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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대학에 대하여

대학과 아파트

by 격암(강국진) 2017. 9. 3.

한국의 대학과 아파트는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둘은 한국인의 삶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두가지 요소다오늘날에는 중고등학교는 물론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이들이 대학입시를 준비한다.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할 것이 없으면 선행학습이라도 한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대학입시 때문에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대학의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비싼 등록금은 학자금 융자의 형태로 많은 청년들을 억누르고 있으며 그들이 단계를 넘어서서 아이를 키울 단계가 되면 이제 다시 자녀의 교육비라는 형태로 대학은 다시 돌아온다한국의 부모들은 대학입시를 위해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있다이렇게 생각하면 대학입시는 우리를 거의 평생동안 괴롭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파트는 어떤가. 한국의 대표적 주거형태가 아파트는 엄청난 가격이 우리로 하여금 높은 교육비용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실 한국인의 대부분은 그저 아파트 채를 사기 위해 평생을 보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아파트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약간의 돈이 모이면 융자를 해서 아파트를 사고 아파트 융자를 갚느라 거의 평생 노동해서는 은퇴할 무렵이 되어 낡은 아파트 채를 가지게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대학과 아파트라는 것은 한국인의 삶을 온통 빨아들인다. 거의 남기는 것이 없다. 그것들은 너무나 중요해진 나머지 삶의 수단이 되는 것을 넘어 거의 삶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한국인들은 학벌을 얻기 위해 노력하다가 학벌의 굴레를 짊어지고 아파트로 인해 생긴 빚을 갚느라 평생의 시간을 써버리며 살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이러한 현실은 물론 어느정도는 한국인 만의 것이 아니고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겪는 보편적인 것이다. 교육과 주거는 어느 나라에서나 중요하다. 게다가 대학졸업장과 집이 얻기 힘든 만큼의 댓가를 주고 있다면 우리가 그것들을 얻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어느 정도 정당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그러니까 어느 나라에나 있는 당연한 문제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대학졸업장과 집의 가치가 의문시되는 시대를 살고 있는데다가 그것을 넘어서 우리는 이것들을 문명적 반성의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 가치도 있을 것이다. 여태껏 그래왔다고 모든 당연한 것은 아니다그러나 문명적 반성은 둘째치고 한국의 사회적 반성을 위해서 문제를 먼저 생각해 보자한국에서는 대학과 아파트의 문제로 말할 있는 교육과 주거의 문제는 유독 심각하다. 그리고 일을 그렇게 만드는 이유도 공통적인 면이 있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얼마전부터 여러가지 반성이 나왔는데 그런 고민속에서 지적된 사실중의 하나가 아파트 공화국은 공공성을 지닌 생활환경의 개선을 개인들의 돈을 가지고 개발한 결과라는 것이다. 사안의 공공성을 무시한 결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행해져야 하는 일이 사적인 이익 추구를 위해 행하는 일이 되어 결국 주거문화는 모두를 고통스럽게 하는 착취의 메커니즘을 가지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런 측면은 한국의 대학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


아파트로 돌아가보자. 해방이후의 한국은 그때까지의 가난과 전쟁으로 인한 파괴때문에 형편없는 공공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주거환경의 개선은 당연히 단순히 집만 잘짓는 것이 아니라 보육원과 학교를 건설하고 길을 건설하고 상하수도 시설을 정비하고 도서관과 공원시설을 만드는 공공성을 지닌 투자와 개발이 필요하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투자는 세금을 써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역의 전반적 개발 계획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예를 들어 광장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나 하천을 정비해서 깨끗한 물이 흐르게 하는 것은 지역 주민들 모두의 삶을 향상시키는 일이다. 소수를 위한 난개발은 독재정권에게 검은 돈을 제공하는 역할을 있겠지만 결국은 모두의 이익을 해치는 일이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의 개발은 어딘가에 테두리를 쳐서는 안만을 개발하는 것이다. 아파트 단지 바깥의 주거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아파트의 건설은 투기자들을 불러 모은다. 아파트 단지 바깥이 살기 나쁘다는 것은 아파트 가격이 올라가는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두를 위한 개발은 느린 가운데 개인들의 돈이 모여서 특정 지역만 개발하고 그것이 다시 특정 개인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인기를 얻게 되자 한국에서 아파트 개발붐은 멈추지 못하는 대세가 되어 버렸다. 모두가 미친 듯이 아파트에 투자하는 나라가 것이다


