 성질인 것은 학문이란 어떤 한 사람이 만든 지식의 탑이라기 보다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여하여 공동으로 이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하나의 작업에 공동으로 기여하기 위해서는 객관성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온도에 대한 논문을 썼는데 사람들마다 온도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면 학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사람의 기여가 조합되고 누적되는 것에 분명한 한계가 생긴다. 개념적 혼란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객관성을 성립시켰고 이때문에 지식은 누적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자나 기술자로 비교하자면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과학자도 과거의 과학자일 때 현대의 과학에는 당연히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의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서 있다. 현대문명이 이룬 업적은 이 지식의 누적 효과에 힘입은 바가 아주 크다.
학문에 있어서 객관성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예는 철학이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변질되어져 있다. 즉 철학은 본래 주관적인 면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걸 학문으로 만드는 순간 우리는 그것의 객관적인 면만을 철학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문에 학문이 된 철학, 철학과에서 하는 철학은 철학이라기 보다는 철학의 역사에 가깝다. 그러니까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영향력있었던 철학자들의 주장들을 단순히 요약하고 나열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말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요약의 과정은 다시 한번 과거의 철학자가 가졌던 의도를 변형시킨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다시 그 철학자의 원저작으로 돌아가서 그에 대한 해석을 다르게 할 수도 있지만 원저자의 철학과 그걸 해석한 철학이란 마치 문학과 문학평론이 같지 않은 것처럼 같을 수가 없다. 철학의 해석은 문학작품의 해석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과학과는 뚜렷히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은 언제나 예술작품처럼 감상되어져야 하고 체험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요약되어지고 기억되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은 객관적 지식도 포함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다라면 그런 분야는 대개 철학에서 떨어져 나와서 학문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물리학이 한때 자연 철학이었듯이 말이다. 결국 정리하자면 철학에서 객관성이 두드러진 부분은 다른 학문으로 떨어져 나오고 그나마 남은 것을 평론하듯이 정리한 것이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때문에 철학이나 문학은 시간에 따라 단순 누적되지 않고 우리는 천년전의 사람이 오늘날의 예술가보다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술은 주관적이라 단순히 누적되어 발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은 언어를 도구로 하는 예술이며 앞에서도 말했듯이 주관성을 그 핵심으로 가진다. 다시 말해 철저히 객관적인 글쓰기를 한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학문이며 과학이다. 문학은 따라서 고의로 객관성을 탈피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는 두가지 그림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문학은 한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읽히고 그래야만 한다. 그 다중성이 의미하는 것은 현실의 특성이다. 현실은 객관적이고 단순화된 잣대로 묘사할 수 없다. 물한컵은 과학적으로 물일 뿐이지만 문학적으로 물이란 부모님이 주신 물이 다르고 고향의 물이 다르며 과학적으로 증류되어진 물이 다르다. 문학은 하나의 단어와 하나의 상황을 통해 여러가지 가능한 해석의 문맥들을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현실세계에서 인간이 처한 상황을 체험하게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를 좋아하는데 사랑이 이뤄지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의 관계는 개인대 개인의 관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문대 가문의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의미들이 충돌하여 모순된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문학적 이야기다. 만약 그런 모순과 충돌이 없다면 이야기꾼은 말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런 모순이 있을 때는 종종 정답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논리와 과학말고도 문학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학문으로 돌아가 보자. 학문의 객관성과 지식의 누적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그것이 학문의 힘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문은 언어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예술이상으로 그렇다. 아무리 시인이 정교하게 언어를 써도 그것은 사적인 언어이며 수없는 과학자가 다듬어 낸 과학용어의 의미만큼은 정교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거대한 탑을 짓자면 그 탑을 만드는 재료가 튼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체의 무게때문에 탑이 무너진다. 마찬가지로 거대한 객관적 학문을 구성하려면 중간에서 의미가 변질되고 마는 애매한 언어로는 불가능하다. 즉 언어의 명료함이 그 학문의 힘의 한계를 제한한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조각작품은 더 위대한 것일 수는 있어도 그 정교함에 있어서 로켓부품이나 반도체 생산설비의 부품을 따라갈 수는 없다.