어느새 한국인들은 아파트 숲이 아닌 곳에 가면 여기는 개발이 안되었다라고 말하는데 익숙해 졌다. 이런 말들을 일본이나 이탈리아의 오래된 도시들에서 사는 주민들이 들으면 기가 막힐 것이다. 로마나 교토의 낡은 건물들을 허물어 버리고 그곳을 아파트로 채우는 일이 개발이라고 말하는 것이 말이 될까?  그런 곳이야 자랑할 만한 유적이 있으니까 그렇고 우리는 쓰레기 같은 것들 뿐이었다고? 우리 땅도 아주 역사를 가진 땅이다. 로마나 교토도 쓰레기 같은 것들 뿐일 있었는데 그들이 적극적으로 보존하고 다듬는 진정한 의미의 개발을 해서 자기의 정체성을 살린 것이다. 요즘에는 우리나라도 지역마다 마을 만들기도 하고 지역 축제도 개발하려고 하면서 개발이란  아파트 단지 건설을 의미한다는 한국인의 인식이 약간 바뀌고는 있다. 예를 들어 전주 한옥마을 지역을 전부  밀어버리고 거기에 아파트 단지를 지었다면 과연 전주가 발전했을까? 그걸 개발이라고 인식해야 하는 것이 옳을까?


나는 아주 많은 한국사람들이 역시 아파트가 좋아라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물론 아파트라는 주거형태가 나쁘기만 것은 아니며 사람에 따라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한국에서 아파트에 대한 맹신은 종종 지나쳐 보인다. 사람들은 마치 세뇌라도 것처럼 빌라는 싸구려고 단독은 불편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산다. 그것은 아파트라는 형태의 주거말고는 좋은 주거환경을 경험해 보지 못한 역사의 결과물이 아닐까? 그러한 현실은 주거의 다양성을 제약한다. 결국 형편에는 맞지 않고 가격은 터무니 없이 비싼 아파트에 살지 않을 없게 만드는 현실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대세와는 다르게 살아보려고 하면 사회적 경제적 처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공공성을 가지고 모두를 위한 개발이 되어야 분야에 개인적인 투자가들의 투기가 날뛰게 내버려 두고 그것이 결국 한국을 아파트 숲으로 뒤덮히게 만든 결과는 모두의 아픔으로 남게 된다. 장기적인 개발 계획이나 아파트 단지 바깥의 상황은 무시한채 개발을 하다보니 한국은 이제 치워버릴 없는 콘크리트 숲으로 뒤덮혔고 전통적인 지역 커뮤니티도 그로 인해 많이 파괴되었다이것은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무시한 결과이며 따지고 보면 야만적이고 비민주적이었던 정치가들이 만들어 결과다물론 그런 정치가들이 정권을 차지하게 만든 것도 한국인들의 책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학은 어떤가. 대학도 당연히 공공성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는 존재다. 교육기관으로서 인재를 길러내기도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그것은 연구 개발의 중심이 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학문적 예술적 기술적 발전의 기반이 있어야 한국의 첨단 기업들도 있을 있는 것이다. 대학은 교육과 연구의 핵심이며 문화적인 중심이다. 게다가 뛰어난 인재들이 있을 곳을 제공해 줄뿐만 아니라 수없이 존재하는 직업이 없는 사람들을 취업을 때까지 맡아주는 역할도 한다는 점은 사회적으로 무시할 없다. 대학이 없었다면 그들은 소속없이 살아야 했을 것이고 그것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다


한국같이 작은 나라에서 대학의 공공성은 더욱 중요하다. 인구가 작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인재가 돈이 없어서 대학교육을 제대로 받을 없다면 한국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다. 얼마지나지 않아 한국의 회사들은 한국의 대졸자들이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할 것이고 중요한 연구시설들을 외국에 만들고 첨단산업을 위해서는 외국의 대학에 의존하려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 대학의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드는 악순환이 된다


그런데도 지금의 한국교육은 공공성의 측면에서 완전히 엉망진창이다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지도 오래 되었다. 입시전문가인 고등학교 선생님들도 파학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해져버린 입시의 미로를 가족의 후원없이 가난한 집안이나 교육수준이 낮은 집안에서 태어난 인재가 통과할 수가 있을까? 비싼 대학등록금은 둘째치더라도 아무런 사교육없이 아이가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아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설사 인재를 뽑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직도 대학입시여야만 하는가. 뭐든지 상관없다면 달리기로 인재를 뽑거나 유치원 입학시험으로 인재를 뽑고 그렇게 뽑인 인재만 성공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어떤가? 그런 것은 비합리적인데 고등학교 교과과정성적으로 인재를 판별하고 딱지를 붙이는 현재의 시스템은 합리적인가


대학들은 너도 나도 거대한 건물을 짓고 뛰어난 교수들을 영입하려고 한다. 물론 거기에는 돈이 든다. 교수들의 월급은 사소한 문제다. 월급이 문제가 아니라 연구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하는데 그것이 요즘에는 엄청난 돈이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은 누가 내야 할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학의 결실은 누가 누려야 할까?


우리는 점점 가열되고 복잡만 해지는 대학입시라는 경쟁구도에서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그것은 사실은 시민들은 경쟁할 필요도 없고 돈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달과 박사급 인력의 누적으로 대학교육의 상당부분은 원하는 사람 모두에게 제공될 있다. 그건 사실 별로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다. 예를 들어 대학도 시간강사를 많이 활용하는데 대학 시간강사의 처우는 고등학교 선생님만도 못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요즘에는 동영상강의같은 것을 활용해서 한명의 교수가 수없이 많은 학생을 동시에 가르치는 것도 가능하다. 하물며 요즘은 날로 학생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사람들은 대학교육을 받고 싶고 교수는 가르칠 있는데  도대체 경쟁을 시키고 돈을 쓰게 하는 것일까


지금의 입시공부가 대학수준의 학문연구를 하는데에 있어서 중요한 토대라도 되나? 별로 그렇지 않다. 물론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나오는 지식들이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입시과열은 아이들을 오히려 바보로 만든다. 시험에 안나올 것같은 것에는 시간을 없고 관심을 없기 때문이다. 입시공부는 관심이 있는 것이 있어도 어떤 것을 지나치게 추구하지 않는 습관을 가르친다. 성적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원만하게 뭐든지 골고루하는 것이 필요하다. 입시교육은 당신이 뭔가에 진짜로 빠져버리면 인생을 망친다는 메세지를 지속적으로 준다. 그런데 뭔가에 빠져서 오타쿠처럼 되는 이야말로 사실 학문을 하는 기본적 자세다


대학의 이름은 중요할까? 사실 대학의 이름이 중요해야 이유는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대학의 이름이 중요하다면 각각의 대학은 자기 나름의 학문적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커리큘럼도 다르고 학파가 다르다던가 철학이 달라야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은 한국의 많은 사람에게 낯설 것이다. 사실 보편성의 힘이 모든 대학을 거의 균일하게 만든지 오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은 권위주의때문인지 대학의 구성원들끼리 치열하게 소통하는 문화가 없다. 서로 다른 학과끼리는 장벽을 쌓고 소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같은 학과 안에서도 온갖 칸막이 안으로 숨기 바쁘다. 그러니까 융합을 통한 대학의 정체성 발전따위는 한국에서 매우 미약하다. 많은 대학교수들은 사실 같은 학과의 동료들보다 외국에 있는 그들의 공동연구자들과 학문적으로 가깝다. 명문대와 비명문대의 구분은 안그래도 열악한 한국의 학문적 상황에서 또다른 칸막이를 만들어 학문발전을 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대학입시 경쟁은 공공성의 포기로 아파트로 몰리게된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리 사회는 대학에 가지 않는 사람들을 처벌함으로써 대학교육경쟁을 유지시키고 있다. 딱히 학문에 뜻이 있어서 모두가 대학에 가는게 아니다. 그것은 대안적 삶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거나 아파트 투기만큼이나 투기적인 교육투기일 뿐이다. 나만 살겠다는 공공성 포기의 모습이 결국은 모두의 삶을 점점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대학을 안나와도 잘살수 있다면 이렇게 고생해서 이렇게 돈을 들여서 모두가 대학에 가려고 할리가 없다