그래서 소위 계량화라고 하는 것이 현대 학문의 중요한 추세다. 계량화란 한마디로 측정에 기반한 량의 수학적 관계를 탐구하는 것인데 현대과학은 물리학이나 기술을 계량화하면서 크게 발전한 것이다. 수학없이는 현대 과학은 존재할 수 없었다. 물론 계량화가 만능은 아니다. 수학을 써서 시를 더 잘 쓸 수 있었다면 문학도 진작에 계량화되었겠지만 그렇지는 못했다.
자 이쯤 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사람이 많을 법하다. 계량화라는 것이 만능은 아니다. 하지만 계량화가 되지 못하는 학문은 결국 일상어를 써서 객관성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그 학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지극히 복잡하다면 일상어는 그 객관성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게 문학인지 학문인지 애매해 지는 것이다. 계량화되지 않은 사고는 너무 높은 탑을 쌓으려고 할 때 오히려 학문이기를 멈출 수 있다.
세상이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으로 딱 둘로 나눠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어들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을 더할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가 대상을 묘사하는 데 쓰는 언어나 모델이 그 대상의 복잡성보다 훨씬 더 정교할 때 우리는 주어진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어를 쓰는 사람은 한국어의 복잡성보다 훨씬 단순한 것을 한국어로 묘사하는 경우 그게 무슨 뜻인지 객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즉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은 그걸 같은 뜻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그 반대일 때는 주관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매우 둔한 감각밖에 없는 장님이라면 우리가 아주 복잡한 모양을 손으로 만졌을 때 그것으로는 우리가 뭘 만졌는지 알기 어려울 것이며 서로 다른 부분을 만지게 되어 만지는 사람마다 그 인식이 다를 것이다. 문학의 주관성이란 이런 문맥에서 말하면 인간이 자신의 언어를 초월하는 것을 표현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과 객관은 우리가 어떤 언어를 쓰는가에 크게 달려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두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는 바로 인간이 문자를 쓰게 된 사건이고 또 하나는 인간이 수학을 쓰게 된 사건이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생활의 한계를 크게 넓혔다. 그래서 이전에는 주관적이고 이성적일 수 없었던 것들이 이성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객관적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학문의 힘이 크게 증대된 것이다.
이제 다시 사회로 돌아가보자. 인구가 늘고 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는 과거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리고 현대의 일상어나 학술용어도 과거보다는 더 복잡하다. 하지만 나는 사회의 복잡성이 훨씬 더 크게 증대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때문에 있을 수 있는 반직관적인 현상이 있는데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사회과학이었을지 모르지만 21세기의 사회과학은 훨씬 더 문학에 가까울 수 있으며 내가 말한 것이 옳다면 그것은 문학에 가까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사회는 그렇지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과학이 누적되어 발전한 것처럼 사회과학도 그랬을거라고 생각한다. 즉 과거에는 과학이 되기에 미흡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복잡해진 사회과학은 이제 과학의 영역에 도달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학문은 발전하는거 아닌가?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일 수도 있다. 계량화에 성공하지 못한 사회과학은 그 연구대상인 사회가 너무 빨리 복잡해졌을 때 오히려 점점 더 문학이 될 수도 있다.
21세기 사회과학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을 돕는 한가지 특성이 있다. 객관적 학문은 궁극적으로 탈역사적이다. 왜냐면 객관적 사실이란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법칙이 한국에서 이렇고 미국에서 저렇지 않다. 뉴튼이 중력법칙을 발견해 낸 역사는 흥미로운 것이지만 사실 물리법칙의 차원에서만 보면 그걸 누가 어떻게 발견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 중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 한다고 말하면서 그걸 보여주는 증거 사례를 한참 늘어놓지 않는다. 증명된 자연법칙은 탈역사적이고 그래서 물리학 분야에서 역사는 2차적인 문제다.