엉망진창의 입시경쟁은 그것을  통해서 낙오되는 인재들이라는 희생을 만드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그다지 이득도 만들어 내지 못하며 만들어 진다고 해도 이득은 대부분  경쟁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몫이 되지 못한다그것은 가격으로 쉽게 인재를 뽑고 일을 시키고 싶은 대학과 기업들의 몫이다. 엉망진창의 경쟁속에서 승리한 명문대 학생들조차 요즘은 그다지 많은 혜택을 얻고 있지 못하지 않은가좋은 성적에 명문대 타이틀을 가져도 취업의 문은 좁고 장학금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니 어지간한 성적이라면 대학교육에  돈을 모아서 자식에게 그냥 물려 주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나거나 외국으로 아이를 보내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도대체 지금의 대학입시를 계속할 공공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떤 공익을 위한 것인가. 그런 것은 거의 아무 곳에도 없다


이제 대학의 이름은 마치 투기꾼들이 허공에서 만들어 아파트의 가치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대학입시는 날로 복잡하고 기묘한 모양으로 변해 와서 이제는 정말 명문대에 입학하는 사람들이 진짜 인재인지 의심스럽다사람들은 여전히 졸업한 대학이름이 현실사회에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부인할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아파트 투기를 연상시킨다. 나는 아파트를 사야할까? 아파트 값이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격은 올라갈까? 그것은 상당부분 내가 아파트 값이 올라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파트라는 주거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이 가격이 올라간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아파트가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투기의 정의와도 같은 성질이다. 투기가 투기인 이유는 이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남을 따라하면서 허공에서 가치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어느 순간 가치가 훅하고 날아가 버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명문대와 비명문대의 차이는 존재하는가? 그것도 상당부분 우리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거품이 아닌가?


고등학교에서 우리가 이미 그렇게 하듯이 우리는 대학을 전부 평준화하고 최소한의 학력시험에만 통과하면 대학에 진학할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훨씬 싼값으로 대학교육이 가능할 것이다. 대학을 쉽게 들어갈 있으니까 들어가고 싶은 사람만 들어가고 싶을 들어갈 것이다. 물론 그런 나라에도 어딘가에는 경쟁이 있고 평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경쟁을 다양화할 있다. 대학입시라는 단일한 잣대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을 평가하는 지금의 현실과는 다르다. 게다가 평가가 최신의 학문과 학습에 근거해서 이뤄질 있다. 백년도 전에 나온 지식이 대부분인 고등학교 교과과정으로 인재를 판별해야 하는가? 이미 대학학부수준의 지식이 그리 대단치도 않은 시대에 필요하지도 않는 시험을 보게하고 그것때문에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하는 현재의 모습은 합리적이지 않다.  


대학의 공공성이 강조될 수록 대학이 운영되는 돈을 내야 하는 것은 국가이거나 기업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진다. 뒤집어 말하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시민을 착취하는 것이다. 공공성을 지닌 공간의 개발을 사적인 부동산 난개발 세력에게 허락하는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 지는 이익이 모두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국 시민의 착취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만들어 학문적 문화적 결실에 기반하여 국가와 기업이 발전하면서 그런 공공성을 가진 일을 개인들의 돈으로 하는 것은 결국 시민의 착취다.


우리는 여전히 아파트 단지를 개발하고 부동산 대박을 꿈꾼다. 그리고 종종 다르게 사는 것은 말도 안되며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많은 선진국에서는 아파트가 대표적인 주거가 아닐 뿐만 아니라 한국이 홍콩이나 맨하탄같은 작은 도시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는 열심히 대학입시라는 경쟁에서 승자가 되고자 노력한다. 군대를 다녀오는 것을 포함하면 대학을 7 8년씩 다니는 일도 전보다 많아졌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지만 중간에 휴학을 해가면서 자격증을 따고 소위 스펙을 쌓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또한 학생들은 취업을 하기도 어렵지만 취업을 하고 나면 좋은 날은 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필요가 없다. 투기꾼들이 만들어 세상의 법칙은 결코 당연한게 아니다. 세상을 이렇게 만든 기성세대들은 세상이 이러니 어쩌겠냐면서 이런 세상에서라도 살아남으라고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상은 결코 바뀔 없다면서 이런 세상을 계속 유지하자고만 말하는 것은 어리석고 양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오늘날의 어린 학생들은 마치 헤어나올 없는 수렁속에 빠져 있는 좌절을 느껴야 하는데 말이다. 기성세대가 이런 세상밖에 못만든 것은 공공성이 오랜 동안 망각되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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