사실은 순수하게 주관적인 문학도 탈역사적이다. 문학작품에는 매줄마다 작가가 하는 말의 출처를 밝히는 주석이 달리지 않는다. 그런건 문학이 아니라 문학평론이다. 문학평론은 역사적이어야 한다. 언어 자체가 변하기 때문에 2백년전 천년전 사람이 쓴 말의 의미를 알자면 우리는 그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 주장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역사적 맥락을 많이 나열한다면 그것은 문학평론에 가깝지 과학이 아니며 심지어 문학조차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에 대한 책이나 글에는 이런 특성을 가진 것이 너무 많다. 그들은 흔히 역사적 맥락을 나열하는데 굉장히 긴 시간을 쓴다. 그것이 사회과학분야가 사회의 역사적 변화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고 해도 이번에는 그들은 같은 분야에서 일해왔던 수없이 많은 학자들이 말한 것이나 그들의 책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논문이나 책을 채운다. 그들의 방대한 지식은 감탄스럽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당혹스럽다. 사실 이공계의 논문을 그런 식으로 쓴다면 지금은 한두페이지짜리인 논문들이 전부 책이되어야 할 것이다. 수학을 쓰고, 기본적으로 역사를 강조하지 않는 논문은 훨씬 더 내용이 짧다. 이미 알려진 것, 역사적 사실에 시간을 길게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만이 더 말할 수 있는 한개의 벽돌을 제시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벽돌들이 쌓여 올라가 학문의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다.
사회문제에 대한 긴 글들을 쓰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하는 것은 흔히 어떤 개념을 다듬는 것이다. 그런 개념을 다듬는 작업은 과학에서도 중요하다. 운동량이라던가 에너지라던가 하는 개념을 분명히 해야 여러 사람들이 그 개념을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과학분야에서는 개념을 다듬는 작업이 집단적으로 이뤄지며 일단 그 작업이 끝나고 나면 상대적으로 장기간 동안 그 개념을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쓰는 반면에 사회과학분야에서는 계속 개념을 다듬고 있고 사람마다 개념을 바꾸는 일에 시간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즉 개념들이 금방 명료해 지지도 않고 자꾸 새 개념이 나온다. 개념이 도구로 쓰인다기 보다는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근대가 뭐냐는 질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사회 문제에 대해서 글을 쓰자면 주관적인 부분과 객관적인 부분을 나누고 사회 문제에 대한 글에 주관적인 부분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결코 그래서 우리가 객관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들을 다 무시하고 마구 내 느낌대로 써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부분은 그런 부분대로 지적하면 된다.
하지만 주관적이 부분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 글이 문학적이며 주관적이고 편파적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객관성을 가장하지 말고 자기의 이름을 단 글을 써야 한다. 결국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객관성을 가장하고 과학인척 해서는 안된다. 그건 문학이니까. 인식의 공유가 목표니까 그렇다. 내가 느끼는 것을 왜 당신은 느끼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글에 대해서도 왜 과학이 아니냐고 비판하기 보다는 왜 과학을 가장하냐고 비판해야 한다.
과학이 못되고 문학도 못되는데 제일 나쁜 것은 바로 객관성을 가장한 문학평론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런 글은 대개 방대한 책과 유명인의 이름들을 과도하게 나열하고 그 의미가 불분명한 단어들을 너무 과용한다. 우리가 근대가 뭔지 아는가? 중산층은 무슨 뜻인지 아는가? 우리는 어느 정도는 직관적으로 안다. 그래서 그런 단어들을 쓰는 것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런 단어들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쓰면 쓸수록 우리는 헤어날 수 없는 논리적 애매함에 빠져든다. 알려진 권위에 지나치게 의존할 수록 그것은 잘못해석된 철학이나 보잘것없는 문학평론같은 것일 수 있다.
이런 부분이 특히 나쁜 것은 이런 글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큰 도움이 안될 뿐더러 특히 일반인들과 소통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고 단지 전문가인척 하기 위한 벽을 쌓는 일에만 좋다는 것이다. 도대체 뭘 위한 글쓰기 인가? 대중을 관념적으로 희롱해서 밥벌어 먹기 위한 글쓰기? 대중을 어떤 관념의 감옥에 가둬서 자기 뜻대로 조종하기 위한 글쓰기? 그런 글 쓰기는 마치 주먹싸움하듯 말싸움을 하는 연습에는 좋을 것이다. 자기 방어하기에는 좋을 것이다. 하지만 티비토론회에서 흔히 보듯이 결코 제대로 된 인식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말싸움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장난을 통해서 개념적 혼돈을 고의적으로 만드는 사람쪽이 말싸움에는 유능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걸 좋은 글쓰기이고 좋은 토론이라고 믿고 있는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악의 출발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에서 종종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글쓰기와 대화는 악의 출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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